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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5(6화)
2장 장로들과의 혈전(3)


“어르신!”
적염적발사내의 등장에 낡은 초막의 울타리를 손수 손질하던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신강과 감숙에서 치우 일족이 출현했다는 보고가 왔습니다.”
그 말에 노인은 손을 멈추고 초막 앞 연못에 위치한 정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우선 앉지.”
적염적발의 사내가 조심스럽게 정자 위로 올라가 노인 앞에 앉았다.
“신강과 감숙이라……. 열쇠가 그곳에 있었나?”
“그렇습니다.”
“결과는?”
“실은…….”
적염적발의 사내가 잠시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신강의 선인들 중 양소가 죽고 장환은 간신히 살아 돌아왔습니다. 치우 놈들의 경지가 예사롭지 않았다 합니다. 장환의 보고에 따르면, 두 가지 영력을 구사했다 합니다.”
순간, 노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벌써 그렇게까지 영력을 복원해 낸 것인가? 정말 놀랍군! 그렇다면 선인들이 당할 만도 하지.”
지나온 세월이 길기는 했지만, 남아 있는 자료가 전무한 상태에서 영력을 재현해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노인은 치우 일족의 저력이 만만치 않음을 새삼 느꼈다.
“자신들을 소개하기를, 치우의 장로들이라 했다 합니다.”
“장로라…… 그렇다면 수뇌 급이란 이야긴데, 놈들이 열쇠와 유물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이야기로군.”
“더욱 놀라운 것은 감숙의 경우, 그토록 강한 치우의 장로 두 명을 혼자 제압하고 열쇠를 차지한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노인이 놀란 표정으로 적염적발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두 가지 영력을 사용하는 자들을 혼자 제압하다니, 실로 놀라운 자였다.
“정체는 확인했나?”
“항간에 흑협이라 칭해지고 있는 자입니다. 군산에 등장했던 흑의복면인이 바로 그자입니다!”
“그자의 실력이 그 정도였나?”
군산의 일을 보고받았을 때도 상당한 실력이라 듣긴 했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놈의 실력이 차츰 증가하고 있는 듯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실력의 향상이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무언가가 있군!”
“열쇠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 놈이 그토록 열쇠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열쇠에 저희가 알지 못하는 힘이 숨겨져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노인이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적염적발 사내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군산과 신강의 열쇠는 치우 일족이 가져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협이라는 자의 능력은 그와 관계없이 증가했다.
‘응?’
그 순간, 노인의 눈에서 신광이 일었다.
‘만일 열쇠가 하나가 아니라면!’
치우 일족이 가져간 열쇠 외에 다른 열쇠가 존재하고, 그것을 흑협이라는 자가 차지했다면 모든 것이 들어맞았다.
열쇠에 숨겨진 힘이 있고, 그 힘을 통해 흑협이라는 자의 능력이 향상되고 있다는 가정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몸을 일으켜 세운 노인에게서 사방을 압도하는 기세가 흘러나왔다.
노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염적발의 사내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당장 신강과 감숙, 군산에 선인들을 파견해서 열쇠가 보관되었던 곳을 다시 조사하도록 하라! 숨겨진 밀실이나 기관을 철저히 조사해라! 먼지 하나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존명!”
살을 엘 듯한 막강한 기세에 몸을 한 번 부르르 떤 적염적발의 사내가 노인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 급히 정원을 나섰다.

* * *

“군사님!”
뇌옥 입구를 지키던 경비무사들이 놀란 표정으로 급히 제갈휘를 향해 예를 올렸다.
그들에게는 감히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할 위치의 인물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이다.
“수룡왕에게 안내하거라.”
수룡왕을 심문하기 위해 제갈휘가 직접 움직인 것이다.
경비무사들은 즉시 수룡왕이 갇힌 옥사로 제갈휘를 안내했다.
곧 수룡왕의 참혹한 모습을 보게 된 제갈휘가 눈살을 찌푸렸다.
“문을 열고 나가 보거라.”
수룡왕에게서 얻어 낼 내용들은 어쩌면 무림의 앞날을 좌우할 수도 있는 중대한 정보들이다.
일개 경비무사들이 알 만한 내용이 아닌 것이다.
경비무사가 입구로 돌아가자 제갈휘는 옥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는 동안에도 수룡왕은 시체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 언저리가 들썩이는 것으로 보아 아직 죽지는 않은 듯했다.
“눈을 뜨거라!”
제갈휘가 나지막하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했다.
꿈틀!
그제야 수룡왕의 고개가 서서히 들렸다.
“누…… 우…… 구?”
턱과 입이 부서진 관계로 한 자, 한 자 힘겹게 내뱉었지만, 그마저도 발음을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치료를 했음에도 워낙 상처가 컸고, 남아 있는 이빨이 몇 개 되지 않아서 이제 예전처럼 제대로 말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
제갈휘는 수룡왕에게 다가가 그의 턱을 잡은 후 품 안에서 꺼낸 콩알만 한 단환을 입안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배기환(培氣丸)이다. 삼키거라. 일단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해야 나와 대화가 가능할 것 같으니.”
배기환은 말 그대로 기를 북돋아 주는 환단이었다.
영약은 아니었으나 그 효능은 제법 괜찮아서 크게 다친 환자들이나 내상을 치유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는 필수 약품이었다.
배기환을 삼킨 수룡왕의 눈에 이내 초점이 돌아왔다.
“나는 무림맹의 군사 제갈휘다.”
“크으으으…….”
일그러진 수룡왕의 입술 사이로 기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웃을 수 있는 것을 보니 아직은 살 만한 모양이로구나.”
제갈휘는 차가운 표정으로 수룡왕을 노려보았다.
“네놈이 목숨에 연연하지 않음은 이미 알고 있다. 어떤 고문이나 회유도 통하지 않겠지.”
수룡왕은 제갈휘의 말에 관심도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말이지, 나에겐 네 녀석의 입을 열 수 많은 방법이 있지. 그 방법들을 사용하면 네놈의 의지가 아무리 굳건하다 해도 모든 걸 실토하게 될 것이다.”
제갈휘가 무슨 말을 하든 수룡왕은 들은 체도 안 했다.
“내 말이 믿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 하는 말에도 네놈이 아무런 반응이 없을지 어디 볼까?”
제갈휘가 조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헌원 일족의 피를 이어받았느니라. 네 녀석들을 멸했던 바로 그분의 후손이지.”
순간, 수룡왕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네…… 노옴…… 이!”
가늘게 뜬 두 눈으로 혈광을 줄기줄기 뿜어낸 수룡왕이 처절한 음성으로 울부짖었다.
드디어 일족의 원수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분노가 솟구쳐 올라 온몸을 가득 채웠다.
당장에라도 제갈휘를 찢어 죽이고 싶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그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후후, 실컷 분노하거라. 네놈이 진정 치우의 졸개라면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네놈의 입을 얼마든지 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순간, 수룡왕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헌원 일족은 사악한 술법을 사용하여 사람의 정신을 조종할 수 있다 했다.
술법에 걸리면 아무리 의지가 강한 자라 해도 백치가 되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다 털어놓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자신도 모든 것을 토해 내게 될 것이다.
치우 일족의 위치, 전력.
자신이 알고 있는 중요한 정보들이 헌원족에게 들어간다면 너무도 위험했다.
수룡왕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하려 애썼다.
‘소공녀!’
그때, 흐릿한 기억 속으로 용혜란에게 받은 명령이 떠올랐다.
자신이 반드시 성공해야 할 마지막 임무였다.
동시에 몇 개 남지 않은 이빨 사이에 숨겨 둔 독단과 만리취가 느껴졌다.
다행히도 제갈휘가 배기환을 먹일 때 들키지 않았다.
자신에게 이것들을 주며 울먹이던 용혜란의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소공녀와 일족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수룡왕은 우선 흔들리는 이빨로 혼신의 힘을 다해 만리취를 깨물었다.
부서진 만리취를 입속에 고인 피와 섞은 수룡왕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 이제 말할 마음이 생겼느냐?”
수룡왕이 입을 오물거리며 속삭였다.
하지만 소리가 너무 작아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가 않았다.
“무슨…….”
미간을 찌푸린 제갈휘가 수룡왕에게 좀 더 가까이 귀를 가져갔을 때였다.
푸악!
수룡왕이 제갈휘의 얼굴을 향해 핏물을 뿜어냈다.
“이놈!”
퍼억!
분노한 제갈휘가 수룡왕의 명치에 주먹을 날렸다.
“쿠욱!”
수룡왕이 신음을 토해 내며 몸을 구부렸다.
그렇지 않아도 성한 곳이 없는 몸에 가해진 일격은 오장육부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은 선사했다.
“크크크크.”
그 와중에도 수룡왕은 제갈휘에게 조소를 날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무척 통쾌했던 것이다.
그런 수룡왕의 모습에 제갈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좋다!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네놈이 백치가 되고서도 날 비웃을 수 있을지 두고 보자!”
얼굴에 묻은 피를 신경질적으로 닦아 낸 제갈휘가 품속에서 검은색 목함을 꺼내 열었다.
목함의 뚜껑을 열자 녹색의 길고 가느다란 침들이 보였다.
탈혼침(脫魂針)이라는 것으로, 대상자의 머리에 꽂아 넣으면 뇌를 건드려 시전자가 의식을 지배하도록 만드는 것.
술법을 받은 자는 의지가 없는 백치가 되어 시전자의 뜻대로 모든 것을 토설하게 되는 것이다.
“흥! 네놈이 토설한 정보는 잘 써먹으마!”
제갈휘가 목함에서 탈혼침을 꺼내 수룡왕의 백회혈에 박아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수룡왕의 일그러진 입술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두 눈동자가 빛났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제갈휘의 표정이 굳어졌다.
“끄르륵…….”
“이, 이런!”
그사이 수룡왕의 입에서 검붉은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용혜란이 준 독단을 깨뜨린 것이다.
“대체 어떻게 독을!”
당황한 제갈휘가 급히 뒤로 물러섰다.
잘못하면 자신까지 중독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룡왕의 육신이 순식간에 녹아내릴 정도로 강력한 독이었다.
‘대체 어떻게 독을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분명 처음에 놈의 몸을 샅샅이 검사했거늘!’
뇌옥에 수감하기 전에 놈의 몸을 철저히 뒤져 독단이나 숨겨놓은 무기가 없음을 확인했다.
한데 자신의 눈앞에서 독으로 자살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누군가 놈에게 독단을 가져다준 것.
그것은 곧 맹 내에 치우 일족의 간자가 침투했다는 이야기였다.
“여봐라! 당장 경비들과 간수장을 데려오거라!”
제갈휘가 다급히 소리쳤다.
누군가 놈을 만났다면 간수들이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제갈휘의 호통에 옥졸들이 경비무사와 간수장을 데리고 들어왔다.
“너희들은 수룡왕이 잡혀 온 후 뇌옥을 출입한 자들의 명단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목록을 작성해 보고하거라! 그리고 이곳의 음식을 책임진 자들을 모두 잡아들여라!”
“네!”
경비무사들과 간수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제갈휘에게 복명했다.
명령을 내린 제갈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맹 내에 치우 일족의 간자가 숨어들었음이 분명한 이상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반드시 찾아내야 했다.
이를 악문 제갈휘가 군사부를 향해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