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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4(11화)
3장 두 번째 열쇠(2)


기이이이잉!
그러자 기관음이 들리며 제단이 갈라지고 비밀 석실의 입구가 드러났다.
순간, 입구를 통해 뜨거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대단하군! 여기까지 열기가 느껴지다니.’
그렇다고 참지 못할 만큼 고통스러운 열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기분을 들뜨게 하는,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뜨거움이었다.
석실에 들어서니 열기는 더욱 강해졌다.
입구가 닫히자 기분 좋은 열기가 공간을 가득 휘돌았다.
사내가 조용히 눈짓을 했다.
무슨 뜻인지 짐작한 천성은 화산에서처럼 열쇠에 손을 가져다 댔다.
화아악!
“다시 보게 되는군. 결국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법이지.”
어느새 천성의 눈앞에는 복희가 서 있었다.
“그래, 이제 열쇠를 찾을 마음이 생겼는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복희가 물었다.
씁쓸한 얼굴로 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치우 일족에게 넘겨줄 수는 없으니 당연히 열쇠를 찾아야 했다.
결국엔 복희의 뜻대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열쇠를 찾는 일이 결코 옳지 않다거나 도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다지 불만은 없었다.
“잘 생각했네. 유물이 엉뚱한 자들이 손에 넘어간다면 큰 혼란이 벌어지게 될 것이야.”
천성은 복희의 말이 여러 가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유물이 무엇이기에 치우 일족은 그토록 찾으려 애쓰는 것이며,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무엇하러 열쇠를 남겨 누군가가 찾을 수 있도록 했는가.
또한, 치우 일족이나 헌원 일족이 열쇠를 찾는 것을 왜 막지 않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궁금한 점이 많은가 보군?”
마치 생각이라도 읽은 듯 복희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좋아. 내가 그대의 궁금증을 조금 풀어 주도록 하지.”
잠시 여유를 둔 복희는 유물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했다.
“화산에서 이미 들어서 알겠지만, 세 일족은 모두 내 제자들이지. 하지만 내 말을 어기고 인륜을 저버린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형벌을 내렸네. 바로 그들의 힘을 모두 거두어 간 것이지. 치우와 헌원, 신농 모두 영력을 상실했네. 거기다 헌원은 아예 영력을 다시는 쓸 수 없는 몸으로 만들었지. 그리고 다시는 세상일에 직접 관여하지 않겠다 선언했네. 내가 직접 관여함으로 인해 오히려 인간들의 욕심만 부추긴 꼴이 되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연민을 아주 버리지는 못해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았네. 그것이 바로 유물이네.”
복희가 잠시 허공을 응시하며 옛일을 떠올렸다.
“지금 치우가 사용하는 영력은 불완전하지. 신농도 그렇고. 그 이유는 내가 힘을 빼앗아 가면서 영력을 사용하는 방법 또한 가져갔기 때문이네. 치우의 살아남은 후손은 스스로 수천 년을 걸쳐 영력에 대해 연구하고 발전시켜 그들만의 방법을 만들어 냈지. 하지만 그대도 보았다시피 불완전하고 미숙한 힘이야. 내가 남긴 유물은 바로 완전한 영력의 사용법과 육신을 변화시키는 혼원수(混元水)라네. 하니 치우 일족이고, 헌원 일족이고 눈에 불을 켜고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
그제야 천성은 이해가 갔다.
복희의 설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혼원수는 태초의 파편을 통해 천성의 육체가 변화된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물질이었다.
영력을 사용하는 데 최적화된 육신으로 만들어 주는 것뿐 아니라 기문을 생성한다.
헌원 일족도 혼원수를 통하면 다시 영력을 익힐 수 있는 몸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인간들이 영력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할 것이라 여겼네. 해서 그때가 되면 열쇠를 찾아 스스로 유물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네. 천률음보는 일종의 열쇠이자 지도이지. 나는 이 책이 오천 년에 한 번씩 세상에 나타도록 안배했네. 오천 년마다 인간이 힘을 얻을 자격이 있는지 시험하는 것이지. 그대는 바로 그 심판관이네.”
천성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복희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인간들의 자격을 판단할 심판관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리 말했듯이 나는 더 이상 세상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기로 했네. 물론, 외부 세력의 침략이나 문명이 멸망에 이를 정도의 큰 위험은 예외이지. 어쨌든 누가 열쇠를 얻어 완벽한 영력을 사용하게 되든 관여할 수 없다는 이야기야. 그래서 자격이 없는 자들이 영력을 얻는 것을 막기 위해 그대가 필요한 것이네.”
“저도 여러 인간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인데, 왜 하필 접니까?”
천성 자신도 완벽한 인간이라 할 수 없었다.
쉽게 분노하고, 욕심을 참지 못하고, 남들처럼 실수도 하는 평범한 존재였다.
한데 왜 천성을 심판자로 선택했는가.
“그대는 결코 여러 인간 중 하나가 아니네. 특별한 존재지.”
복희가 잠시 눈을 빛내며 천성을 바라보았다.
천성은 무언가 기묘한 기분에 휩싸여 침을 꿀꺽 삼켰다.
“그대는 이 행성이 아닌 다른 별에서 온 존재네! 엄밀히 말해 인간이라 할 수 없지!”
천성은 멍한 표정으로 복희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복희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한참을 되뇌어 보았다.
인간이 아니라니.
행성? 다른 별?
지나가던 어린아이도 웃을 이야기들이 아닌가.
충격적이라거나 놀랍다거나 하는 반응조차 불필요한 이야기였다.
그저 왜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인가 하고 복희를 바라볼 뿐이었다.
“흠, 하기야 중원에서는 우주와 행성에 대한 개념이 너무도 원시적이지. 한마디로 쉽게 설명해 주자면, 그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라네.”
복희는 천성이 알기 쉽게 설명을 해 주었다.
지금 천성이 있는 지구라는 행성과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른 행성들에 대한 개념들에 대해서 차근차근 말해 주었다.
천성은 갑자기 몰려드는 두려움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신이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는 뜻을 이해하게 되자 정체성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부모님, 가족, 문도들, 친구…….
모두가 갑자기 낯선 존재가 되었다.
‘대체 그럼 나는 뭐란 말인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마치 한순간 괴물이 되어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두려워할 필요 없네. 단지 태어난 곳이 다를 뿐, 그대나 이곳 인간들이나 똑같은 인류이네. 오히려 그대가 태어난 행성은 이곳보다 훨씬 앞선 문명과 정신을 가지고 있지. 그대의 친부모는 태초의 파편을 수호하는 고귀한 임무를 수행하던 자들이지.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하네.”
복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천성을 조금씩 안정시켰다.
“중요한 것은 그대가 고귀한 피를 이은 존재라는 것이네. 그대의 정신과 의지는 이곳의 인간들에 비해 훨씬 곧고 강인하지. 또한, 아직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무한한 힘이 그대와 함께하고 있네. 바로 태초의 파편이지. 그렇기에 그대가 가장 심판관에 적합한 것이네.”
어느 정도 안정이 된 천성이었지만 아직도 마음이 혼란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대는 어릴 때 지금의 부모님에게 입양되었지. 그렇다고 그들이 그대의 가족이 아니던가? 지금껏 그대와 함께한 문도들과 가족들 친구들은 어떤가? 그들과의 관계는 모두 아무것도 아닌가? 그 사람을 정의하는 것은 육신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삶의 기억과 그로 인해 형성된 모든 관계라네.”
복잡하고 혼란스러웠지만 복희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었다.
분명 궁혁도와 가족들은 자신이 어떤 존재일지라도 외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천성은 언제나 아들이자 형제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천성의 머리에 떠올랐다.
“휴…….”
길게 한숨을 내쉰 천성이 착잡한 마음으로 머리를 저었다.
어쨌든 천성에게는 이곳이 고향이었고,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자신이 어떤 존재든 간에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래. 그대는 그들을 위해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네. 그리고 오로지 그대만이 그들을 지킬 수 있지!”
복희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으나 천성은 그것이 아마도 치우 일족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 여겼다.
놈들을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단은 그들의 음모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보호하는 길이었다.
오늘 이곳에 열쇠를 찾으러 온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마음을 정한 듯하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복희가 손을 펼치자 그곳에 화의 열쇠가 나타났다.
“이곳에 있는 열쇠는 이미 짐작하듯이 오행 중 화(火)의 열쇠네. 또한 다섯 음 중 치(緻)의 음을 내는 악기이기도 하지.”
수의 열쇠도 그렇고, 열쇠들이 각각의 음을 내는 악기라는 사실이 천률음보와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떠올랐다.
“사실 위쪽에 있는 열쇠도 비동을 열 수 있는 진짜 열쇠라네. 단, 이곳에 있는 열쇠는 그대만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것이지. 이 열쇠는 결코 다른 이들은 건드릴 수 없다네. 태초의 파편에 의해 재구성된 육신을 가진 자에게만 반응하게 되어 있지.”
이미 너무도 많은 이야기를 들은 터라 복희의 이야기가 그리 새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은 혼자 왔군?”
아마도 무숙에 대해 묻는 듯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천성은 무숙이 자신 대신 숙소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흠, 그럼 시간이 그리 많지 않겠군. 어차피 화산에서 대부분의 설명은 들었을 테니, 그럼 기운을 받아들인 후 바로 떠나도록 하게. 열쇠는 놔두고 가게. 그대의 몸에 각인된 기운이 앞으로 열쇠의 역할을 할 걸세.”
복희의 형상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대가 이제 열쇠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하니 오늘은 나머지 열쇠들의 위치도 다 알려 주도록 하지. 그곳은…….”
복희의 말이 끝나는 순간, 천성의 몸이 화산에서처럼 굳어 버렸다.
하지만 이미 경험했던 터라 그다지 당황하지는 않았다.
화아아아아악!
그때, 천성의 미간으로 붉은 섬광이 작렬했다.
모든 걸 태울 듯한 뜨거운 불덩이가 천성의 온몸을 거칠게 휘돌았다.
콰아아아앙!
결국, 불덩이들은 기존의 기문을 부수고 새로운 기문을 생성했다.
동시에 짜릿한 쾌감이 천성의 온몸을 관통했다.
천성은 한동안 눈을 감고 황홀한 기분을 만끽했다.
그 모든 과정이 화산에서와 같았다.
단지 새로 생성된 기문은 그 크기가 더욱 커졌고, 푸른색 고리 주변에 붉은 빛무리를 두르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무숙이 없는 터라 이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몸의 상태나 기문의 크기로 보아 분명 이전보다 강해졌음은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