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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4(8화)
2장 동정수로채(3)


악양 백검문.
장원 중앙에 위치한 회의실에 무림맹 악양 지부와 백검문의 수뇌부가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현재 악양 지부와 백검문의 모든 전력이 장원에 집결된 상태였다.
백검문이 동정호에서 가까운 탓도 있었고, 튼튼한 담과 장원 내에 설치된 기관들이 있어 방어를 하기에도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놈들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현재 사십 척이 넘는 동정수로채의 선박들이 악양에 정박해있는 상황입니다. 얼핏 보기에도 놈들의 숫자가 천 명은 넘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모든 수채를 총동원한 듯합니다.”
백검문주 정위명의 물음에 무림맹 악양 지부의 지부장 왕기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백검문과 악양 지부의 무인들을 모두 합친다 해도 오백이 채 안 됐다.
전력 차가 생각보다 큰 것이다.
“무림맹에서 지원이 올 때까지는 버텨야 할 텐데…….”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위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천의단이 출발했다고 들은 것이 이틀 전이니, 아무리 빨리 움직인다 해도 앞으로 오 일은 더 걸릴 것이다.
그러니 내일이라도 당장 놈들이 공격해 온다면 과연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 봐야 수적 나부랭이들 아닙니까? 백검문의 정예 무사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요!”
백검문의 의검단주 척진도가 호기롭게 소리쳤다.
“아니, 그렇듯 쉽게 볼일이 아닙니다. 도백이 총채주가 된 후로 놈들의 전력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습니다. 결코 오합지졸이라 얕보아선 안 됩니다.”
왕기의 말처럼 도백은 총채주가 된 이후 제일 먼저 수적들의 실력을 키우고 조직을 정비하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지금은 어느 누구도 동정수로채를 한낱 수적이라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수적들의 실력과 조직이 단단해져 있었다.
“일단 백검문을 거점으로 해서 최대한 버텨 보는 수밖에요.”
“흥! 이 척진도가 있는 한 결코 놈들의 마음대로 일이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오!”
척진도의 말에 몇몇 무인들이 호응했다.
수룡왕이니 수로채니 거창한 이름으로 포장을 했지만, 그들은 결국 도적의 무리에 불과했다.
근본도 없는 무뢰배 놈들에게 함부로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

* * *

마흔다섯 척의 선박이 정박해 있는 동정호반.
그중에서도 다른 배보다 다섯 배는 커 보이는 범선의 갑판 위에 은발의 거구사내가 우뚝 선 채 악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소매 밖으로 드러난 팔뚝은 창칼도 튕겨 낼 듯 단단해 보였고, 구릿빛 피부는 부드러운 은발과 대조되어 그를 더욱 강인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이 사내가 바로 현재 동정수로채를 이끌고 있는 총채주 수룡왕 도백이었다.
그의 뒤쪽으로 백의를 입은 열 명의 무사가 도열해 있었다.
이들은 바로 치우 일족의 정예 전사들인 혼천풍이었다.
혼천풍은 모두 영력을 사용하여 육체를 강화시킬 수 있고,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다.
모두가 절정무사 서너 명을 손쉽게 상대할 수 있는 강자들로, 이들 열 명이면 어지간한 문파는 한순간에 쓸어버릴 수 있었다.
“풍마와 뇌룡, 섬응은 언제 움직인다 하는가?”
도백이 백의무인들에게 물었다.
“내일 비영들이 도착하면 수색을 시작할 것입니다.”
“좋아.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슬슬 움직여야겠군. 이왕 이렇게 된 거, 사혈맹과 무림맹이 서로 물어뜯도록 만드는 것도 좋겠지…….”
이미 사혈맹 내부에 제법 많은 인사들이 도백에게 포섭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들이 사혈맹 내부에서 부추긴다면 이번 일을 계기로 정사 두 세력 간의 갈등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얻어내야 했다.
“종구!”
“예! 총채주!”
“백검문을 친다! 아이들을 움직여라!”
“존명!”
명을 받은 부채주 종구가 큰소리로 공격을 명하자 천 명에 다다르는 수로채의 무사들이 배에서 내려 악양 시내로 향했다.

백검문은 사방 칠십 장에 이르는 큰 장원이었다.
주변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었고, 정문을 제외하고도 세 개의 문이 더 존재했다.
백검문 주변은 제법 넓은 도로가 나 있어서 항상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쿠궁!
빠직!
쨍그랑!
갑자기 대로 뒤쪽이 소란스러워지며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목숨이 아깝거든 모두 거리에서 당장 꺼지거라!”
거친 욕설과 고함 소리, 쇳소리가 들리며 한 떼의 무인들이 대로 주변의 상점과 가판을 부수며 움직였다.
“도, 동정수로채다!”
“사, 살려 주십시오!”
“안 돼!”
“아악!”
동정수로채의 습격으로 백검문 앞 대로는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정신없이 도망치는 사람들, 부서지는 천막들,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
일각이 지나자 활기차던 대로변은 수적들 외에는 아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총채주! 다 치웠습니다!”
부채주 종구의 안내를 받으며 도백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백검문은 그런 소란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봐라! 정파라는 놈들이 얼마나 위선덩어리더냐? 불쌍한 양민들이 억울하게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나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구나! 그래 놓고 우리더러 수적이니 불한당이니 도의도 모르는 도적 놈들이니 욕하지 않느냐? 만일 그들이 진정 도의를 알고 의와 협을 입에 담는다면 목숨이 아까워서 쥐새끼처럼 담벼락 뒤에 숨진 않았을 것이다! 하하하하하!”
“크크크크!”
“하하하하!”
도백의 말에 수적들이 광소를 터뜨렸다.
목소리에 상당한 공력이 실려 있었기에 백검문 안에서도 그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이익!”
“저 쳐 죽일 놈들!”
“당장 내가 나가 저 수적의 우두머리 놈의 목을 가져올 테니 허락해 주시오!”
척진도가 분을 참지 못하고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듯 일어섰다.
“지금 놈이 일부러 도발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놈의 도발에 넘어간다면 여기 모인 사백 무인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게 된다! 무엇이 중요한지 잘 생각하거라!”
정위명의 호통에 척진도는 분을 삼키며 물러섰다.
백검문의 무사들이 끓어오를 듯한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을 때, 도백의 명이 떨어졌다.
“위선에찬 정파 놈들에게 수로맹의 용맹을 보여 주자! 전위(前位)는 돌격하라!”
그와 함께 앞에 위치해 있던 네 명의 채주가 수하들을 이끌고 백검문을 공격했다.
“우와아아아아!”

* * *

한시가 급했기에 서둘러 길을 재촉한 천의단은 칠 일 만에 악양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입구에서 기다리던 전령이 전해 온 소식에 의하면, 벌써 이틀 전에 동정수로채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했다.
전력의 차가 워낙 컸기에 백검문과 악양 지부의 무사들은 막아 내기에 급급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상하리 만치 수로채 놈들은 서두르지 않고 있었다.
만일 놈들이 마음먹고 전력을 투입했다면 하루 안에 백검문을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데 놈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백검문을 도발하면서도 결코 무리하지는 않았다.
마치 차륜전이라도 펼치는 듯 이백여 명씩 나누어 번갈아 가며 백검문을 치고 빠지는 전술을 사용했는데, 이를 막아 내는 무림맹 측 무사들은 쉴 틈 조차 없어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사실 도백이 일부러 서두르지 않는 이유는 섬응 등이 열쇠를 찾을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동안은 강호의 시선을 이곳에 묶어 놔야 했기 때문이다.
“쉴 틈이 없다! 당장 백검문으로 향한다!”
전령에게 현 상황을 보고받은 모용단천은 즉시 단원들을 독려해 백검문으로 출발했다.
드디어 무림맹 소속으로서 첫 번째 전투를 맞이한 단원들은 모두가 결의에 찬 표정으로 모용단천의 뒤를 따랐다.

“흐음, 이번에는 놈들이 움직일까?”
멀어져 가는 천의단의 뒷모습을 보며 자공이 회색 눈동자를 빛냈다.
감석보를 감시하며 움직인 지가 벌써 한 달 가까이 되어 가고 있었지만, 치우 일족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글쎄, 하지만 이번 동정호 사건이 예사롭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지. 억지스러운 면이 너무 많아. 이런 일에는 보통 뒤에 음모가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지.”
진교가 입술을 핥으며 씨익 웃고는 곧장 천의단의 뒤를 따랐다.

* * *

“총채주! 무림맹의 지원이 도착했습니다!”
헐레벌떡 달려온 종구가 도백에게 말했다.
“호들갑 떨지 마라! 어차피 예상한 일 아니더냐? 인원은 얼마나 되는가?”
“삼백여 명 정도입니다. 전해진 소식에 의하면, 대회를 통해 뽑은 후기지수들로 새로이 결성된 천의단이라 합니다.”
“천의단이라…….”
“흥! 그깟 솜털도 가시지 않은 애송이놈들이야 위협거리가 되겠습니까? 저에게 삼백의 무사를 주시면 당장 놈들을 쓸어버리겠습니다.”
수룡팔채주 중 한 명인 양곽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멍청한 놈! 우습게 볼일이 아니다. 천의단을 이끄는 자는 모용단천이라 들었다. 그자는 무공뿐만 아니라 경험이 풍부하고 현명한 인물이지. 거기다 애송이들이라고 하지만 그들 면면은 각파에서 최고로 손꼽는 인재들이다. 실력은 결코 무시하지 못해. 성급하게 움직이면 우리가 오히려 당한다.”
도백의 질책에 양곽이 얼른 꼬리를 말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도백이 결정을 내린 듯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수하들을 물리고 포구까지 후퇴한다!”
모두들 예상치 못한 도백의 명에 놀라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는 상태에서 고작 삼백 명의 지원 병력 때문에 후퇴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싸움은 물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놈들에게 수룡왕의 무서움을 느끼게 해 주리라!”
도백의 말에 그제야 수적들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물에서는 그들을 당할 자가 없었다.
무림맹 놈들이 멋도 모르고 그들을 뒤따른다면 결코 잊지 못할 공포를 맞보게 될 것이다.
“존명!”
채주들은 곧바로 수하들을 거두어들이고 후퇴를 시작했다.
잠시 후, 마치 썰물이 빠져나가듯 동정수로채의 수적들이 백검문 앞에서 사라졌다.

* * *

“문주님! 드디어 천의단이 도착했습니다! 지금 이리로 서둘러 오고 있으니 곧 당도할 것입니다!”
악양 입구에서 기다리던 전령으로부터 날아온 전서를 읽은 악양 지부장 왕기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정녕 사실이오? 이제 우리도 살았구려!”
백검문주 정위명은 왕기의 두 손을 맞잡고 함께 기뻐했다.
그동안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인 것이다.
“놈들이 후퇴한다!”
그때, 수적들의 움직임을 살피던 무사가 갑자기 소리쳤다.
놀란 왕기와 정위명이 다급히 담장 위로 올라서 바깥을 살폈다.
“정말 놈들이 물러나고 있군요!”
“대체 왜…….”
믿을 수 없다는 듯 정위명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껏 마음대로 자신들을 유린하던 놈들이 갑자기 백검문을 포기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무림맹의 지원이 도착하자 지래 겁먹은 것 같습니다.”
왕기가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아니고는 놈들이 물러설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제 놈들에게 그동안 당했던 수모를 돌려주는 일만 남았구려!”
정위명이 이를 갈며 후퇴하는 수적들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