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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5(8화)
3장 감석보의 결혼(2)
그간의 회포도 풀 겸 천성은 하루를 더 철혈문에서 묵은 후 소화산으로 향했다.
철혈문 식구들이 천룡에게 가져다주라고 바리바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싸 준 덕에 올 때에 비해 잔뜩 늘어난 짐을 짊어질 수밖에 없었으나 마음은 즐겁기만 했다.
사흘 정도 움직인 끝에 천성은 삼선이 사는 소화산 화운곡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화운곡에는 삼선이 직접 시전한 진법이 펼쳐져 있어서 아무나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다.
천성은 검치가 알려 준 대로 방위를 밟으며 천천히 화운곡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사실 진법의 생문과 사문을 모른다 해도 영안을 통해 쉽게 출입 방법을 알아낼 수 있는 천성이었기에 검치가 알려 준 방법은 그다지 소용이 없었다.
“아!”
반 각도 안 되어 진을 통과한 천성은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경치에 탄성을 터뜨렸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이 색색의 기화요초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화운곡은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상당히 넓어서 얼핏 보아도 사방 삼백 장은 되어 보였다.
“누가 왔는가?”
중앙에 있는 모옥들 중 하나에서 무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천룡이의 동생인가?”
곧 천성을 알아본 도연과 무지가 모옥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잘 지내셨습니까?”
천성이 고개를 숙여 두 사람에게 인사를 올렸다.
“허허, 형을 만나러 온 게로구만. 잘 왔네.”
무지가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천성을 반겼다.
“아니, 천성이, 네가 웬일이냐!”
그때였다.
모옥 뒤쪽으로부터 천룡이 후다닥 달려 나왔다.
“형!”
천성도 마주 달려가 형을 부둥켜안았다.
소화산으로 출발할 때에 비해 많이 좋아진 모습이었다.
간간이 흉터가 보이긴 했으나 외상은 거의 회복된 듯 보였고, 움직임 역시 자연스럽고 힘이 넘치는 것을 보니 내상도 많이 회복된 듯했다.
“다 나은 거야? 쌩쌩하네!”
천성이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상처는 거의 나았다. 단지 이제 무공과 내력을 회복하는 일만 남았지. 아직은 절정의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다.”
천성이 씁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강하던 천룡이 고작 절정에도 못 미치는 능력만 남은 것이다.
천성의 걱정을 알아차렸음일까?
“걱정 마라. 이 형이 누구냐! 일 년 정도면 본래의 실력을 되찾을 수 있을 거다!”
천룡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하자 천성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서문 소저가 많이 보고 싶어 하고 있어. 가끔 연락도 하고 그래.”
천성의 말에 천룡이 아련한 눈빛으로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동안은 원래의 몸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게다가 정말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신하지도 못했고. 그러다 보니 괜히 서문 낭자에게 부담만 될 것 같아 연락을 못했다.”
천성은 천룡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것 같았다.
무공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을 것이다.
서문유란의 마음만 더 아프게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감 공자가 삼월에 결혼식을 올린대.”
천성은 분위기가 가라앉자 화제를 바꾸었다.
“하하하, 그래? 어디 보자. 한 달 보름 정도 남았구나. 내가 안 가면 감 공자가 서운해할 테니 꼭 가 봐야겠구나.”
“그래, 이제 몸도 어느 정도 회복했으니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얼굴도 보이고 해야지. 천의단 단원들 모두가 형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
“알았다. 내 반드시 감 공자 결혼식에는 참석하마. 그때 모두와 인사도 하도록 하자. 그전에는 네가 대신 안부 좀 전해 주고.”
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철혈문에서 가져온 음식과 술로 간단히 술자리를 마련한 천성과 천룡, 삼선은 밤늦게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루를 더 머물고 소화산을 떠나는 천성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천룡에 대한 걱정을 한결 덜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문유란을 비롯해 천의단 단원들도 천룡의 소식을 들으면 무척 기뻐할 것이 분명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천성은 휴가를 받은 지 스무 날이 지나 무림맹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 * *
회천궁 용좌에 용천광이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의 오른쪽에는 스물 안팎으로 보이는 청년이 시립해 있었는데, 온몸에서 뿜어지는 위압적인 기세가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무척이나 닮은 얼굴로 보아 그가 용천광의 직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용좌 앞으로는 치우 일족의 수뇌부들이 좌우로 늘어선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열쇠를 빼앗겼다?”
용천광이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놈이 또 우리 일을 방해했단 말이지.”
또다시 흑협이라는 놈이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두 명의 장로가 무림맹의 수중에 들어갔다.
용천광의 온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럼에도 자리를 메운 수뇌부들 중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참으로 암담한 상황이었다.
마지막 열쇠를 얻지 못함으로 인해 유물을 손에 넣을 방법이 사라져 버렸다.
자칫 그간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어 버릴 위기인 것이다.
“무슨 수를 쓰든 열쇠를 반드시 다시 찾아야 한다! 구공, 좋은 방법이 없는가?”
“놈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이상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굳은 얼굴로 구공이 대답했다.
“그것이 무엇인가?”
“다시 인질을 잡는 것입니다. 대연문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가장 효과가 있는 방법입니다. 단, 그때는 놈의 실력을 예측하지 못해 실패했으나, 이미 놈의 실력이 뛰어남을 아는 이상 이번엔 인질의 위치를 숨기고 거래를 해야 할 것입니다.”
용천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놈의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을 죽여서라도 반드시 열쇠를 찾아야지!”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제는 인질을 잡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오직 흑협에 대한 증오와 분노만이 용천광의 머릿속을 지배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대연문 놈들을 다시 잡아야겠군!”
“그렇습니다. 확실히 놈과 관련된 것으로 확인된 이들은 그들밖에 없지요. 그들을 잡아 열쇠와 맞교환하자면 놈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좋다! 당장 대연문 식솔들을 잡아다 내 앞에 데려오거라!”
그때, 용천광의 옆에 시립해있던 청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 너무 서두르시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야기를 듣기로 저번 일이 있은 후 화산파와 무림맹에서 대연문에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칫 어설프게 움직였다가는 성공하더라도 우리 역시 상당한 전력의 손실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는 바로 얼마 전 폐관을 마치고 출관한 치우 일족의 소공자 용문회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영력을 익히는 속도가 역대 천황들과 비교했을 때 십 년 이상 빨랐다.
당연히 그의 존재는 치우 일족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용문회라면 어쩌면 영력을 완전히 복원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었다.
복희의 유물이 없더라도 치우 일족이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방증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수많은 이들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폐관에 들어간 지 삼 년 만에 용문회는 다시 세상에 나왔다.
페관을 마친 용문회는 아쉽게도 영력을 완전히 복원해 낼 수는 없었으나 무려 세 가지 영력을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고수가 되어 돌아왔다.
아직 스물셋에 불과한 나이에 세 가지 영력을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경악할 만한 성장이었다.
치우 일족 중 세 가지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천황 용천광과 구공뿐이었으니, 용문회의 뛰어남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용문회의 의견에 용천광이 흥미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아들이지만 앞으로 치우 일족의 희망이 될 자랑스러운 아이였다.
그런 아들이 출관 후 첫 의견을 낸 것이다.
“네 생각을 말해 보라.”
“이미 대계를 위해 수천 년을 기다려 온 우리 일족입니다. 잠시의 억울함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우를 범해 대계를 망친다면 그보다 더 큰 참사는 없을 것입니다. 하니 우선 대연문과 주변의 움직임을 상세히 파악한 후 그에 맞는 철저한 계획을 세워 움직이는 편이 옳습니다. 한두 달 더 늦는다 하여 유물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허허허, 네 말이 맞도다! 이 아비가 잠깐의 분노로 큰 실수를 저지를 뻔하였구나! 역시 내 아들이로다!”
“황송하옵니다!”
용문회가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용천광의 칭찬에 감사했다.
“구공, 그대가 보기에는 문회의 의견이 어떠한가?”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인 용천광이 구공을 바라보았다.
“소공자님의 영명하심은 실로 일족의 홍복이라 할 수 있사옵니다.”
구공 역시 만족스러운 얼굴로 용문회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우선 대연문 주변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 보고하도록 하라!”
용천광의 명에 수뇌부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소공녀께 연락이 왔습니다!”
그때, 환사가 다급히 대전으로 뛰어 들어왔다.
제대로 예조차 차리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보통 일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냐!”
구공이 환사의 경박한 태도를 나무라며 물었다.
“죄송합니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천황께 죄를 범했습니다.”
얼른 바닥에 오체투지한 환사가 고개를 조아렸다.
“괜찮으니 무슨 일인지 말해 보거라.”
용천광의 명이 떨어지자 그제야 조심스럽게 일어선 환사가 입을 열었다.
“무림맹 내에 잠입한 헌원 일족의 정체를 알아냈다 합니다!”
환사의 보고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드디어 헌원 일족의 꼬리를 잡은 것이다.
“전서를 읽어 보라!”
전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수룡왕, 헌원 일족 심문 중 사망.
심문자, 군사 제갈휘.
매우 간단한 전문이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치우 일족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는 중요한 정보였다.
장내를 메운 치우 일족의 수뇌들의 얼굴이 한껏 상기되었다.
“제갈휘!”
무림맹 수뇌부 중 헌원 일족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설마 군사 제갈휘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기야 뒤에서 음모를 꾸미자면 그야말로 가장 적합한 자리였다.
“제갈세가가 헌원 일족과 얽혔을 가능성도 있겠군요.”
용문회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맹 내에 다른 헌원 일족이 더 있을 수도 있으나 맹주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자가 바로 제갈휘였다.
맹주가 헌원 일족이 아닌 이상 그의 위치가 맹 내의 헌원 일족 중 가장 높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주변을 조사하면 머지않아 헌원 일족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제갈휘와 제갈세가에 대해 조사하도록 하라! 놈들의 모든 것을 놓치지 말고 살펴서 간악한 헌원 놈들의 본거지를 밝혀내도록 하라!”
“존명!”
수뇌부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용천광의 명에 답했다.
* * *
맹에 돌아온 천성은 가장 먼저 서문유란에게 천룡의 소식을 알려 주었다.
천룡이 많이 회복되고 원래의 무공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소식에 서문유란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또한 천의단의 모든 이들이 천룡의 소식에 함께 기뻐했다.
천성이 돌아온 지 십여 일이 지나고 감석보가 대연문으로 떠났다.
호유설과의 혼인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성아, 우리도 참석하려면 며칠 안에 출발해야 되지 않아?”
모용혜의 말에 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름 정도 걸리는 여정이었다.
그러니 삼 일 안에는 출발을 해야 제때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형 때문에 휴가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 자리를 비운다는 게…….”
“뭐, 어때? 요즘 천의단은 임무도 없고 한가한데. 아예 단체로 움직이면 되지! 이참에 내가 숙부님께 졸라 봐야겠다!”
말을 꺼내기 무섭게 모용혜가 휭하니 사라졌다.
사실 단원의 혼례에 천의단 전체가 참여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일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마침 무림맹에서 축하 사절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아무래도 대연문의 참사에 대해 맹 차원에서 지원하기로 한 이상 대외적으로 무림맹이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대연문을 챙기고 보호함으로써 무림맹이 여전히 정파의 중심이고 모든 문파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결국 감석보가 속해 있던 천의단에서 축하 사절을 차출하기로 결정되었고, 단주인 모용단천을 필두로 감석보와 친분이 있던 단원들 위주로 축하 사절단이 구성되었다.
천성과 모용혜는 당연히 그에 포함되었고, 천하영웅대회 때 동행했던 이들이 다시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천성과 모용혜, 화설련, 영호명, 청명, 서문유란, 공현, 제갈수련, 이렇게 여덟 명에다 같은 조이자 운현의 혈사를 함께한 백담과 팽만호가 추가되어 모용단천 포함 총 열한 명의 인원으로 사절단이 꾸려졌다.
사절단은 이틀 후 무림맹을 출발해 섬서에 위치한 선검문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