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영웅재천 4(24화)
6장 흑협(黑俠)(5)


천룡이 소화산으로 떠난 후, 서문유란은 쓸쓸한 표정으로 가끔 허공을 응시하곤 했다.
천성과 모용혜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 가끔 찾아가 위로를 해 주곤 했다.
오늘도 두 사람은 숙소에 틀어박혀 있던 서문유란을 억지로 데리고 나와 취선루로 향했다.
“유란 언니, 청승 좀 그만 떨고 이제 기운 좀 차리라구. 다른 사람도 아닌 삼선이라고, 삼선! 삼선께서 장담하신 일이니 걱정할 것 없어. 천룡 오라버니는 분명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올 거야!”
모용혜의 말에 서문유란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서문유란의 표정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모용혜가 한 번 헛기침을 하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흠흠, 내가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 줄까?”
모용혜가 천성에게 눈치를 주며 말했다.
“어? 어! 그래, 그거 좋겠다!”
천성이 얼른 장단을 맞추었다.
“옛날에 아기 독사하고 엄마 독사가 있었거든? 근데, 아기 독사가 사춘기가 왔는지 정체성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 거야! 호호호호! 생각만 해도 너무 웃겨!”
천성은 식은땀을 흘리며 모용혜가 얼마나 썰렁한 이야기를 할까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그래서 하루는 아기 독사가 엄마 독사에게 슬픈 눈빛을 하고는 물은 거야!”
모용혜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듯 처량해졌다.
“‘엄마, 나 독사 맞아?’ 아기 독사의 갑작스런 물음에 엄마 독사가 인자한 목소리로 대답했어. ‘그럼, 맞구 말구’. 하지만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는지 아기 독사가 이번엔 눈물까지 흘려가며 다시 한 번 물었어. ‘엄마, 나 정말 독사 맞아?’. 엄마 독사는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아기 독사에게 친절하게 답해 주었어. ‘그럼 우리 이쁜이. 독사 맞구 말구’. 그러자 아기 독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어!”
모용헤가 침을 꿀꺽 삼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엄마, 나 혀 깨물었어. 아아앙! 호호호호호호!”
천성은 이미 포기했던 터라 그러려니 하며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서문유란 또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흥! 뭐야? 반응들이 왜 이래? 이거, 우리 모용세가에서는 다들 자지러졌던 이야긴데!”
“어린 너의 마음에 차마 상처를 줄 수 없던 거겠지…….”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천성이 말했다.
하지만 무인인 모용혜가 그것을 못 들을 리가 없었다.
“너!”
모용혜가 발끈 해서 눈꼬리를 치켜올렸고, 천성이 슬쩍 고개를 돌려 피했다.
“그래도 너희라도 이렇게 계속 잘 지내는 것을 보니 좋다.”
엷은 미소를 머금은 서문유란의 말에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서문유란과 천룡은 아직 두 사람이 연인 사이인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무, 무슨. 잘 지내긴!”
“아니, 오해를 하시는데, 그런 게 아니고…….”
“휴, 싸우지 말고 잘 지내. 있을 때 잘해. 아니면 후회하니까. 나도 그간 조금만 더 잘해 줄 걸 하는 후회가 매일 들어…….”
아련한 표정으로 힘없이 말하는 서문유란의 모습에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서문유란을 숙소에 바래다 준 후 두 사람은 일조가 머무는 숙소로 향했다.
“있을 때 잘해라, 성아. 후훗!”
“반사!”
“흥!”
“흥!”
콧바람을 날린 두 사람은 각자의 숙소로 헤어졌다.
7장 열쇠 쟁탈전
신강 토로번.
한나라 때부터 하나둘씩 만들어진 지하 수로로 인해 사막임에도 물이 풍부한 곳.
사막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회색 눈동자의 중년인 둘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그들의 손에는 나침반과 같은 모양의 둥근 원반이 들려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 위치한 바늘이 사막 쪽을 가리키며 잘게 떨리고 있었다.
“흠, 영침반(靈針盤)이 흔들리는 것이 만만치 않아.”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중년인의 귀밑머리는 특이하게도 하얗게 새어 있었다.
“양소,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이쪽으로 가면 화염산밖에 없는데…….”
고슴도치 같은 수염에 뚱뚱한 체구의 중년인이 눈을 가늘게 뜬채 영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노려봤다.
이미 어둠이 내린 사막은 가끔 한 번씩 불어 모래를 날리는 바람 외에는 고요한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군. 화염산이라…….”
화염산은 그 뜨거운 열기 때문에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곳.
서유기 중 파초선과 우마왕이 나오는 장면에 등장하는 타오르는 산의 무대가 되었을 정도로 엄청난 온도를 자랑하는 곳이다.
한여름에는 사람조차 함부로 다닐 수 없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어쨌든 따라가 봐야겠지.”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양소라 불린 중년인과 뚱뚱한 중년인이 긴 잔상을 남기며 사막으로 사라졌다.

화염산 기슭에 백발을 휘날리는 두 노인이 서 있었다.
두 노인은 특이하게 짐승의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각각 토끼와 여우의 가면이었다.
“이곳이 맞는 겐가?”
쇳소리가 나는 듯 거친 음성을 가진, 여우 가면을 쓴 노인이 물었다.
“구공이 말한 대로라면 이곳이 맞겠지.”
토끼 가면의 노인이 이곳저곳을 살피며 대답했다.
“진이 어딘가에 설치되어 있을 텐데…….”
“기다려 보게. 내가 한 번 살펴보지.”
우우우우웅!
순간, 여우 가면을 쓴 노인의 몸에서 기이한 울림이 생겨나 온 산으로 퍼져 나갔다.
여우가면노인은 눈을 감고 가만히 서서 울림이 부딪쳐 반사되는 것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일각 즈음 지난 후에야 움직일 것 같지 않던 그의 눈이 열리며 빛이 터져 나왔다.
“저곳이군!”
여우가면노인이 가리킨 곳은 산 중턱의 평범한 곳이었다.
그저 흙과 바위들만 보일 뿐, 특별히 다른 점이 눈에 띄지 않았다.
“가세!”
하지만 토끼가면노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곳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확인했던 장소에 도착한 여우가면노인이 등에 멨던 긴 봇짐을 풀어 한 자루 비파를 꺼냈다.
“우린 치우 일족의 장로 묘군(卯君)과 호군(狐君)이다. 쓸데없이 버티지 말고 그냥 열쇠를 내놓거라. 그럼 네놈의 목숨만은 살려 주마.”
하지만 그들이 서 있는 앞쪽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쯧쯧, 어리석은지고!”
혀를 찬 여우가면노인, 호군이 비파를 들고 손가락으로 현을 튕기기 시작했다.
디잉!
마치 음의 높이를 가늠하는 듯 천천히 줄을 튕기자,
쿠르르르릉!
순간, 사방이 진동하며 앞쪽에 위치한 황량한 풍경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디이잉!
파지지직!
두 번째 줄이 튕겨지자 진동이 더욱 거세지더니 마치 헝겊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오며 그들 앞에 갑자기 검은 동굴이 나타났다.
“그대들이 나를 이길 수 있다면 열쇠를 가져갈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엔 이곳에 뼈를 묻어야 할 것이다!”
동굴 안쪽에서 창노한 음성이 터져 나오더니, 흑의, 흑발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난 신농의 아들 흑룡좌 강풍도라 한다. 열쇠를 얻으려거든 덤비거라.”
일순 묘군과 호군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누구인가.
치우 일족의 장로이자 전대 팔신 중 하나였다.
혼자서 그들 둘을 상대하겠다는 용기는 참으로 가상하지만, 그 하는 짓이 가소롭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상대해 주마.”
토끼가면노인, 묘군이 한 자루 섭선을 펼치며 앞으로 나섰다.
후우우우웅!
순간, 강풍도의 머리 위로 한 마리 흑룡이 솟아오르더니, 허공을 한 바퀴 휘돌고는 백회혈(百會穴)로 빨려 들어갔다.
우우우우우웅!
그와 함께 묘군 주위의 공기가 요동쳤다.
강풍도가 먼저 영력을 터뜨렸다.
쿠르르르르릉!
동시에 대지가 갈라지며 바위와 흙들이 솟아올랐다.
마치 유가장에서 지인이 사용했던 수법과 비슷해 보였으나 그보다 훨씬 위력이 강했다.
수십여 개의 흙기둥이 솟아오르고, 동시에 땅이 내려앉아 끝이 보이지 않는 구멍이 생겨났다.
노인들이 서 있던 곳도 땅이 무너져 내려 금방이라도 밑으로 추락할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때, 거친 바람이 두 노인의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쿠쿠쿠쿠쿠쿠쿠!
두 노인을 감싼 바람이 점점 거세지더니, 용틀임 치며 솟구쳐 올랐다.
호군은 바람을 타고 멀찌감치 날아가 장내를 벗어난 후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봤다.
“바람의 힘을 사용하는가?”
허공에 떠 있는 묘군에게 강풍도가 물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묘군이 답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노인이 섭선을 쥔 손목을 툭, 쳐 냈다.
쇄애애애애애애액!
하지만 그 결과는 가벼운 움직임과는 달리 너무도 놀라운 것이었다.
뒤집힌 땅거죽과 바윗덩이들이 바람에 휩쓸려 강풍도에게 날아갔다.
“흥! 어림없다!”
강풍도가 지지 않고 영력을 끌어 올렸다.
구구구구구궁!
그러자 스무 개가 넘는 돌기둥들이 허공에 떠 있는 묘군을 덮쳤다.
순간, 묘군이 양손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열개의 회오리가 생겨나더니, 돌기둥들을 향해 날아갔다.
콰아아아아앙!
돌 조각과 흙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마치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난 듯 화염산 중턱은 순식간에 그 원래의 모습을 잃고 무너져 버렸다.
“하앗!”
기합성과 함께 강풍도의 눈에서 안광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지던 흙덩이와 돌 조각들이 갑자기 뭉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마치 송곳처럼 날카로운 수십 개의 돌창이 만들어져 토끼가면 노인의 사방을 포위했다.
돌창들은 창날을 곧추세운 채 섬전처럼 노인을 향해 쏘아졌다.
쉬이이익!
하지만 돌창들이 코앞에 이르렀음에도 묘군의 눈빛은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돌창들이 묘군의 온몸을 관통했다.
쉬쉬쉬쉬쉭!
아니, 관통한 듯 보였다.
하지만 돌창들이 뚫은 것은 묘군의 잔상이었다.
“이런!”
강풍도가 놀라 외치며 급히 묘군의 흔적을 찾았다.
그때, 뒷덜미로 서늘한 한기를 느낀 강풍도가 기겁을 하며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스악!
그 위로 한 자루 섭선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며 잘린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비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