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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5(13화)
4장 헌원의 계략(2)


“반응을 보니 내가 재대로 짚었군. 후후.”
백담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건채 천성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천성의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놈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알아낸 것일까?
이대로 백담을 해치워야 하는가, 아니면 도망쳐야 하는가?
[침착해라! 일단 놈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야 한다.]
무숙의 말에 천성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백담을 노려보았다.
“긴장하지 말고 우선 잠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얼굴로 백담이 천성에게 말했다.
잔뜩 힘이 들어간 천성에 비해 백담은 시종일관 여유로운 모습을 유지했다.
“네놈은 파편을 노리는 것인가?”
적의에 찬 목소리로 천성이 물었다.
“아, 글쎄, 그게 좀 애매하군. 내가 파편을 노리는 것은 아니고, 나를 보낸 자가 파편을 노리고 있지. 난 단지 그것을 찾는 임무만 받았을 뿐이거든.”
그 말로 인해 백담이 파편을 노리는 자와 연계된 것이 확실해졌다.
영안으로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천성은 곧장 흑협으로 변신했다.
백담과 승부를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봐, 이봐! 진정하라고. 나는 너와 싸우려는 게 아니니까.”
백담이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내 정체를 안 거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천성이 물었다.
“후후, 이야기하자면 길지.”
백담이 로안의 명을 받고 행성 쏘론을 떠나 중원 땅에 도착한 것은 천성이 궁혁도에게 발견되고 나서 한 달쯤 후였다.
반란군의 수괴 로안은 천성의 캡슐이 보내졌을 확률이 있는 모든 행성에 정보국 요원을 파견했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백담이었다.
백담은 우선 이곳저곳을 떠돌며 영력의 흔적을 찾았다.
백담은 천성의 친아버지이자 쏘론 중앙연구소 소장 에리안이 아무런 안배도 없이 천성을 탈출시켰을 리가 없었기에, 분명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힘을 자신의 아들을 위해 준비해 두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쏘론 인들은 물론, 발전된 정신 문명을 가진 외계 인류에게 힘은 곧 영력이다.
당연히 천성에게 안배된 힘은 영력일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이곳은 문명이 세워진 지 얼마 안 되는 원시 행성이었다.
영력을 사용하려면 최소 십만 년 이상의 고도로 발전된 문명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성숙되지 않은 인류는 영력을 사용하거나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즉, 이 행성에서 백담 외의 영력을 감지하게 되면 그곳에 바로 천성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쏘론이 아닌 다른 행성에서 파견된 자들일 수도 있었으나, 그들은 특별히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을 테니 직접 확인해 보면 그만이었다.
한데 그 순간, 백담에게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하였다.
생각과는 달리 이곳 행성에 영력을 사용하는 자들이 의외로 많았던 것이다.
백담은 결국 한동안 감을 잡지 못하고 헤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 흑협을 발견하고는 그가 바로 자신이 찾는 자임을 거의 확신하게 되었다.
영력의 순도부터 달랐고, 그 위력이 다른 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서 그 뒤부터는 흑협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한데 오늘 천성이 철혈문의 위기를 보고 다급히 변신하면서 백담의 감각에 잡힌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백담도 천성이 흑협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무숙이 천성으로 변신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사라진 사람이 없자 백담은 생각을 달리했다.
어차피 내부인 중 하나가 흑협임은 분명했다.
한데 변신을 했음에도 사라진 사람은 없다.
그 말인즉, 누군가가 흑협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혹은 천성이 쏘론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홀로그램이나 정보 복제체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홀로그램은 물질의 질감을 구현해 낼 수 없는 탓에 본체의 역할을 맡기엔 너무 들킬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복제체를 사용하는 것이 거의 확실했다.
복제체는 본체와 신체 구조는 물론, 온도까지 완벽하게 같도록 구현해 낼 수 있었다.
단, 정보 복제체는 주변의 에너지를 동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인간과는 다른 방법으로 기운을 흡수한다.
천성이 기문으로, 무인들이 호흡을 통해 기를 흡수하는 반면, 정보 복제체는 자기의 흐름을 이용해 나노 입자들 하나하나가 발전기 역할을 하게 된다.
즉, 정보 복제체 주위에는 특수한 자기의 움직임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백담은 그것을 잡아낸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백담의 긴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천성은 계속 갈등을 하고 있었다.
백담에게서 전혀 적의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코 긴장은 늦추지 않았다.
어쨌든 아직 백담이 적이란 사실은 아직 바뀌지 않은 것이다.
“내가 천성, 너를 따로 부른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해 주지. 아까도 말했듯이 너와 태초의 파편을 노리는 자는 로안이라는 반란군 사령관이야. 자네 아버지를 공격한 사람이기도 하지. 내가 속해 있는 정보국은 사실 반란군과 전혀 관계가 없는 곳이야. 전통적으로 군과 행정부 사이의 중립 기관에 속하지.”
행성 쏘론의 정보국은 독특한 기관이었다.
행정부의 명령을 받으나 하는 일은 군과 관련된 부분이 많았다.
또한 소속 요원들은 군인의 신분이 아니었지만, 군인과 같은 훈련을 소화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정보국은 대대로 행정부와 군부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해 왔다.
그렇기에 이번 반란에도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중립을 지킨 것이다.
“한데 로안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던 모양이야. 정보국 소속 요원들의 가족을 인질로 잡고 우리를 태초의 파편을 찾는 데 이용했지. 사실 무언가를 찾는 데는 정보국 요원만 한 이들이 없거든. 대다수의 요원들이 마지못해 로안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지. 나 또한 마찬가지고. 하지만 내 가족을 잡은 놈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는 없겠지? 그래서 나는 놈이 좋아하는 꼴은 보기가 싫다, 이거지. 후후.”
쏘론 인에게 가족이란 존재는 이곳 중원과는 또 달랐다.
거의 불사의 수명을 가진 쏘론 인들은 마음대로 출산을 할 수 없었다.
해서 자식을 가질 수 있는 기회는 그들에게 매우 드물게 허용되었다.
그만큼 가족이라는 것은 수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사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인 것이다.
점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천성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대체 백담이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로안도 바보가 아닌 이상 우리가 빤히 자신을 싫어함을 알면서도 믿고 임무를 내보내진 않겠지. 그렇기에 한 가지 제약을 걸어놓았어. 바로 일정 기간 동안 우리가 너를 찾지 못하면 가족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거지.”
결국 천성을 찾지 못하면 임무에 파견된 요원들의 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한다는 이야기였다.
천성은 마치 치우 일족을 보는 듯한 로안이라는 자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아,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보지 말라구. 그래도 그 기간이 제법 기니까. 이곳 행성 시간으로 정확히 삼십 년의 기간이거든. 해서 나는 그 기간 동안은 너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하지 않을 생각이야.”
“왜지?”
천성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로안에게 좋은 일을 시켜 줄 마음은 전혀 없어. 하지만 가족이 죽는 것은 더더욱 안 될 일이지. 그러니 최대한 시간을 끌어 놈이 조바심을 내도록 하는 것이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지. 후후.”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백담이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면, 남은 시간 동안 네가 실력을 높여 로안을 이겨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지. 이번에 확인해 본 결과, 이미 세 번째 단계를 눈앞에 두고 있더군. 로안의 경지도 세 번째 단계를 넘은 상태지. 물론, 놈은 이미 그 끝에 다다라 있지. 하지만 네가 지금까지 발전해 온 속도라면 남은 십 년의 시간 동안 충분히 놈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생각해. 해서 시간이 많이 남았음에도 너를 직접 만나 보고 싶었던 거야.”
천성은 백담의 말을 믿어야 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황인데다, 그는 적이 천성을 찾기 위해 보낸 자였다.
쉽게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내 말을 믿든 믿지 않든 난 당분간 너에 대해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을 것이고, 이곳 중원 사람들에게도 너의 정체를 알릴 생각은 없어.”
[하기야 만일 백담이 천성과 적대할 생각이었다면 이미 로안에게 보고했을 거다. 이렇게 얼굴을 드러내 너를 설득할 필요가 없지.]
무숙의 말에 그제야 천성이 변신을 풀었다.
“좋아, 믿어 주지. 하지만 결국 당신 가족이 인질로 잡혀 있는 한 우리가 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겠군.”
“후후, 그렇지. 당분간 난 방관자로 있을 뿐이야.”
백담이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알려 주지. 사실 오늘 너를 만난 것은 이것을 알려 주기 위함이기도 해. 지금 너에게 가장 위험한 적은 내가 아니라 생체 병기야. 놈의 위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해. 지금의 너로서는 상대할 수 없는 존재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천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생체 병기는 환경에 적응하며 가장 강력한 생명체의 모습으로 점점 변하지. 완성된 생체 병기는 그야말로 초월자나 반신에 이른 자 외에는 제압할 수 없는 무적의 존재야. 한마디로 이 행성에서 가장 강력한 생명체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게다가 놈을 없애려면 구성하는 입자들을 한 번에 소멸시켜야 해. 그렇지 않는 이상 조직이 무한 재생되어 거의 불사에 가깝지. 반드시 기억해. 한 번에 소멸시켜야 해. 먼지 하나라도 남으면 순식간에 다시 재생되는 게 놈이야.”
백담은 다시 한 번 생체 병기에 대해 강조하고는 돌아서서 모습을 감추었다.
천성으로서는 한 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은 터라 몹시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당장에는 백담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차피 고민해 봐야 특별한 답은 없었다.
실력을 키워 강해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세 번째 단계를 어서 넘어서야 해.’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진 천성이 모용혜가 있는 의당으로 돌아갔다.

* * *

치우 일족의 습격으로 인한 피해도 심각했지만 혼인을 망치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한 터라 그 뒷수습을 위해 천의단 일행은 며칠 더 선검문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일단 감석보와 호유설의 구출에 대해 논의하고 부상자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모용혜는 사흘 만에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물론 검이 관통한 상처이니, 완치되는 데는 최소 보름은 걸린다고 했다.
모용혜가 부상을 입게 된 연유는 매우 그녀다운 이유였다.
혼례가 끝난 후 첫날밤을 엿보기 위해 신방까지 따라갔다가 하인들에게 쫓겨난 뒤 투덜거리면서 돌아오는 길에 감석보와 호유설을 납치해 가는 놈들을 만난 것이다.
“너, 내가 어떻게 됐을까 봐 가슴이 철렁했지? 후후,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해.”
천성은 씨익 웃으며 그녀의 착각을 가볍게 씹어 주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어느새 모용혜가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