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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4(19화)
5장 상처뿐인 승리(2)


후우우우우우웅!
수룡왕이 다시 호수 물을 끌어 올려 몸 주위로 회전시켰다.
콰콰콰콰콰!
물줄기들이 점점 빠른 속도로 돌며 강력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내 오늘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네놈을 죽이겠다!”
수룡왕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동시에 몸 주위를 회전하던 거대한 소용돌이가 솟구쳐 올라 천성을 향해 날아갔다.
천성은 압도적인 힘으로 놈에게 절망을 느끼게 해 주리라 결심했다.
위이이이잉!
마음먹은 순간, 다섯 개의 기문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주변의 기운을 빨아들였다.
슈아아아아아아악!
동정호 주변의 막대한 자연지기가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며 마치 진공상태가 된 듯 천성을 중심으로 기의 회오리가 생겨났다.
수룡왕이 만들어 낸 물의 소용돌이마저 조금씩 천성에게 빨려 들어갈 정도였다.
잠시 후, 사방을 휩쓸던 기의 회오리가 멈추고 온몸 가득 영력을 두른 천성이 소용돌이를 향해 돌진했다.
투아아아앙!
그그그그그그극!
영력의 방어막과 소용돌이가 부딪치며 귀를 찢는 소음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생각보다 소용돌이의 위력이 강해 밀어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천성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천성의 영력이 점점 압축되더니 마치 송곳처럼 뾰족해졌다.
풍마의 바람벽을 뚫을 때 사용했던 방법을 다시 한 번 펼친 것이다.
쉬이이이이익!
천성이 압축된 영력을 회전시키자 차츰 소용돌이가 갈라져 갔다.
곧이어 천성이 스스로의 몸도 영력과 함께 회전시키자 송곳의 관통력은 배가되었다.
수룡왕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으아아아아아아!”
기합성을 토해 내는 수룡왕의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영침의 효과까지 사라진 터라 소용돌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명력까지 끄집어 내야 했다.
콰콰콰콰콰!
하지만 그의 마지막 발악에도 불구하고 천성은 소용돌이를 반으로 가르며 수룡왕의 코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퍼어억!
천성의 주먹이 수룡왕의 명치에 작렬했다.
“쿨럭!”
몸이 기역 자로 꺾인 수룡왕이 피를 한 움큼이나 토해 냈다.
이미 소용돌이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수룡왕에겐 더 이상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문득 수룡왕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일었다.
천성은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자와 적으로 엮였단 말인가.
차가운 표정으로 천성이 그의 백발을 잡아챘다.
퍼어어억!
천성의 오른 주먹이 수룡왕의 입에 꽂혔다.
일격에 수룡왕의 이빨이 모두 부러지고 얼굴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제 독단을 깨물 이가 없으니 자살은 못하겠지?”
천성이 엉망진창이 된 수룡왕의 입안에 손을 집어넣어 독단을 빼냈다.
우두둑!
곧이어 수룡왕의 두 다리와 팔마저 부러뜨렸다.
달아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천성의 잔인한 손속에 수룡왕은 순식간에 혈인이 되었다.
손을 멈춘 천성이 수룡왕의 귀에 속삭였다.
“네놈들이 나를 건들지 않았다면 너희가 열쇠를 찾든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데 네놈들은 결국 스스로의 무덤을 팠지. 내가 반드시 네놈들의 씨를 말려 스스로 벌인 일을 후회할 마지막 한 사람조차 남기지 않을 것이다!”
천성의 광기에 젖은 목소리에 수룡왕이 몸을 떨었다.
천룡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천성의 머릿속은 분노와 광기만이 남아 있었다.
‘대체 우리가 누굴 건드린 것인가…….’
수룡왕은 공포에 젖은 눈빛으로 천성을 보았다.
치우 일족은 너무도 강력한 적을 만들었다.
천성의 힘에 대해 조금만 일찍 파악했다면 결코 일부러 부딪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그들이 쌓아올린 업보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헌원에 대한 복수였고, 다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한데 언제부턴가 복수를 위해서는 어떤 더러운 일도 서슴치 않게 되었다.
헌원 일족보다 더 잔인하고 더 악랄해져야만 놈들을 이길 수 있다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전사의 자존심마저 잃고 말았다.
그들의 조상은 세상을 지배할 야망은 있었으나 결코 비겁하거나 졸렬한 음모를 꾸미지 않고 항상 정면 돌파를 고집했다.
그것이 전사의 자존심이자 긍지였다.
한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들 역시 헌원 일족처럼 음모나 꾸며대는 자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흑의인은 우리의 타락에 대한 징벌인가…….’
수룡왕이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그 모습에 주먹을 들어 수룡왕의 목숨을 끝내려던 천성이 멈칫했다.
‘차라리 무림맹에게 넘겨 놈들의 정체를 세상에 알리는 편이 낫겠군.’
놈들의 정체가 알려지고 그동안 벌였던 일들이 드러나면 치우 일족은 온 강호의 표적이 될 것이다.
열쇠에 대한 것도 알려지고 나면 전처럼 쉽게 찾아나서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어디, 네놈들의 정체가 세상 모두에게 드러나고도 마음껏 활개 칠 수 있을지 두고 보자!’
“이자는 치우 일족이라는 음모 세력의 수하요! 대연문 참사를 벌인 것도 이들이오! 이들의 목적은 복희의 유물을 얻어 중원을 제패하는 것이오! 이곳의 일도 유물의 열쇠를 찾기 위해 벌인 것이오! 게다가 마련과의 분쟁도 이들이 꾸민 음모요! 내 말을 믿고 안 믿고는 그대들의 자유요! 이자를 그대들에게 넘길 테니 조사를 하든 죽여 버리든 알아서 하시오!”
천성은 피투성이가 된 수룡왕을 모용단천에게 던진 후 호수로 뛰어들었다.

엉겁결에 수룡왕을 받아 든 모용단천이 천룡이 사라진 동정호를 바라보았다.
“정말 놀랍군! 저자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모용단천과 천의단 무사들이 천성의 신위에 감탄사를 토해 내면서도 그 잔혹한 손속에는 눈을 찌푸렸다.
압도적인 무위를 보여 주던 수룡왕과 그 수하들을 너무도 쉽게 제압한 천성의 모습은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이자 공포였다.
거기다 수백 개의 무기를 이기어검으로 날리다니!
그것은 맹주인 남궁영이나 구천마제 혁련우조차도 과연 할 수 있을지 의심되는 신기였다.
살아남은 무림맹과 백검문의 무사들은 흑의인의 정체에 대한 이야기로 여기저기서 수군댔다.
어쨌든 흑의인의 등장으로 수룡왕을 잡았고, 동정수로채를 괴멸시킬 수 있던 것이다.
“이자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악양 지부장 왕기가 난감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번 일의 원흉이니 맹으로 데려가 취조함이 마땅했으나, 부상의 정도가 심해서 과연 말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거기다 수많은 인명을 잃은 백검문의 입장에서는 수룡왕을 자신들의 손으로 죽이고 싶을 것이 분명했다.
“일단 맹으로 데려가 치료를 한 후 심문을 해야겠군요……. 무림의 중대사가 걸린 일이니 백검문주께서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흑의인의 말을 믿겠단 말씀이십니까?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런 자가 한 이야기를 어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백검문주 정위명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까지 정황으로 보아 그자가 대연문주를 구해 낸 흑의인과 동일인으로 보입니다. 거기다 이곳에서도 우리를 도왔으니 최소한 무림맹과 반대의 입장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쓸데없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모용단천의 말에 왕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혹시 그 말이 거짓이라 해도 최소한 조사는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위명은 수룡왕을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지 못함이 못마땅했으나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도 없었다.
모용단천이 혈인이 된 수룡왕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흑의인과 수룡왕의 대화를 통해 듣게 된 생소한 단어들.
치우, 팔신, 대연문의 흉수에 대한 것과 수룡왕이 사용한 괴이한 술법 등은 지금부터 그들이 알아내야 할 문제였다.

천성은 영력을 가라앉힌 후 무숙이 있는 곳으로 헤엄쳐 갔다.
전장은 거의 정리된 상태라 물속에 남은 것은 시체와 전투의 잔해뿐이었다.
[지금!]
천성의 모습을 한 무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호수로 향했다.
모용혜는 천룡의 상태에 신경 쓰느라 무숙의 행동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풍덩!
변신을 풀고 물위로 올라온 천성은 곧바로 천룡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행히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상태가 좋지 않다.]
무숙이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천룡은 천성의 우상이자 믿음직스러운 보루였다.
천룡이라면 절대 이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일단 의원으로 옮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성이 조바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지. 이제 싸움도 모두 끝났으니 어서 대주를 먼저 옮기세!”
“제가 업겠습니다!”
천성이 나서자 공현이 가로막았다.
“아니야. 들것을 만들어 옮기는 것이 좋네. 자칫 몸에 충격이 가면 상태가 더 심각해질 수 있어!”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선 천성은 악양 지부의 무사들이 들것을 만들어 천룡을 옮기는 것을 뒤따라갔다.
“천룡 오라버니는 괜찮겠지?”
모용혜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말했다.
천성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서문유란의 모습은 마치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그녀는 천룡이 왜 무리를 했는지 알고 있었다.
마지막에 자신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강을 뿜어낸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살리려고 천룡이 목숨을 건 것이다.
당연히 그녀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천룡을 만나 그나마 굳어 버린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있던 그녀였다.
한데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천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모든 게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끊임없는 후회가 밀려왔다.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더라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수룡왕의 실력이 그토록 뛰어날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도 못했다.
가면인들과 비슷할 것이라 여긴 것이다.
이제 와서는 의미 없는 후회였다.
지금 중요한 것은 천룡을 살리는 것이다.
영력을 써서 살릴 수 있다면 정체가 드러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천성에게는 천룡을 살릴 방법이 없었다.
‘젠장! 정작 이럴 땐 아무 소용도 없구나!’
예전보다 몇 배나 강해진 천성이었지만, 지금은 너무도 무기력했다.
“걱정 말게, 아우! 천룡 공자가 누구인가? 이 정도로 쓰러질 사람이 절대 아닌 것을 자네도 알잖는가?”
감석보가 힘을 실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원까지 움직이는 시간이 천성에게는 영겁처럼 느껴졌다.

백검문의 의당에 도착한 일행은 재빨리 천룡을 침상에 뉘였다.
의원이 진맥을 짚어 보더니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게 기적이군요……. 일단 최대한 치료를 해 보겠습니다만, 기대는 마십시오…….”
씁쓸한 얼굴로 의원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어찌 의원이 환자를 그리 쉽게 포기한단 말이오!”
감석보가 언성을 높였다.
보다 못한 천성이 감석보를 말려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계속해서 천룡을 보고 있기가 너무도 괴로웠기 때문이다.
“걱정 마. 천룡 오라버니는 반드시 깨어날 거야.”
뒤따라 나온 모용혜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천성을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