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영웅재천 4(15화)
3장 두 번째 열쇠(6)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제시간에 도착한 천성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확인한 후 뒷간에서 무숙과 다시 합체했다.
시간은 벌써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자리에 누운 천성은 오늘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느냐?]
무숙이 궁금한 듯 천성에게 물었다.
천성은 군산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차근차근 무숙에게 설명했다.
오늘은 그래도 제법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결국 열쇠를 빼앗긴 것은 아쉽지만, 치우 일족에게 상당한 타격을 안긴 것이다.
가면인 두 명을 죽였고, 끝까지 확인하진 못했으나 화산의 경우를 생각해 보았을 때 그곳에 쓰러졌던 자들도 대부분 목숨을 잃거나 자살을 했을 것이다.
거기다 열쇠의 힘도 흡수했으니,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이 훨씬 많았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은 태초의 파편을 노리는 암살자로 보이는 복면인을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천성은 복면인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자가 날 수 있었다고?]
‘네. 분명 동정호를 날아서 악양으로 돌아왔습니다. 속도도 음속을 넘은 것이 분명합니다.’
[흠, 그렇다면 최소한 두 번째 단계를 넘어섰다는 이야기인데…….]
여러모로 의문이 가는 상황이었다.
천성을 공격하지 않은 것을 보면 반드시 암살자라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치우와 헌원, 두 세력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영력을 사용하는 제삼의 세력이 있다 보아야 하는데, 초월자의 복제체인 복희가 모르는 세력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복희가 알고도 숨겼다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초월자의 사자가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겠는가.
[분명 태초의 파편과 관계가 있음이 틀림없어. 일단 놈의 정체를 알아낼 때까지는 최대한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
‘알겠습니다.’
무숙은 다시 한 번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다음 날 아침을 위해 천성은 복잡한 상념들을 뒤로한 채 잠을 청했다.
섬응은 천성의 예상과는 달리 아직 군산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는 모든 기운과 기척을 죽인 채 지하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아마도 흑의인은 열두 척의 배가 가짜임을 확인하면 자신이 물속으로 도망쳤다 생각하고는 추격을 포기한 채 이곳을 떠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돌고래가 아닌 이상 물속에서 오랫동안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섬응은 만일을 대비해 동이 틀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군산을 나섰다.
* * *
흑의복면인 하나가 백검문의 담을 넘어서 천의단이 머무는 숙소로 향했다.
은밀한 움직임으로 숙소 중 한곳에 도착한 그는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섰다.
그의 움직임이 워낙 은밀했기에 방 안에서 잠든 자들은 그가 나갔다 왔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그는 자리에 누웠다.
‘재밌군. 나의 존재를 단숨에 알아차리다니. 이제껏 만난 자들 중 가장 강력한 영력을 가지고 있었어. 하지만 파편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는데……. 하기야 봉인을 했다면 내가 알 수야 없지.’
영력을 쓰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그들 중 누가 그가 찾는 자인지 아직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오늘 보았던 흑의인이 그나마 가장 확률이 높았으나, 한 가지 문제는 그자가 불을 쓰는 자와 같은 무리인 듯 보였다는 것이다.
‘그 아이가 벌써 세력을 만들었을 리는 없는데…….’
아니면 세력에 의해 발견되어 키워진 것인가.
하여간 아직까지는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확히 확인하기 전까지는 로안에게 보고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직접 한 명, 한 명 상대하며 놈을 찾기도 지난했다.
그가 비록 음속을 넘어선 속도로 움직일 수 있고, 비행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무력은 형편없었다.
그는 전투원이 아니라 정보국 소속 요원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좀 더 지켜보기로 하고 백담은 피곤한 몸을 뉘였다.
4장 수룡왕(1)
다음 날 아침.
드디어 천의단은 동정수로채를 공격하기 위해 백검문의 정문 앞에 모였다.
백검문과 악양 지부의 남은 인원까지 합쳐 약 오백오십 명 정도로 정벌군이 꾸려졌다.
전체 지휘는 모용단천이 맡기로 했다.
연륜이나 실력 면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었기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싸움을 앞둔 무사들의 분위기는 비교적 밝았다.
고수들의 수에서 워낙 차이가 나니 결코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다들 얼마나 큰 공을 세울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잔뜩 들뜬 상태였다.
무림맹 소속으로 최초의 전공을 올릴 기회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천성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긴장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서문유란의 모습이 보였다.
가끔 천룡과 눈길을 주고받으며 미소를 보이는 모습이, 이전과는 다르게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항상 침울하던 그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보기가 좋았다.
상관중혁이 천성을 한 번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리는 모습도 보였다.
‘훗!’
가소로운 놈의 모습에 천성이 속으로 조소를 지었다.
지금 자신이 호랑이 코털을 건드리고 있음을 놈은 알고 있을까?
“우리 조가 다른 조에게 뒤처지면 가만 안 두겠다!”
그때, 일조 조장 공현이 스님답지 않은 과격한 호통으로 조원들을 윽박질렀다.
그 모습에 다들 크게 웃었다.
“천성 소제, 어제는 무슨 화장실을 두 번씩이나 갔다 오고 그러나? 혹시 나 몰래 술이라도 마신 겐가?”
감석보가 실눈을 뜨고 천성에게 물었다.
“하하하…… 저녁을 잘못 먹었는지 배탈이 나서…….”
찔끔한 천성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긴 밤새 이리저리 뒤척이는 것을 보니 그런 줄은 짐작했네! 그래서 항상 먹을 것을 조심해야 되는 법이지! 자, 그래서 어떤 음식이 과연 좋은 음식인가 하면…….”
곧이어 감석보의 장황한 설교가 시작되었다.
천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무숙은 잠이라는 계념이 없었다.
물론, 자신의 손실된 정보와 힘을 회복하기 위하여 휴식을 취하긴 했으나, 그건 오히려 치료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때문에 멀쩡한 상태에서는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한 시진이 넘게 한 자리에 누워서 가만히 있으려니 무숙으로서도 좀이 쑤실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래서 이리저리 뒤척인 것인데, 다행히 그게 천성이 숙소에 있었다는 증거가 된 것이다.
“성아, 쫄지 말고 이 누나 옆에 꼭 붙어 있어라! 호호호!”
모용혜가 농을 하며 긴장을 풀기 위해 애썼다.
“흥! 형 앞에서 연약한 소녀 어쩌구 하던 게 누구더라?”
천성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천룡 오라버니는 나보다 세잖아. 넌 한주먹감이고. 억울하면 너도 천룡 오라버니처럼 실력을 키우든가. 후훗!”
“어허, 사람이 싸움 실력보단 인품과 덕을 키워야지, 어찌 건달패들처럼 주먹이나 칼을 앞세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고. 쯧쯧.”
짐짓 노인네 같은 표정으로 천성이 혀를 찼다.
두 사람이 한창 티격태격하며 농을 주고받던 중 모용단천이 나타났다.
“일단 포구로 가서 놈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작전을 짠다!”
천의단주 모용단천의 출발 명령과 함께 정파의 연합 세력은 보무도 당당하게 악양 포구로 향했다.
포구에 도착하니 동정수로채의 배들은 포구에서 이십 장 정도 떨어진 위치에 정박해 있었고, 수적들 역시 모두 배에 오른 상태였다.
아마도 물에서 싸움을 벌이려는 속셈인 듯 보였다.
하지만 대부분이 일류를 넘어선 무사들을 상대로 지형의 이점을 살릴 수 있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아 보였다.
아무리 정예화된 수적들이라 하나 수적은 수적.
채주나 간부 급 외에는 기껏 삼류를 벗어난 자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보통 수채나 산채의 채주를 따르는 부채주나 심복들의 수준이 기껏해야 일류 안팎인 것을 감안하면 이 싸움은 해 보나 마나 한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수전(水戰)이라면 정파의 무사들도 조금은 피해를 입을 것이다.
포구에는 동정수로채가 배의 이동을 차단한 관계로 수많은 선박들이 발이 묶인 채 정박되어 있었다.
해서 이십 장 정도 떨어진 수로채의 배가 있는 곳까지 움직이는 것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배와 배를 넘어 놈들이 있는 곳까지 달려가면 그만인 것이다.
주위를 훑어본 모용단천은 특별히 신경 쓸 문제가 보이지 않자 별다른 작전 없이 힘으로 누르는 것을 택했다.
“자! 다들 조심들 하라! 놈들이 화살이나 작살을 쏘아댈 수도 있다. 특히 그물을 조심하라. 그물에 걸려 움직임이 멈추면 화살에 의해 고슴도치가 될 테니!”
역시 노련한 무인답게 모용단천은 아직 경험이 없는 천의단원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줬다.
수적들이 수전에서 사용하는 무기는 대부분 활, 그물, 작살 등이었다.
그 외에는 암기라든지 일반 무사들이 사용하는 것과 비슷했다.
물속에서 공격하는 경우도 있으나 지금처럼 배들이 가득 찬 상황에서는 별 효용이 없다.
젊은 무사들의 눈이 활기로 가득 찼다.
“가자! 가서 놈들에게 무림맹을 도발한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려 주자!”
“우와아아아아아!”
함성과 함께 오백 명이 넘는 무사들이 포구에 정박한 배들을 발판 삼아 동정수로채의 선박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파파파파파팟!
예상대로 놈들이 날린 화살 비가 무사들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퍼퍽!
퍽!
“크윽!”
“으악!”
백검문과 악양 지부 무사들 중 몇몇이 화살에 피해를 입었으나 그런 경우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이십 장의 거리는 무인들에겐 그야말로 코앞에 불과했다.
다음 활시위를 당기기도 전에 이미 천의단원들은 적의 배 근처에 도달해 있었다.
“교룡삭을 던져라!”
그때였다.
고함 소리와 함께 갑판 위로 일단의 수적들이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붉은색 밧줄을 들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밧줄 전체에 일정 간격으로 날카로운 갈고리가 달려 있었다.
교룡삭(蛟龍索).
교룡의 힘줄을 꼬아서 만들었다는 밧줄로, 그 강도가 쇠와 비견될 정도여서 어지간한 검에는 잘 끊어지지도 않는 물건이었다.
한데 동정수로채가 쓰는 교룡삭은 독특하게도 거기다 갈고리까지 매달아 살상용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휘익! 휙!
천의단이 배 밑에 다다르자 놈들이 교룡삭을 날리기 시작했다.
“조심해라! 절대 끊으려 하지 말고 피해라!”
모용단천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함쳤다.
검기를 날리는 고수가 아니라면 교룡삭을 잘라 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엇!”
“으윽!”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천의단원 몇이 교룡삭에 걸렸다.
교룡삭이 몸을 둘러싸면서 갈고리가 살을 파고들어 상처를 냈다.
놀라 당황한 단원들이 빠져나가려 발버둥 칠수록 갈고리는 더욱 살을 헤집어 놓았다.
“크악!”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교룡삭을 잡은 수적들이 두세 명씩 달려들어 줄을 잡아당겼다.
“이놈들!”
모용단천이 몸을 날려 교룡삭들을 끊어 내자 천룡을 비롯한 세 단주와 각 조장들도 빠르게 움직여 교룡삭을 잘라 냈다.
휘익! 휙!
하지만 끊임없이 날아드는 통에 무공이 약한 단원들이 제법 피해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