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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5(4화)
1장 난전(4)


뇌옥 입구를 지키는 네 명의 경비무사는 용혜란이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감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한가하게 잡담을 나누었다.
마치 한 줄기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듯 유유히 입구를 통과한 용혜란은 뇌옥에 들어서자마자 천장으로 뛰어올라 몸을 밀착시켰다.
중력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듯 용혜란은 천천히 천장을 기어 뇌옥의 안쪽으로 움직였다.
안쪽에는 다시 네 명의 무인이 경비를 서고 있었는데, 그곳까지 도달하는 동안에도 수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수귀는 뇌옥 가장 깊은 곳에 갇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용혜란은 천천히 뇌옥들을 살피며 네 무사의 머리 위를 지나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뇌옥 가장 끝에 도달해서야 용혜란은 수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뇌옥에서도 가장 심처에 가두어져 있었는데, 쇠창살 사이로 보이는 몰골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입과 턱은 뭉개져서 그 형체를 알아보기 쉽지 않았고, 팔다리는 갈고리로 뚫린 채 쇠사슬로 벽에 연결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의 몸 이곳저곳에는 피딱지가 엉겨 붙은 채 고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치료 외에는 그대로 방치했기 때문이다.
‘이놈들!’
용혜란은 분노가 이는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킨 후 조심스럽게 옥으로 다가갔다.
분하지만 지금은 수귀의 처참한 상황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다.
수귀는 축 늘어진 채 미동도 없었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게 기적인 듯싶은 몰골이었다.
[눈을 떠요, 수귀.]
용혜란이 전음을 날리자 순간 미동도 없던 수귀의 몸에서 경련이 일었다.
[소…… 공…… 녀.]
수귀의 고개가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려지며 부어오른 눈꺼풀이 부르르 떨렸다.
[그래요, 저예요!]
용혜란은 떨려 나오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의 고통을 끝내도록 편안한 죽음을 선사하는 것!
하지만 그녀는 그것조차도 수귀에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었기에 감히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수귀는 그녀에게 큰오빠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용혜란은 그런 수귀에게 잔인한 부탁을 해야만 하는 자신이 더없이 저주스러웠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게 일족의 염원을 이루기 위한 희생이었다.
자신이 그 죄를 평생 안고 간다 해도 일족을 위해 짊어져야 할 짐인 것이다.
[용서하세요…….]
잠시 용혜란을 응시하던 수귀의 눈이 일그러졌다.
용혜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것은 미소.
아마도 용혜란의 뜻을 눈치챘음이리라.
[괘…… 앤찮…… 다, 혜…… 란아.]
용혜란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었다.
그가 이름을 불러 주었다.
열다섯 살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이름을 불러 준 적이 없던 그였다.
입술을 깨문 용혜란이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쓸데없는 감정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잘 들으세요. 독단과 만리취를 드릴 것입니다. 고통스럽더라도 좀 더 견디십시오. 어차피 맹에서는 고문 외에는 정보를 알아낼 수단이 없습니다. 결국 헌원 일족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때 만리취를 놈들에게 어떻게 해서든 묻히십시오. 이것이 마지막 임무입니다. 죽음은 그 후에만 허락하겠습니다.]
만리취는 천리향과 같은 특별한 향료였다.
다른 이들이 볼 때는 무색무취이나, 치우 일족만의 술법을 사용하면 그 향을 감지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름처럼 만 리까지는 아니어도 수십 리 안에서는 그 위치를 인식할 수 있고, 석 달 가까이 그 향이 사라지지 않는다.
수귀가 헌원 일족에게 만리취를 묻힐 수만 있다면 용혜란이 그자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반드시…… 성공…… 하마.]
붉게 충혈된 수귀의 눈이 빛났다.
용혜란은 냉정히 고개를 돌리고 황급히 뇌옥을 빠져나왔다.
더 이상 수귀를 마주한다면 참지 못하고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복면 속에 감춰진 그녀의 얼굴 위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무림맹으로 돌아온 천성은 다음 날 바로 조장인 공현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후 단장 모용단천을 찾아갔다.
“응? 자넨 천룡대주의 동생 아닌가?”
맹에서는 당분간 천룡의 자리를 비워 놓기로 했기 때문에 아직도 천룡의 직위는 유지되고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천룡의 동생이란 이유만으로도 모용단천은 일개 조원에 불과한 천성을 살갑게 대해 주었다.
“단장님게서 허락해 주신다면 형님의 상세가 어떠한지 살필 겸 소화산에 한 번 다녀오고 싶습니다.”
천성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리 천의단 모두가 천룡을 걱정하고 배려해 주고 있다 하나 맹에 소속된 무인으로 며칠씩이나 자리를 비우는 것은 쉽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 그래. 그러지 않아도 나도 일대주의 소식이 궁금하던 차였네. 자네도 걱정이 많았겠지. 어차피 마교와의 일도 잘 마무리되었고, 제삼세력의 움직임도 소강상태이니 이참에 시간 내서 다녀오도록 하게. 한 달 정도면 되겠지?”
의외로 흔쾌히 허락하는 모용단천의 모습에 천성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천성이 천의단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볼 때 자리를 비운다 해도 별다른 영향이 없을 것이다.
감석보와 모용혜가 함께 따라가겠다고 우기는 것을 간신히 떼어 놓은 천성은 간단히 여행 준비를 마친 후 곧바로 무림맹을 나섰다.
우선은 감숙의 열쇠를 확보하는 일이 가장 시급했다.
어차피 소화산은 감숙과 신강의 열쇠들을 확보한 후 들러도 시간상 여유가 있었다.

무안을 벗어난 후 바로 비행을 시작한 천성은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감숙 천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의 일 년 만에 감숙으로 돌아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유가장의 사건 이후 참으로 많은 일을 겪은 천성이었다.
어찌 보면 모든 사건이 시작된 곳이 바로 이곳 천수였다.
온 김에 철혈문에도 들러 보고 싶었으나, 당장에는 열쇠를 찾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놈들이 먼저 도착한 것은 아니겠지.’
조급한 마음에 천성은 바로 열쇠가 있는 맥적산으로 향했다.
맥적산은 절벽에 조형된 석굴들과 그 안에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조각과 벽화가 유명한 곳이다.
멀게는 북위시대부터 수, 당, 송대까지 이르는 오랜 세월 동안 조성된 석굴들은 그 유구한 세월만큼이나 장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천성은 열쇠의 위치를 찾기 위해 영안을 펼쳤다.
‘응? 이것은!’
[제법 강력한 영력의 충돌이로구나!]
맥적산 동쪽 중턱에서 상당한 영력이 느껴졌다.
아마도 치우 일족과 열쇠의 수호자가 싸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늦진 않았군요!’
급히 서두르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한발 늦게 도착했을 것이다.
내심 한숨을 돌린 천성은 영력의 파동이 느껴지는 곳으로 즉시 신형을 날렸다.



2장 장로들과의 혈전(1)


퍼어엉!
천성이 현장에 도착해 보니 용군과 온몸이 황금색으로 뒤덮인 사내가 충돌하며 연신 폭음을 흘려 내고 있었다.
아마도 황금색 사내는 열쇠를 지키는 신농 일족의 수호자일 것이다.
천성은 일단 잠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치우 일족이 사용하는 기술과 실력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수호자로 보이는 사내의 움직임은 무척 빨라서 섬응과 비교해 보아도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용군이 날리는 뇌전을 피하지 않고 몸으로 받아 내고도 큰 충격을 받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용군의 움직임 또한 속도가 만만치 않아서 서로 막상막하의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저들은 능력을 두 가지나 가지고 있군요!’
[그렇구나! 거기다 그동안 만났던 가면인들보다 영력의 세기도 훨씬 강력하구나!]
한 켠에서는 말 가면을 쓴 사내―마군―가 두 사람의 싸움을 여유 있는 자세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만큼 용군의 실력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놀랍군! 신농 일족에 이 정도 실력을 가진 자가 있을 줄이야!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용군이 잠시 신형을 멈추고 신농 일족의 수호자를 보며 말했다.
자신과 팽팽하게 맞설 정도로 강한 상대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 모양이었다.
원래 치우 일족은 힘을 숭상하고 뛰어난 전사를 숭배했다.
그중에서도 용군은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러니 그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자라면 적이라 해도 충분히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난 신농 일족 금룡좌 강찬이라 한다! 그대들이 열쇠를 얻으려면 나를 넘어서야 할 것이다.”
“후후. 좋군, 좋아. 오랜만에 밖에 나왔더니 이런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진즉에 나와 볼 것을 그랬군.”
용군이 흥에 겨운 듯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금의 기운으로 몸 주위로 감싸서 뇌전을 땅으로 흘리는군. 제법 괜찮은 방법이야. 내 공격이 무용지물이 되니까 말이지. 하지만 뇌전만이 내 전부는 아니지. 어디, 이제부터 좀더 재밌게 놀아 볼까?”
말과 함께 용군이 등 뒤로 메어 둔 거대한 참마도를 꺼내 들었다.
우우우우웅!
순식간에 도가 뇌기로 뒤덮이며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그깟 금의 기운쯤이야 직접 뚫어 버리면 되지!”
고함 소리와 함께 용군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러자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강찬이 용군의 흔적을 찾았다.
후우우웅!
순간, 강찬의 머리 위에서 갑자기 나타난 용군이 참마도를 위에서 아래로 크게 휘둘렀다.
태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막강한 압력에 강찬이 급히 금기를 끌어 올려 방어막을 형성했다.
쩌어어엉!
뇌전으로 덮인 참마도와 강찬의 금기가 충돌하며 사방으로 기파가 터져 나갔다.
“으아아아압!”
순간, 용군이 두 눈에서 안광을 뿜어 내며 온 힘을 끌어 올렸다.
그의 장포는 강력한 기운을 못 이기고 터져 나갈 듯이 부풀어 올랐고 머리카락은 하늘로 치솟았다.
파츠츠츠츠!
참마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뇌전 다발들이 금기를 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결국 이번 공격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때, 놀랍게도 참마도가 조금씩 강찬이 펼친 금기의 방어막을 뚫어 내는 게 아닌가.
치지지지직!
“우욱!”
강찬이 이를 악물고 영력을 끌어 올리자 그의 몸을 둘러싼 황금빛이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해졌다.
그와 동시에 금기의 방어막을 찢어 가던 용군의 참마도도 전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제법이구나!”
이렇게 되니 결국 힘 대 힘의 싸움이 되고 말았다.
팽팽한 힘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밀린 쪽은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었기에 둘 중 한 사람이 손을 빼기도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슈슈슈슈슉!
그때,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천성이 기탄을 쏘아 내며 전장에 뛰어들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신농의 수호자가 다칠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웬 놈이냐!”
마군이 기탄을 쳐 내며 천성의 앞을 막아섰다.
“헛!”
하지만 어느새 천성의 신형은 사라지고 없었다.
놀란 마군이 헛바람을 들이켜는 순간, 아래쪽으로부터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땅바닥에 거의 붙다시피 자세를 잔뜩 낮춘 천성이 마군의 하체를 노리고 달려든 것이다.
“이얍!”
그러나 마군 역시 치우 일족의 장로답게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았다.
쿠르르르릉!
순간적으로 마군의 발아래 있던 땅이 솟아오르며 천성의 공격은 흙기둥을 때리고 말았다.
콰아아앙!
흙기둥이 산산조각이 나 터져 나갔다.
“허!”
마군이 창백해진 얼굴로 탄성을 터뜨렸다.
슬쩍 휘두른 듯 보이는 주먹의 위력이 실로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면 저 흙기둥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했다.
슈슈슈슈슉!
그사이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천성이 수십 발의 기탄을 날렸다.
이젠 기탄의 위력도 커다란 바위를 부숴 버릴 정도로 증폭되어 있었기에 마군에게는 상당히 까다로운 공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