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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5(14화)
4장 헌원의 계략(3)


약속 날짜가 되어 천성은 감석보와 열쇠를 교환하기 위해 화산으로 향했다.
치우 일족이 화산을 교환 장소로 잡은 이유는 헌원 일족이나 다른 무림인들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첫 번째 열쇠가 봉인되었던 화산의 비동은 오직 천성과 치우 일족만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백담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흑협으로 움직이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헌원 일족의 감시만 조심하면 정체를 들킬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 시진도 안 되어 비동에 도착한 천성은 열쇠의 수호자인 강휘성을 찾았다.
“자네가 어쩐 일인가?”
뜻밖의 방문에 강휘성이 놀라 물었다.
천성은 강휘성에게 치우 일족과의 일에 대해 설명했다.
“허, 치우 일족이 복수에 눈이 멀어 긍지마저 잃어 가는구나.”
강휘성이 안타까운 듯 탄식을 했다.
치우 일족이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신농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그들 스스로 한 선택입니다. 아무리 그들의 원한이 크고 깊다 한들 다른 이들의 목숨을 빼앗아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 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강휘성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정오가 되자 섬응이 혼자 비동 앞에 도착했다.
아마도 그의 능력인 속도 때문일 것이다.
“열쇠를 받으러 왔다! 모습을 보여라!”
섬응의 외침에 천성이 열쇠를 넣어 둔 봇짐을 등에 멘 채 비동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봇짐을 풀어 열쇠를 꺼내 든 천성이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걱정 마라. 우리도 열쇠만 찾으면 일부러 사람을 해할 이유가 없다!”
서늘한 눈빛으로 섬응을 한차례 노려본 천성이 결국 열쇠를 건넸다.
“열쇠를 확인한 후 감석보와 그 아내는 내일 아침에 선검문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그럼 앞으로 보는 일이 없길 바라마!”
열쇠를 받은 섬응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화산을 떠났다.
천성 역시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던지라 곧장 선검문으로 돌아왔다.

* * *

다음 날 아침.
선검문 입구를 지키던 두 무사의 눈이 더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부릅떠졌다.
“아가씨! 감 공자!”
감석보와 호유설이 나타난 것이다.
두 사람은 초췌한 모습으로 힘없이 정문을 향해 걸어왔다.
“괜찮으십니까!”
무사들이 재빨리 달려 나와 두 사람을 부축했다.
“자네는 어서 문주님께 이 사실을 아뢰게!”
태상문주 호천덕을 비롯해 문주 호연백과 선검문 문도들이 달려나와 두 사람을 맞이했다.
“다행이구나, 다행이야!”
호천덕은 연신 다행이라는 말을 내뱉으며 두 사람을 안아 주었다.
선검문도들과 선검문을 찾은 친인들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그나마 혼례의 주인공들이 무사히 돌아왔기 때문이다.
또한, 입을 모아 흑협을 칭송했다.
선검문의 참사를 막아 낸데다 열쇠를 포기하면서까지 두 사람을 구해 낸 그 의기를 높이 산 것이다.
천성은 멀찌감치 떨어져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절대 치우 놈들 뜻대로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결국, 유물을 찾으려면 놈들도 진시황릉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천성은 그 입구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천성은 그곳에서 치우 일족에게 좌절을 안겨 주리라 다짐했다.

* * *

며칠 후, 갑작스러운 소문 하나가 온 강호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복희의 유물은 진시황릉 지하에 있다!

소문이 지닌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무림인들은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너도 나도 짐을 싸들고 진시황릉으로 향했다.
소문이 퍼진 지 채 닷새도 안 되어 진시황릉 근처에는 일만에 가까운 무림인들이 진을 치게 되었고, 더 많은 무인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왔다.
소문의 진위가 불확실함에도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몰려든 이유는 그 출처가 바로 무림맹의 군사인 제갈휘였기 때문이다.
치우 일족의 장로들을 심문하여 얻어낸 정보라고 했다.
물론, 제갈휘가 직접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고, 묘하게도 대부분 그것을 믿었다.
결국, 열흘도 안 되어 그토록 큰 진시황릉도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게 됐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남궁영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제갈휘를 다그쳤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군사부에서 정보가 새어 나간 것 같습니다. 모든 게 저의 불찰입니다.”
제갈휘가 고개를 깊게 숙인 채 사죄했다.
“누구인가! 정보를 흘린 자가!”
“왕륜이란 자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정부에게 술김에 털어놓은 듯합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왕륜이라는 자는 군사부의 일급 행정관 중 한 명이었다.
문서를 취급하는 자리라 위아래로 전달되는 수많은 기밀문서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행정관 중에서도 일급이었던지라 그가 취급하는 문서들은 최고의 기밀을 요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중에 복희의 유물에 대한 내용을 발견한 그가 엉겁결에 자신의 정부이자 홍화루의 기생인 미월에게 말해 버리고 만 것이다.
사실 미월은 하오문 소속의 연락책이었다.
이토록 비싼 정보를 얻은 하오문이 돈을 떼로 긁을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고, 이름 좀 있다 하는 강호의 모든 문파에 상당한 거금을 받고 정보를 뿌린 것이다.
“놈은 잡았는가?”
아직 화가 가시지 않아 바짝 날이 선 목소리로 남궁영이 물었다.
“일이 커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젠장!”
남궁영의 얼굴이 보기 싫게 구겨졌다.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일이 없는 것이다.
얼마 전에야 간신히 알아낸 소중한 정보를 어이없게 온 천하에 공개하게 된 셈이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된 이상 유물을 둘러싼 무인들 간의 치열한 혈투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자칫 큰 참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다.
“마련 쪽에서는?”
“우리가 정보를 숨겼다고 추궁하는 분위기입니다.”
복희의 유물과 관련된 정보 공유를 먼저 제안한 것은 무림맹이었는데, 유물의 위치를 알아내고도 마련에 바로 알리지 않았음은 명백한 협정 위반이었다.
무림맹에서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결국 마련과 사혈맹이 한 다리 걸치는 것을 막을 수 없겠군…….”
남궁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도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서둘러 움직여야 할 터!”
“이미 화산과 공동에 연락해 그곳으로 움직이도록 했고, 청룡, 주작, 현무, 백호, 네 개 단과 천의단을 서안을 향해 출발시켰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니 일단 선검문에 있는 천의단 사절단을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선검문은 진시황릉에서 고작 반나절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보다 한발 앞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단주인 모용단천을 비롯한 단원들의 실력도 뛰어났다.
우선 그들에게 현지 상황을 살피도록 한 후, 화산과 공동파의 고수들과 합류시키는 편이 현장을 주도하기에 유리할 것이다.
“그게 좋겠군. 당장 그들에게 명을 내리도록 하게. 그리고 천의단의 남은 인원과 청룡단과 주작단을 함께 파견해 무인들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하게. 부디 큰 참사가 없어야 할 텐데…….”
유물의 확보보다 더 걱정이 되는 것은 최악의 경우, 유물을 두고 무인들 간에 피비린내 나는 혈투가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남궁영의 고민이 점점 더 깊어 갔다.

* * *

“구공, 이게 사실인가?”
용천광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장로들이 유물의 위치를 발설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장로들에게는 독단이 지급되지 않았기에 자살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치우의 전사인 그들이 그토록 의지가 약했단 말인가.
“고정하십시오. 무림맹의 군사 제갈휘가 헌원 일족임을 잊으셨습니까?”
구공의 말에 용천광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헌원 일족의 사술이라면 장로들도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정보를 토설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헌원 일족은 어차피 유물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아예 장로들에게 정보를 얻어낼 필요 자체가 없는 것이다.
“만일 제갈휘가 사술을 사용해 장로들에게 정보를 알아냈다 하더라도 실상 얻은 것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장로들조차도 유물이 있는 곳의 입구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힌 용천광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대체 놈들의 의도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무엇 때문에 유물의 위치를 세상에 알린 것인가?”
모든 정황을 살펴볼 때, 헌원 일족이 일부러 유물의 위치를 노출시킨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무언가 놈들의 노림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움직임을 어렵게 하려는 의도겠지요. 이미 진시황릉 근처에는 무림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해 유물의 입구로 향하기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놈들이 노린 것이 바로 이것일 테지요. 우리가 유적의 문을 여는 순간, 놈들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이런 간악한 놈들!”
용천광은 이를 갈았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가짜 열쇠를 만들어 놈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는 것입니다. 일행을 둘로 나누어 가짜 열쇠를 가진 이들이 반대쪽에서 소란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 틈에 진짜 열쇠를 가진 쪽은 유적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됩니다.”
말이야 쉽지만 사실 그 역시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모든 이의 시선이 반대쪽으로 향한다는 보장이 없을뿐더러 시선을 끄는 데 성공한다 해도 유적의 문을 열 동안 군중들을 속일 수 있느냐도 문제였다.
가짜 열쇠는 금방 들통 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용천광이 의자를 내려치며 한탄했다.
“일단 모든 전력을 동원하는 한이 있어도 유뮬을 반드시 차지해야 합니다. 저희로서는 이번 일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습니다.”
도리가 없었다.
모든 힘을 동원해 유물을 차지하는 것만이 일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었다.
“내가 직접 움직일 것이다! 모든 전사들을 동원해 헌원 일족과 다른 세력의 방해를 막는다!”
용천광의 온몸에서 사위(四圍)를 압도하는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