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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4(23화)
6장 흑협(黑俠)(4)


“내가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이 일을 빨리 처리하려는 데는 더 중요한 안건이 있기 때문이오.”
자세를 고쳐 잡은 제갈휘가 진중한 표정으로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까 이야기한 복희의 유물에 관한 것이오?”
다 끝났다 여겼는데 제갈휘가 새로운 안건에 대해 이야기하자 사마굉도 다시 표정을 굳히고 자리에 앉았다.
“그도 그렇고, 제삼세력에 대한 대처 방안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서요.”
구천마련에게도 제삼세력의 움직임과 그에 대한 대처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놈들이 신교의 신물인 성화령을 훔쳐갔기 때문이다.
성화령은 교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다.
교가 아홉 개로 갈라진 지금, 성화령은 련주의 상징이자 정통성을 증명하는 징표였다.
성화령이 없으면 그것을 핑계로 여덟 가문이 언제 반기를 들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운현의 사건도 결국 그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소공자가 직접 성화령을 찾으러 나섰다가 놈들의 흉계에 빠진 것이 사건의 전말이었다.
“일단, 놈들은 스스로를 치우 일족이라 부르고 있소.”
“치우라면…… 황제와 싸웠던?”
“그런 것 같소. 아마도 그 후손들이거나 치우를 신으로 모시는 자들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오.”
“그들이 사용하는 수법에 대한 정보는 없소?”
이미 마련도 성화궁이 화웅과 풍마의 습격을 받으며 그들의 괴이한 술법에 당한 경험이 있었다.
“무공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것밖에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소.”
그렇다면 마련이 알고 있는 것에 비해 크게 나을 것이 없었다.
“놈들이 복희의 유물을 찾으려는 목적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오?”
“그야 빤한 것 아니겠소? 힘을 원하는 이유는 지배하기 위해서지요. 강호 제패, 혹은 세상을 뒤엎길 원하지 않겠소?”
당연한 이야기였다.
고생해서 얻은 힘을 사용하지 않고 고이 모셔 둘 리가 없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이든 결국 그대들이나 우리와 부딪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오.”
사마굉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일단 공적으로 선언을 하는 것은 동의하겠소.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들의 움직임이 미미한 상태라 연합해서 토벌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시기상조인 터. 결국 각자 놈들을 상대해야 할 것이오. 한데 무슨 협의가 더 필요하단 말이오?”
순간, 제갈휘가 눈을 빛내며 은밀하게 말했다.
“표면적인 연합은 불가능하지만 정보의 공유는 가능하지요. 두 세력의 정보대 간의 협력을 제안하는 바이오.”
순간, 사마굉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 제갈휘는 마련의 밀영단과 무림맹의 비첩대 간의 협력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잘못하면 그간 심어 둔 서로의 간자나 비선들이 드러날 수도 있는 위험한 거래였다.
하지만 그 효과가 상당할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서로의 비선이 연결되어 협력한다면, 제삼세력이 나타났을 때 빠르게 공동 대응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유물을 찾는 데도 훨씬 수월할 것이다.
“흐음…….”
미간을 찡그린 채 한참을 고민하던 사마굉이 제갈휘를 바라보았다.
“좋소! 단, 유물의 발견에도 함께 협력한다는 조건이라면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이번엔 제갈휘가 잠시 고민했다.
유물에 대한 정보까지 공유한다는 것은 결국 유물을 누가 찾든 홀로 독차지할 수 없다는 말과 같았다.
그렇다고 마인들과 그런 강력한 힘을 나눈다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좋소! 유물의 발견도 협력은 하도록 하지요. 그러나 마지막 유물의 처리에 대한 문제는 그때 다시 결정하도록 합시다.”
여지를 남긴 것이다.
이것은 사마굉도 원하는 바였다.
“동의하오! 이대로 문서를 작성합시다!”
두 사람은 지필묵으로 번갈아 가며 내용을 적은 후 구천마련과 무림맹의 인장을 찍어 밀봉해 한 부씩 나눠 가졌다.
“그럼 갈 길이 머니 먼저 일어나겠소.”
제갈휘가 이화루를 떠나고 잠시 후, 사마굉도 무사들을 이끌고 신강으로 돌아갔다.

* * *

온 강호가 술렁거리고 있었다.
바로 복희의 유물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다.
너도나도 유물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열쇠가 없으면 비동을 열 수 없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그저 유물을 구경이라도 해 볼 요량으로 사방을 들쑤시고 다녔다.
개중에는 본격적으로 열쇠를 찾아나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천률음보가 없는 한 열쇠의 위치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심산계곡을 헤매거나 옛 문헌을 뒤져 가며 열쇠에 대한 단서를 모으고 추적했다.
하지만 정작 대문파와 큰 세력들은 막무가내식으로 열쇠를 찾기보단 치우 일족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들이 나타날 때를 대비해 정보망을 최대한 가동시켜 수상한 동향을 잡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복희의 유물과 함께 강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거리는 바로 흑협에 대한 것이었다.
유물에 대해 밝힌 사람도 바로 그였고, 운현과 대연문, 동정호에서 위기에 빠진 이들을 구해 낸데다 압도적인 신위를 보여준 것이 강호인들을 열광시킨 것이다.
하늘을 날고, 수백 개의 검을 날리고,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움직이는…… 그야말로 이야기 속에나 존재할 듯한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영웅을 바란다.
천룡이 짧은 시간 안에 후기지수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정호의 일전에서 천룡은 큰 부상을 입었고, 재기한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이었다.
군중들의 동경의 대상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빈 자리를 메꾼 것이 흑협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점도 오히려 신비감이 있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를 틈타 마치 흑협에 대해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있는듯 떠들어대는 자들이 생겨났고, 그것은 곧 소문을 점점 부풀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흑협이 사실은 반로환동한 전대 고수라는 둥, 하늘의 천신이 세상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내려온 것이라는 둥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양산되었다.
결국 그로 인해 흑협의 실체는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천의단 내에서도 흑협에 대한 관심은 상당했다.
“흑협, 너무 대단한 것 같지 않니? 너도 그때 그 사람이 하늘을 휙휙 날아다니는 거 봤지? 와! 그 물줄기가 쩌억 하고 갈라지더니, 그냥 수룡왕 이빨이 우수수 떨어지는 거 봤지? 봤지? 응?”
모용혜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천성에게 말했다.
“오, 그야말로 이 시대의 영웅이라 할 수 있지요! 흑협이 아니었으면 아버님과 식구들도 치우 놈들에게 모두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감석보가 맞장구를 치며 끼어들었다.
사실 어찌 보면 대연문의 참사는 흑협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었으나 단순한 감석보는 그런 것은 잊은 지 오래였다.
가만 생각해 보면 운현의 일도 그렇고, 이번 동정호의 일도 그렇고, 모두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나타나 구해 주었던 것이다.
거기다 치우 일족이 대연문을 친 이유도 흑협을 잡기 위해서가 아닌가.
모든 정황상 흑협은 분명 대연문과 관계가 있었고, 감석보를 돕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감석보는 오히려 흑협과 자신의 가문이 연관이 있음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그와 달리 천성은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관심에 무척 곤혹스러웠다.
자신의 존재가 너무 부각되는 것은 도움이 될 게 없었다.
일단 수많은 세력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고, 적의를 품고 노리는 이들도 많아질 것이다.
당연히 더욱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고, 행동 하나하나에 전보다 몇 배 더 신경을 써야 했다.
‘만일 내가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지금보다 배는 더 귀찮아졌을 것이다.
처음으로 정체를 숨긴 것이 잘한 결정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천성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 모용혜가 어깨를 툭, 쳤다.
“호호호. 성아, 너무 상심하지 마. 너도 열심히 노력하면 흑협 못지않은 영웅이 될 수 있을 거야. 다음 생애에는! 호호호호호호!”
모용혜가 썰렁한 농을 내뱉고는 혼자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
“하하하하하하! 모용 소저는 참으로 재치가 넘치시는군요!”
반응이 늦은 감석보가 한참 뒤에야 뒷북을 쳤다.
어찌 됐든 이번 일로 인해 치우 놈들 역시 행동에 상당한 제약을 받을 것이라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아, 그리고 제가 내년 삼월 초닷새 날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식은 선검문에서 열릴 예정이니 꼭 참석해 주십시오. 천성 아우도 꼭 오게.”
감석보가 드디어 식을 올리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대연문에는 아직 참사의 여파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선검문에서 식을 치르기로 한 듯했다.
‘가만, 선검문이라면 섬서에 위치해 있으니 열쇠가 위치한 감숙과 가깝군!’
복희가 알려 준 나머지 열쇠의 위치는 각각 산동 태산(泰山), 신강 화염산(火焰山), 감숙 맥적산(麥積山)이었다.
선검문이 위치한 섬서 부현에서 맥적산까지는 천성에게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그렇구나! 가는 김에 열쇠를 찾으면 되겠다.]
치우 놈들이 나머지 세 곳 중 어디에 위치한 열쇠를 먼저 찾을지 모르지만, 천성이 한 군데라도 열쇠를 확보하게 되면 놈들은 비동의 문을 열 수 없었다.
신강은 너무 거리가 있어 하룻밤 사이에 움직이기가 버거웠기에 일단 제외하기로 했고, 감숙도 혹시라도 치우 놈들과 부딪치게 되었을 경우를 생각하면 만만치 않은 거리여서 일단 산동을 먼저 가기로 결정한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천의단이란 단체에 소속되다 보니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천의단을 그만두기도 곤란했다.
그래도 무림맹에 있음으로 해서 강호 정세에 관한 정보를 다른 이들보다 손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무림맹에게도 제일의 경계 대상이 된 치우 일족의 움직임을 알기 위해서라도 현재는 천의단에 머무르는 편이 나았다.
‘기회를 봐서 산동의 열쇠를 확보한 후 감 공자의 혼례에 참석해 감숙의 열쇠를 확보하면 되겠군.’

* * *

“어르신, 진교와 자공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적발, 적염의 중년인이 무명옷을 입은 초라한 몰골의 노인 앞에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래? 어찌 되었노?”
“역시 치우 놈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놈들과 맞부딪쳤다 합니다.”
“허허, 그래. 그리 쉽게 사라질 종자들이 아니지. 우리와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적자가 살아남았음을 슬퍼해야 하나, 기뻐해야 하나……. 어찌 보면 흥미로운 일이군. 말년에 심심하진 않겠어. 허허허.”
노인이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열쇠를 찾고 있겠지?”
“네.”
“하면 지금부터는 각 지역의 선인들을 총동원하여 놈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게.”
치우가 쉽게 유물을 차지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 흑의인은 어찌 되었나?”
노인이 문득 생각난 듯 중년인에게 물었다.
“그자가 신농 일족과 함께 있었다 합니다. 아무래도 사조와 관계된 자가 아닐까요? 그자의 능력이 실로 놀랍습니다. 치우의 팔신 중 세 명을 상대하고도 압도했다 합니다. 자공과 진교조차 도무지 상대할 엄두가 안 날 정도라 했습니다.”
“허허, 신농과 함께했다?”
노인이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일단 자공과 진교는 그자의 정체를 밝히는 데 집중하라 이르고, 치우 놈들을 상대하는 것은 다른 선인들에게 맡기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중년인이 정자를 떠난 후 노인은 북서쪽 하늘을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