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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4(22화)
6장 흑협(黑俠)(3)


“휴, 한발만 더 빨리 움직였어도…….”
그들 역시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아 천룡을 도우려 하산한 참이었다.
“도연아, 도연아…… 아직 멀었구나!”
도연이 스스로를 자책했다.
“살아 있기만 하면 족합니다! 형님이라면 기적을 만들어 낼 겁니다! 노신선님들이 직접 키우신 제자가 아닙니까! 아마도 형님이라면 어르신들의 호통이 무서워서라도 반드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실 것입니다!”
천성이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허허, 그래그래. 네 말이 맞다! 이 늙은이들이 못난 꼴을 보였구나.”
무지가 주름 가득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나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니, 너희도 너무 걱정 말거라. 일단 천룡의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소화산으로 데려가 치료할 것이다. 무슨 수를 쓰든 원래대로 반드시 돌려놓으마!”
도연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희망이 어렸다.

놀랍게도 도연이 치료를 시작한 지 하루 만에 천룡은 정신을 차렸다.
무려 세 시진 동안 침술을 펼친 결과였다.
의당의 모든 의원들이 도연의 신묘한 의술에 혀를 내둘렀다.
다시 사흘이 지난 후, 천룡은 삼선과 함께 마차에 실려 소화산으로 향했다.

* * *

서녕에서도 가장 이름난 주루인 이화루.
이곳은 음식과 술로도 유명했으나, 그보다는 삼층에 위치한 고급 도박장으로 인해 손님이 항상 들끓는 곳이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한 사람의 손님도 문을 드나드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주루 주변을 오십이 넘는 무사들이 둘러싼 채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화루 이층 정중앙에 위치한 탁자에 두 사람의 중년인이 마주 앉아 있었다.
사십여 개의 탁자 중 손님이 있는 곳은 오직 그곳뿐이었다.
“오랜만이오, 마뇌(魔腦).”
“반갑소이다, 신산(神算).”
두 중년인이 무미건조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바로 구천마련의 제일군사 마뇌 사마굉과 무림맹의 군사 제갈휘였다.
이미 약속한 대로 운현의 사건에 대한 처리를 논하기 위해 두 사람이 서녕에서 만난 것이다.
“련주님의 노여움이 매우 크시오. 우리는 싸울 의사가 없었음에도 정파 쪽에서 먼저 선제공격을 했고, 우리 측 무사들이 목숨을 잃었소. 그중에는 부군사 종리벽도 있소.”
차가운 목소리로 사마굉이 먼저 말했다.
제갈휘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그 일에 대한 상황은 제삼세력의 음모로 인한 것임을 양측 모두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해서 오늘 쓸데없는 충돌을 피할 방법을 찾고자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한데 사마굉이 이제 와서 또 책임 공방을 벌이려 드는 것은 협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빤한 수작질인 것이다.
“먼저 영역을 침범한 것은 그대들이오. 게다가 우리 측 사상자도 적지 않소.”
제갈휘가 조금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호북 땅이 그대들의 것이라도 된다는 이야기요? 난 당최 그런 어이없는 소리는 처음 들어 보는구려.”
사마굉이 짐짓 성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휴…….”
제갈휘가 길게 호흡을 내쉰 후 사마굉을 똑바로 바라봤다.
“마뇌, 그대와 내가 만난 자리요. 이런 의미 없는 논쟁은 아까운 시간만 축낼 뿐임을 그대나 나나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소? 그대도 지금 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이미 꿰고 있을 것이오. 이제 장난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하하하하! 잠시 농 좀 한 걸 가지고 뭘 그리 정색을 하시오? 오랜만에 만났으니, 이 정도 재미는 있어야 할 것 아니오?”
마뇌의 표정이 어느새 부드럽게 변했다.
‘이런 여우 같은 놈!’
제갈휘는 속으로 욕을 토해 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며 나가고 싶었으나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어느 정도면 물러서겠소?”
제갈휘가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흥! 급하긴 급한가 보구나!’
사마굉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무림맹이 급할수록 마련에서 얻어 낼 것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흐음…….”
사마굉은 일부러 생각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대도 아시다시피, 마련의 아홉 가문이 련주를 견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확실히 납득할 만한 패를 보여 주지 못한다면 나머지 팔천의 수장들을 설득하기 어렵소. 그래서 우리 측에서 원하는 것은 맹주 명의의 사과와 서녕에 구천마련의 지부를 세우는 것이오!”
제갈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것은 매우 무리한 요구였다.
일단 정파인들의 정점에 위치한 맹주가 마인들에게 사과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모든 강호인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거기다 마련이 서녕에 지부를 세운다면 뒤통수를 적에게 맡긴 꼴이 되어 버리는 곤륜파가 가만 있을 리 없었다.
“지금 그대는 협상을 하자는 거요, 전쟁을 하자는 거요? 그런 요구를 우리가 받아들을 수 있으리라 보는 거요?”
제갈휘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어차피 급한 건 그대들이 아니오? 사혈맹도 상대해야 하는데, 그대들이 전쟁을 할 능력이 되겠소? 우리야 슬슬 건드리면서 얻을 것만 얻으면 그만 아니겠소? 막말로 마음먹고 곤륜파를 친다면 그대들이 막아 낼 여력이 있겠소?”
동정수로채와의 분란을 마치 사혈맹과의 문제인 양 이야기하는 사마굉이었다.
하지만 딱히 반박할 수도 없는 것이, 만일 마련이 곤륜파를 친다면 그 틈을 노려 사혈맹이 동정수로채의 복수를 운운하며 세력을 확장하려 들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현재 변수는 사혈맹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대의 말도 일리는 있소. 하지만 그대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구려.”
무슨 소리냐는 듯 사마굉이 제갈휘를 빤히 쳐다봤다.
“복희의 유물 말이오.”
“흐음…….”
사마굉도 이화루에 도착하기 직전 서녕에 위치한 비밀 분타로부터 보고를 받은 터라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있엇다.
이번 동정수로채와 무림맹의 격돌을 통해 제삼세력이 복희의 유물을 찾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강호가 점점 술렁이고 있었다.
아마도 사혈맹도 그에 대한 정보를 이미 접했을 것이다.
“어차피 이번 사건은 동정수로채의 명백한 도발이었소. 사혈맹주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오. 명분도 없는 무리한 세력 확장에 힘을 쓰는 것보다는 유물을 찾는 데 힘을 기울일 것이오. 그대도 알다시피 유물이 소문의 반만큼의 가치만 있어도 강호의 판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하지 않소?”
사실 사마굉도 그에 대한 보고를 받고 상당히 고민을 한 터였다.
“하나 정체불명의 흑의인의 말만 듣고 움직이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니오? 유물이 존재한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지 않소?”
“올초에 일어난 천률음보 탈취 사건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요? 천률음보가 진품임을 위덕선생이 직접 확인했소. 게다가 유가장을 습격했던 자들과 수룡왕이 사용하는 수법이 비슷한 것임을 확인했소. 천률음보가 존재한다면 유물도 존재할 확률이 높지요.”
천률음보를 훔친 자들과 수룡왕이 같은 세력이라는 이야기는 사마굉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전서로 전해 받은 소식인지라 상세한 내용을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갈휘의 말처럼 유물이 존재할 확률이 높았다.
구천마련도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좋소. 그렇다면 내가 조건을 제시하리다. 우리 측 제안은 이렇소. 정마대전 때 우리 측에 사로잡힌 세 명의 장로와 서른 명의 포로들을 풀어주겠소.”
의외라는 듯 사마굉이 제갈휘를 바라보았다.
“세 장로가 살아 있다는 말이오?”
마지막 결전에서 정파 고수들에게 사로잡혀 죽은 줄 알았던 세 명의 장로가 살아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놀라운 소식이었다.
당시 상당한 상처도 입은 터라 당연히 죽었으리라 여긴 것이다.
“그렇소. 우리는 함부로 사람의 목숨을 취하는 이들이 아니오. 그때 그들을 사로잡아 상처를 치료하고 목숨을 살려 냈소. 그들은 현재 모처에서 잘 지내고 있는 중이오.”
‘흥! 이런 때를 대비해 살려 둔 것이겠지!’
사마굉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정파인들이 과연 목숨을 소중히 여겨 세 장로를 살려 두었을까.
아마도 이용가치가 있지 않았다면 이미 그들은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이는 처음부터 노회한 제갈휘의 계산된 술책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사마굉은 장고에 빠졌다.
생각해 보면 제법 괜찮은 조건이었다.
서른 명의 포로야 최근 크고 작은 분쟁을 통해 잡은 이들일 테니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물론, 여덟 천주를 달래기엔 그들도 괜찮은 미끼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장로들은 달랐다.
세 명의 장로는 마련이 갈라지기 전 신교로 통일되어 있을 때 활동하던 인물들로, 수많은 마인들이 그들을 따랐으며 지금의 수뇌부 중 상당수도 그들의 추종자다.
만일 장로들이 돌아온다면 많은 마인들이 반길 것이 분명했다.
패배의 상징과도 같은 그들이 풀려난다는 것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정파에게 눌려 왔던 구천마련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의미 있는 일인 것이다.
역으로 무림맹의 입장에서는 마련에게 무릎을 꿇었다 비난받을 수도 있는 제안이었다.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사마굉이 못내 의심스러운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단, 운현에 대한 공식 사과나 실수를 인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또 한 가지. 이미 그대들도 알겠지만, 유물을 찾는 세력과 운현의 사건을 일으킨 자들은 같은 자들이오. 하니 마련 쪽에서도 제삼세력을 전 무림의 공적으로 천명해 주시오.”
제갈휘의 말에 사마굉이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그것이 전부라면 크게 무리 없는 조건이다.
양측 모두에게 불만이 없는 적절한 제안인 것이다.
오히려 마련 측을 상당히 배려한 측면이 강했다.
“오래 고민해 봤자 소용없을 것이오. 본 맹에서는 이 정도가 제시할 수 있는 최대치라는 것을 그대도 알 것이오.”
어차피 처음 제안했던 맹주의 사과와 서녕 지부의 건설은 무림맹에서 받아들이기 불가능한 조검임을 사마굉도 알고 있었다.
다만, 줄다리기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어 내기 위한 흔들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어차피 물질적 보상은 큰 의미도 없었다.
그보다는 마인들에게 지지를 받을 만한 명분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세 명의 장로라면 충분하고도 넘치는 지지를 얻어 낼 수 있었다.
“좋소! 그 정도면 괜찮구려. 련주께서도 만족하시리라 믿소!”
사마굉이 어느새 미소를 지우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만족할 만한 협상 결과를 얻었으니 더 이상 서로 밀고 당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