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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4(9화)
2장 동정수로채(4)


동정수로채가 물러난 지 반 각 정도 후에 천의단이 도착했다.
천의단은 백검문과 악양 지부 무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들의 목숨을 구한 셈이나 마찬가지이니 당연했다.
“반갑습니다! 무림맹 악양 지부장 왕기입니다. 제 옆에 계신분은 백검문주이신 정위명 대협이십니다.”
“이렇게 도움을 주기 위해 어려운 걸음을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왕기와 정위명이 직접 달려 나와 천의단을 맞이했다.
“천의단 단주 모용단천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동도들의 어려움을 모른 체한다면 어찌 무림맹이 정도를 대표한다 할 수 있겠습니까.”
모용단천에 이어서 각 대주들이 자신을 소개했다.
“천의단 일대주 궁천룡이라 합니다.”
“천의단 이대주 남궁인입니다!”
“천의단 삼대주 청명이라 합니다!”
그들의 이름을 들은 왕기와 정위명의 표정에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오, 이들이 바로 이번 천하영웅대회에서 뛰어난 신위를 보인 젊은이들이로군요!”
“이거, 정말 큰 힘이 되겠습니다!”
정위명과 왕기의 표정이 밝아졌다.
삼백 명 하나하나가 모두 각파에서 고르고 고른 인재들이었기에 고수 아닌 자들이 없었다.
수적들의 숫자가 많다 하나 이 정도 전력이면 오히려 쉽게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일반 무사들의 관심은 그중에서도 천룡에게 집중되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변두리 삼류 문파 출신의 나이 어린 무사가 천하영웅대회 우승자가 되었다는 소문에 모든 이들이 얼마나 흥분했던가.
그간 강호는 거대 문파와 명문세가들만의 각축장이었으며, 힘없고 출신이 비천한 이들은 감히 꿈에 대해 논할 자격도 없었다.
한데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영웅이 명문대파의 후기지수들을 모두 제압하고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선 것이다.
그간 보잘것없는 출신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며 살아온 중소 문파의 무사들에게는 그야말로 희망을 주는 소식이었다.
‘우리도 노력하면 강호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물론, 그들이 천룡처럼 뛰어난 스승을 모시거나, 어려서 벌모세수를 받는 기연을 얻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희망이란 그런 것이다.
가망성이 아예 없는 것과 만분지 일이라도 있는 것은 너무도 큰 차이였다.
그 작은 가능성이 모두의 마음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드는 것이다.
“와! 저 청년이 천하영웅대회 우승자인 궁천룡이라는군!”
“오, 소문보다 더 체격이 큰데!”
“이야! 역시 천하영웅대회 우승자답게 기세가 장난이 아니군!”
사람들이 저마다 천룡을 보며 수군댔다.
남궁인과 청명도 있었으나 그들은 기존 세력의 후계자.
일반 무사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인 것이다.
천룡은 생각지도 못했던 무사들의 뜨거운 관심이 조금은 당혹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분되기도 했다.
그만큼 자신의 이름이 강호에 널리 알려져 많은 이들에게 힘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스승들에게 귀가 아프도록 들어 왔던 자신이 강호를 구할 영웅이라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이제는 조금씩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수적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요. 공격을 받고 있다 들었는데…….”
그때, 모용단천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원이 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반 각 전에 갑자기 물러났습니다.”
모용단천은 수적들이 후퇴했다는 말에 허탈해했다.
설마 상대가 이렇게 쉽게 도망쳐 버릴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수룡왕이라는 자가 만만치 않군.”
정세의 판단이 정확하고 과감한 결단력을 가진 자였다.
모용단천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이번 싸움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 느껴졌기 때문이다.
“휴, 보통 놈이 아닙니다. 결코 무리하지 않고 조금씩 우리 측 전력을 줄여 가기만 했습니다. 그로 인해 피해가 말이 아닙니다.”
질린다는 듯 왕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현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틀 동안 사망자의 수만 팔십 명이 훌쩍 넘어갔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몸이 성한 이들이 거의 없었으며,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중상자도 쉰 명이 넘었다.
아마도 하루만 더 놈들의 공격을 받았다면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을 것이다.
왕기는 그 외에 놈들의 전력과 그간 백검문을 공격해 온 방법 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했다.
“생각보다 놈들의 전력이 상당하군요.”
왕기의 보고를 들은 모용단천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간 알고 있던 동정수로채는 숫자가 많다고는 해도 그 실력이 대부분 삼류에 불과한 수적들이었다.
한데 이번 공격을 통해 알게 된 놈들의 실력은 그보다 훨씬 뛰어났다.
거기다 훈련도 잘되어 있어서 조직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놈들이 동정호로 후퇴했다면 함부로 추격하기도 쉽지가 않군요. 아무래도 수전(水戰)을 하게 되면 우리가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만도 없습니다. 놈들이 포구를 봉쇄하고 배들을 막으면 백검문이 운영하는 사업장들의 피해가 너무 큽니다.”
정위명의 이야기에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정도 문파들도 먹고는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당연히 일정한 수입이 있어야 했는데, 그 수입의 대부분이 사업장을 직접 운영하거나 보호비를 받는 데에서 나온다.
백검문 역시 악양 내에 수많은 주루와 객잔들에게서 보호비를 받고 있었다.
만약에 사업장들의 피해를 모른 체 방치한다면 그들 모두 백검문에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고수의 숫자는 우리 쪽이 월등히 많습니다. 시간을 끌지 않는다면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모용단천과 정위명을 비롯해 초절정고수만도 무려 네 명이나 되었다.
적들 중 알려진 초절정고수는 총채주 도백뿐이었다.
나머지 채주들은 절정을 넘어섰거나 그에도 못 미치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천의단 조장들의 경지가 모두 절정을 넘는 것을 생각하면 개개인의 실력에서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수룡왕을 맡고 나머지 채주들을 문주님과 세 단주가 상대한다면 금방 놈들을 와해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정도면 수전의 불리함을 충분히 극복할 정도의 막강한 전력이라고 봅니다.”
세 명의 초절정고수가 적의 배 위를 거침없이 누빈다면 놈들이 무슨 수를 써서 막을 것인가.
초절정을 넘어선 고수에게 자신이 있는 곳이 물인지 땅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럼 놈들이 준비하기 전에 지금 당장 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왕기가 조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간을 주면 혹시라도 놈들이 함정이나 매복을 준비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모용단천이 제동을 걸었다.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는 것이 오히려 함정에 빠지기 쉬운 법입니다. 후퇴 자체가 놈들의 유인책일 수도 있으니까요.”
어차피 무림맹의 지원 병력이 오리라는 것은 도백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데 무림맹의 지원이 도착하자마자 포구로 물러났다는 것은 미리 준비한 것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백검문을 치기 전, 포구에 정박해 있는 동안 놈들이 미리 손을 써 두었을 확률이 높은 것이다.
“천의단도 강행군으로 인해 많이 피로한 상태일 것이니, 일단 오늘은 쉬고 내일 놈들을 치는 것이 나을 듯싶군요.”
정위명의 말에 왕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다음 날 동정수로채를 공격하기로 결정을 내린 수뇌부는 우선 천의단 단원들에게 휴식을 명했다.

백검문의 숙소라고 해 봐야 그리 많지 않은 탓에 삼백 명을 수용하기에는 아무래도 비좁았다.
해서 한방에 대여섯 명씩 머물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 여인들은 소속된 조를 떠나 한방에 머물게 되었다.
모용혜 역시 네 명의 여성 단원과 한방을 쓰게 되었다.
같은 조 소속의 두 사람과 또 이조와 삼조에서 각각 한 명이 같은 숙소에 배정받았다.
같은 조의 연미향, 진소소와는 모용혜 특유의 친화력으로 그간 어느 정도 가까워진 상태였다.
나머지 두 사람도 같은 천의단 소속이라는 것 때문인지 별다른 어색함은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한창 호기심 많은 아가씨들답게 피곤한 몸을 누인 채 이것저것 이야기꽃을 피우던 중 다섯 여인의 화제가 어느새 대주인 천룡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다.
“천룡 공자는 참 대단한 것 같아. 얼굴도 잘생기고 무공 실력도 따를 자가 없고. 사람이 어찌 그리 완벽할 수가 있을까?”
이조의 조원인 종예예가 황홀한 표정으로 천룡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았다.
“요것아!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구. 이미 서문 낭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니까.”
“어찌 보면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 뭐. 서문 소저도 인물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가문도 좋겠다 실력도 있겠다…….”
삼조의 이미령이 아쉬운 표정으로 내뱉은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우리 조에 있는 그 동생 천성은 어찌 그리 형이랑 딴판일까?”
그러던 중 이야기의 중심이 갑자기 천성에게로 향했다.
“그러게, 언니. 사촌이라 그런지 도저히 형제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네 명의 여인이 천성을 흉보자 모용혜는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천의단에도 부전승 때문에 간신히 들어왔다며? 형이 초절정에 들 동안 놀기만 했나 봐. 호호호.”
“혹시 주워 온 아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둘이 저렇게 달라? 호호호.”
처음엔 재미로 시작한 이야기가 점점 더 심해지는가 싶더니, 이제는 천성의 출생까지 들먹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모용혜가 나섰다.
“아니,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그래요! 언니들이 천성을 잘 몰라서 그래요. 알고 보면 얼마나 진국인데! 의리도 있고, 주변 사람들도 잘 챙기고!”
얼굴이 벌게져서 소리치는 모용혜의 모습에 모두가 깜짝 놀라 이야기를 멈추었다.
“얘는 그냥 재미로 하는 이야긴데 갑자기 정색을 하고 그래.”
진소소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흥! 재미로 할 이야기가 따로 있지! 멀쩡한 사람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고아에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다니, 창피하지도 않아요?”
“얘, 얘는 우리가 언제 그렇게 심하게 이야기 했다고 그래. 그, 그냥 장난으로 웃자고 한 이야기인데…….”
당황한 연미향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사실 이들로서도 억울한 것이, 나쁜 뜻을 가지고 한 이야기도 아니고 잠시 수다거리에 불과했을 뿐인데 모용혜가 너무 과장되게 반응하니 몹시 당황스러웠다.
“호호호, 뭘 그리 열을 내고 그래? 남들이 보면 둘이 사귀기라도 하는 줄 알겠다.”
비교적 밝은 성격의 이미령이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농을 건넸다.
“누, 누가 누굴 사귄다고 그래요! 저, 정말! 없는 이야기까지 만들어 내고!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요! 흥!”
얼굴이 벌게진 모용혜가 방문을 열고 후다닥 뛰쳐나가자 네 사람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