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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4(21화)
6장 흑협(黑俠)(2)


회천궁(回天宮).
대전을 가득 메운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 채 무거운 침묵이 공간을 장악했다.
용천광은 굳은 표정으로 섬응을 노려보고 있었다.
“죽여 주시옵소서!”
섬응이 머리를 바닥에 쿵쿵! 찧으며 울부짖었다.
용좌에 앉은 용천광의 신형이 분노로 바들바들 떨렸다.
“이익……!”
용천광은 입을 벙긋거리며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도무지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팔신 중 두 명이 목숨을 잃고, 혼천풍이 모두 죽었다.
거기다 방금 온 전서에 따르면, 수귀마저 팔다리가 부러진 채 무림맹에 사로잡혔다.
이것은 치우 일족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이었다.
원래는 한 사람의 사상자도 없이 끝났어야 할 작전이 괴멸에 가까운 결과를 낸 것이다.
구공의 반대를 무릅쓰며 혼천풍까지 보냈는데, 그들마저 전멸했다.
“어째서!”
용천광의 두 눈에서 혈광이 쏟아져 나왔다.
쿵! 쿵!
섬응의 이마가 깨져 피가 흘러내렸다.
“그만!”
용천광이 섬응을 멈춰 세웠다.
어찌 보면 그나마 섬응 때문에 열쇠라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그의 기지(奇智)가 아니었으면 피해는 피해대로 입고 임무도 실패했을 것이다.
탓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해 주어야 마땅한 것이다.
“또 그 흑의인의 짓이라고?”
용천광은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천황!”
섬응이 희미한 정신을 부여잡으며 간신히 대답했다.
“대체 놈이 왜 우리를 이토록 방해하고 괴롭히는 것이냐! 대체 무엇 때문에!”
“소공녀의 전언에 의하면, 아마도 놈이 대연문 사건으로 인해 크게 분노한 듯합니다. 해서 이번엔 독하게 손을 쓴 것 같습니다.”
구공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결국, 대연문의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허, 결국 놈이 대연문과 관계가 있었다는 말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천성과 감석보가 그래도 제법 오랜 기간을 함께 여행했으니, 엄밀히 말해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 놈과 우리는 더 이상 한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는 사이가 되었군!”
치우 일족은 대연문의 무사들을 학살했고, 천성은 팔신 중 세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제는 한쪽이 사라지기 전에는 서로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이었다.
치우 일족이 알기로 천성이 등장한 것은 선검문에서부터였다.
당연히 그들의 입장에서는 천성이 먼저 자신들의 일을 방해했고, 음후를 죽이기까지 한 원수인 것이다.
해서 천성을 징치하려 했던 것이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놈의 목을 내게 가져오라! 일족의 원한을 갚지 못하고 어찌 미래를 논하겠는가!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을 최대한 동원해 놈을 잡아라!”
용천광이 이를 갈며 말했다.
“천황, 진정하십시오! 놈의 실력이 그동안 알고 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습니다. 수귀가 영침을 쓰고도 압도당했습니다. 당장에 놈과 부딪치려면 우리도 전력을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헌원이 있는 이상 아직은 무리입니다!”
구공이 간절한 목소리로 용천광을 말렸다.
“그럼 그대는 이대로 우리 형제들의 원한을 묻어 두자는 이야기인가!”
“아닙니다! 결코 놈을 가만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열쇠를 찾는 일입니다. 이미 헌원이 알아차린 이상 그들도 열쇠를 주시할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유물을 얻는 자가 세상의 지배자가 될 것임은 천황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복수는 그 후에, 헌원 놈들과 함께 쓸어버려도 됩니다. 수천 년을 인내해 온 우리가 아닙니까! 기껏해야 일 년을 더 참지 못해 대계를 그르친다면 어찌 조상들께 얼굴을 들 수 있겠습니까!”
절절한 구공의 충언에 용천광이 들끓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후…….”
사라지지 않는 분노를 이를 악물며 억누른 용천광이 길게 숨을 토해 냈다.
“좋다. 그렇다면 구공, 그대의 의견을 말해 보라.”
“이번 군산의 일에 헌원의 졸개들이 개입한 것이 확인되었고, 흑의인이 신농의 수호자와 함께하고 있음도 확인했습니다. 이제 팔신도 네 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열쇠를 찾다가 만일 흑의인이나 헌원 일족을 만난다면 당해 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 어쩌자는 말인가?”
아직 화가 가시지 않은 용천광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로들을 열쇠를 찾는 임무에 투입하십시오!”
용천광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장로라 함은 전대의 팔신을 일컫는 말이었다.
현재 여덟 중 여섯이 살아 있다.
그들의 실력이라면 헌원 놈들과 흑의인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은, 그들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섯 모두 용천광보다 한 세대 위의 인물들.
용천광의 아버지가 직접 키운 이들로, 용천광이 천황에 오르면서 모두 자리에서 물러난 상태였다.
그들이 천황의 권위를 함부로 흔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실력도 용천광에 크게 뒤지지 않는 자들이어서 자칫 여우를 잡으려고 호랑이를 풀어 주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구공은 그런 용천광의 고민을 읽었다.
“천황! 마음을 대범하게 가지십시오! 어차피 그들은 천황의 신하들입니다. 그들의 충정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이미 소공자께서 유일한 후계자임을 천명한 상태입니다. 감히 누구도 천황께 반기를 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 치우에겐 배덕(背德)이란 존재하지 않는 단어임을 천황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용천광은 자신이 잠시나마 어리석은 생각을 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로지 복수를 위해 그 업을 짊어지고 수천 년을 함께해 온 일족들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였고, 다시 세상 위에 우뚝 설 날만을 기다리는 가엾은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을 수장인 자신이 의심하다니, 부끄러운 일이었다.
“난 그들을 믿는다! 나를 위해 싸우지 말고, 일족을 위해 일어서리라 믿는다! 좋다! 구공, 장로들에게 내 뜻을 전하고 열쇠를 찾는 임무를 맡기거라!”
“천황의 영명하신 결정에 황송할 따름입니다!”
구공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오체투지했다.

* * *

천룡은 맹에 도착하고도 사흘이 넘도록 전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맹까지 오는 동안 몸 상태는 더욱 악화된 상황이었다.
무림맹 최고의 의원들이 온갖 약재와 의술을 사용해 천룡을 치유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맹에서는 맹주의 이름으로 천룡의 희생을 칭송하고 포상을 내렸다.
철혈문에는 상당한 지원이 이루어졌으며, 맹이 내린 현판이 수여되었다.
천의단의 모든 무인들도 천룡에 대해 경의를 표했고, 그의 회복을 빌었다.
서문유란은 식음을 전폐한 채 사흘 내내 천룡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서문 소저, 제가 있을 테니 좀 쉬시지요.”
일과를 끝내고 바로 의당으로 찾아온 천성이 안쓰러운 얼굴로 서문유란에게 말했다.
“그럴 순 없어요. 내가 없을 때 눈을 뜨면 안 되잖아요. 분명 제일 먼저 나를 찾을 텐데. 그때 옆에 있어 줘야 해요.”
서문유란이 아련한 눈빛으로 천룡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정 그러시면, 옆에서 잠시라도 눈을 붙이십시오. 이러다가 형님보다 서문 소저가 먼저 쓰러지겠습니다.”
하지만 서문유란은 요지부동이었다.
“서문 소저의 잘못이 아닙니다. 형님은 원래 그런 사람임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는…….”
천성의 말에 감정이 북받쳐 오른 서문유란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 갑자기 의당 바깥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천룡은 어디에 있는가!”
“이, 이쪽입니다.”
의원과 함께 입구로 들어오는 두 노인의 모습에 천성의 얼굴이 환해졌다.
“노신선님!”
그들은 바로 도연과 무지였다.
철혈문을 출발한 후 이제야 천룡을 찾은 것이다.
치우 일족의 흔적을 찾는다고 시간을 허비한 것이 이토록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을 만들 줄은 그들도 결코 예상치 못했다.
“그대는?”
두 사람은 열 살 때 한 번 본 게 전부였기에 천성을 곧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철혈문의 궁천성이 인사드립니다. 천룡 형님의 사촌 동생입니다. 형님을 소화산으로 데려가실 때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천성이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얼른 인사를 드렸다.
“아! 그때 그 심장의 기혈이 막혀 있던 소년이구만! 허허, 어느새 이렇게 든든하게 자라다니, 참으로 놀랍구만.”
무지가 천성을 기억해 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천룡의 상태부터 보세!”
도연이 다급히 천룡의 침상으로 향했다.
갑자기 나타난 두 노인을 반기는 천성의 모습에 서문유란은 영문을 모르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천성이 얼른 서문유란에게 두 노인을 소개했다.
“아! 이분들이 바로 삼선 어르신들입니다. 형님의 스승님이 되시지요!”
“아……!”
서문유란이 탄성을 터뜨렸다.
반선이라 알려진 삼선이라면 천룡을 살려 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서문세가의 서문유란이라 합니다.”
서문유란이 공손히 두 선인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에게는 현재 그들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형님의 정인이십니다.”
천성이 서문유란을 소개했다.
“오! 그래, 마음고생이 심했겠구만. 이제 우리가 왔으니 걱정 말게 반드시 살릴 것이네!”
무지가 서문유란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 주었다.
“흐음…….”
그사이, 천룡의 상태를 살피던 도연이 침음성을 내뱉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인가?”
무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이 미친놈이 대체 왜 역혈대법을 쓴 것이야! 이놈의 공력이라면 화경 고수의 공격이라 해도 몇 번은 견딜 수 있을 것인데, 왜 무리해서 역혈 대법을…….”
도연이 알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말에 서문유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역혈대법을 쓰다니! 그것은 그야말로 최후의 수단이 아닌가! 그렇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겐가?”
불안한 표정으로 무지가 물었다.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천운이야! 못난 놈!”
얼마나 화가 났는지 평소답지 않은 도연의 모습에 무지도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서문유란과 천성의 얼굴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유일한 희망이던 삼선마저 방법이 없다면, 천룡을 구할 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정녕 방법이 없는 겐가?”
“휴…….”
잠시 한숨을 내뱉은 도연이 천룡을 바라보았다.
“일단, 목숨은 살릴 수 있네.”
천룡이 살 수 있다는 말에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무공은 찾기 어려울 것이네!”
하나 이어진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무인에게 무공이 없다면 죽은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삼단전이 모두 부서졌고, 기혈이 다 파괴된 상태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는데, 원래의 실력을 찾으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갓난아기 때 벌모세수를 받고 온갖 영약을 먹고도 근 이십 년에 걸려 도달한 경지였다.
하지만 이제 단전부터 새로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천룡이 천고의 기재라 해도 전의 무공을 찾으려면 최소 수십 년은 걸릴 것이 분명했다.
다시 개정대법을 펼치고 영약을 쏟아붓는다 해도 그 시간은 크게 단축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영약에 내성이 생긴 몸이고, 완전히 성장해 버린 육신은 무공을 쌓기에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오행신침이라도 체내에 남아 있다면 어찌 해 볼 수 있었겠으나…….”
역혈대법을 시전하면서 오행신침마저 녹아 버렸다.
삼선의 상실감은 너무도 컸다.
천룡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은 그들이 아닌가.
그 모든 것은 머지않아 다가올 겁난에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혈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사라졌다.
세상은 피에 잠기게 될 것이며, 어둠이 이 땅을 지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