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종남산의 문제아 단연경?”
“그래요. 종남산 쾌남아 단연경!”
앞에 붙는 수식어는 달랐지만 어쨌든 같은 인물을 지칭하는 것은 맞는 것 같았다.
“정말 연경이 맞냐? 다른 놈 아냐? 못 알아보겠는데?”
국진이 나서며 말하자 단연경은 자신의 긴 머리털을 들어 올려 보여 주었다.
소년에서 이제는 청년에 이르러 많이 변했지만 확실히 눈매는 기억 속의 단연경과 닮아 있었다.
“맞는거 같긴 한데, 역시 잘 모르겠다. 혹시 그놈 사칭해서 우릴 어찌해 보려는 것 아냐?”
반위가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듯 말하자 단연경은 답답해하며 가슴을 팍팍 쳤다. 그러자 다시 먼지가 일었다.
“나 맞다니까. 콜록콜록……. 아, 진짜. 가만 이 수염 때문에 그러나 본데…….”
단연경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우뚝 멈추더니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런 젠장, 검을 놓고 왔잖아. 아, 다시는 저기 안 갈 거라고 맹세했는데 고작 일각도 못되서 다시 들어가야 한다니…….”
단연경은 터덜터덜 걸어 자신이 나온 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반위와 국진은 서로 바라보았다.
“사형, 생긴 것도 그렇고 행동이나 말투도 그렇고 십오 년 전에 사라져 버린 연경이 맞는 것 같은데요.”
국진의 말에 반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그리 생각은 한다만은 저 녀석이 왜 저기서 기어 나온 거지?”
“글쎄요. 저기가 저 녀석 사문의 비밀 수련장일 수도 있죠. 사부님과 어르신들이 말씀하셨잖아요. 과거 전진파는 중원 제일의 문파였다고. 심지어 지금의 소림이나 무당을 능가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이각 정도가 흐른 뒤 단연경이 구멍에서 기어 나와 두 사람 멈추어 섰다.
검은색의 수수한 모양의 검을 들고 나온 단연경은 그걸 두 사람에 척 내밀며 말했다.
“이거 보시오.”
무인들은 자신의 무기를 쉽게 남에게 주지 않고 받지도 않는다. 하지만 단연경이야 이미 상대를 알아봤고, 반위와 국진도 이미 어느 정도 그가 같이 자라 온 단연경임을 알았기에 대뜸 검을 받아 들었다.
수수한 겉모양은 분명 단연경의 검이었다. 그리고…….
스르릉.
단연코 그들이 지금껏 보아 온 보검 중에서도 최고라 할 만한 검신이 드러났다. 그리고 검신에는 중양(重陽)이란 글이 선명하게 보였다.
착!
검을 다시 검집에 밀어 넣은 반위는 국진과 시선을 교환하다 이내 단연경을 와락 끌어안았다.
“푸하하하! 연경이 이노무 자식아! 어디서 무얼하다 이제 나타났냐! 정말 보고 싶었다!”
“나도 보고 싶었소. 하하하!”
* * *
종남파의 장문인 목유청(木誘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옥허(玉虛) 사형께 네가 폐관 수련에 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겠구나.”
“고생은요. 하하!”
‘고생 정도입니까? 잘못했으면 그 안에서 제 아름다운 청춘 다 날리는 건 둘째치고 늙어 죽을 뻔했는데요.’
차마 이 말은 하지 못했다.
사부를 욕해 봤자 누워서 침뱉기이기도 했고, 어쨌든 나이도 서른이 넘었으니 예전처럼 행동하는 건 아니다고 생각해서였다.
“허허허. 그래도 폐관 수련이 헛되지 않았나 보구나. 실력도 엄청나진 것 같고, 과거처럼 천방지축도 아닌 것처럼 보이니 말이야.”
“하하…….”
사실 어릴 때 사고친 게 장난이 아니었기에 뒤통수를 긁적이는 단연경이었다.
“이런이런! 먼지 떨어진다, 이놈아.”
“아…….”
뒤통수를 벅벅 긁어대자 다년간 쌓여 온 때와 비듬, 먼지가 한꺼번에 날린 것이다.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인 목유청이 말했다.
“농담이다. 그깟 먼지 좀 날리면 어떠하냐. 오랜만에 널 보니 정말 기쁘구나. 아마 네가 온 걸 알면 좋아할 사람이 이곳에 꽤 많을 게야. 특히 현우(賢尤)와 공항(空恒) 사제가 좋아할 게야. 허허허.”
그 말에 단연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공항 사숙께는 일단 저 돌아온 걸 비밀로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전 사부님께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출관하자마자 가려 했는데 어쩌다 이리 먼저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목 사숙.”
왠지 단연경이 눈을 좌우로 굴리며 급해진 모습을 보이자 목유청은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공항 사제에게는 비밀로 해 두마. 그런데 말이다…….”
“감사합니다. 사숙. 그럼 이만.”
말을 마치자마자 단연경의 모습은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허허허. 이거야 원.”
목유청은 품에서 꽤 오래된 서찰을 꺼내며 중얼거렸다.
“지놈 사부가 남긴 서찰이 있다고 말해 주려 했는데 바로 내빼버리는구먼. 괜히 공항 사제 이야기를 했나. 허허허. 여튼 어릴 때부터 대단한 자질을 보이더니 아예 괴물이 돼서 나타났구먼. 그나저나 휘유! 무슨 놈의 먼지를 이리도 날리고 다니누.”
급격하게 움직이며 단연경이 있던 자리엔 먼지가 흩날리고 있었고 목유청은 한손으로 입 주변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 공중을 휘휘 저어 먼지를 멀리 날려 보냈다.
단연경이 멈춰선 곳은 꽤 넓은 공터였다. 정확하게는 다 파괴되어 없어진 굉장히 넓은 도관터였다.
깊게 숨을 들여마신 단연경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멀리 하나 있는 작고 허름한 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크고 웅장했던 도관은 불타고 파괴되어 세월 속에 사라져 갔지만 단연경과 그의 사부 옥허 도장과 사형인 도진이 살았던 곳만은 남아 있었다.
단연경은 도관에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빨라졌다. 하마터면 좁아 터진 그 계곡에 갇혀 늙어 죽었을 뻔하게 만든 사부에게 따지기 위한 마음 탓이었다.
하지만 이내 걸음은 느려졌다. 인기척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단연경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거미줄도 쳐져 있고 먼지도 제법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어라?”
몇 개 되지 않는 방과 주방을 확인해 보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꽤나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게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책을 잔뜩 쌓아 두었던 서고에도 가 보았지만 역시나 자신이 폐관에 들 때 싹 옮겨 놨던 그 모습 그대로 먼지만 잔뜩 쌓여 있었다.
“뭐야. 사부님은 어디 가고…….”
한참을 도관을 살피던 단연경은 혹시하는 마음에 늘 사부가 심신을 맑게 하는 수행을 하던 계곡을 찾아갔다.
도관에서 거리도 상당했고, 가는 길도 험해 어릴적엔 거의 한 시진이 넘게 걸리던 거리였지만, 지금은 나무 위로 내달려 고작 일각이 조금 넘어 도착할 수 있었다.
“음……. 없네.”
다시 도관으로 돌아온 단연경은 잠시 생각을 하다 사부가 머무르던 방에 갔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뒤지기 시작했고, 옷가지를 넣어 두던 농에서 서찰을 찾을 수 있었다.
어차피 이곳에 오는 길에 종남파가 있으니 들렀다 올 것 같아 목 사제에게 서찰을 맡겨 두었다만, 네놈이 저질렀던 일들과 행동 양식을 볼 때 분명 도망치듯 이곳으로 올 확률이 매우 높기에 서찰을 남긴다. 이 사부는 도진(道眞)과 함께 떠난다. 자세한 내용은 목 사제에게 서찰로 남겼으니 확인해 보거라.
추신. 네놈 옷장에 입을 옷과 신발 같은 걸 유지에 잘 싸 두었으니 빨아서 갈아입도록 해라. 동경과 가위, 소도도 있으니 머리랑 얼굴도 좀 정리하고. 더러운 상거지 꼴일테니 말이야. 그리고 또 하나 그간 선조들의 뜻을 받들어 모으고 보관해 왔던 그 책들. 소실되지 않게 서고에 정리하든지 폐관 장소를 완벽하게 봉쇄해 둬라. 하나라도 없어지면…… 그 뒤는 말 안 하마.
“이런…….”
어떻게 딱딱 맞추는 사부의 서찰에 단연경은 쓴입맛을 다시다 자신의 예전 방으로 갔다. 그곳도 먼지가 꽤 쌓여 있었다.
침상으로 다가간 단연경은 가볍게 툭툭 쳐 보았다.
“윽…….”
먼지가 뽀얗게 피어오르자 뒤로 물러났다.
“여기서 자는 건 좀 그렇겠군. 밖에서 그냥 자야겠다.”
밖으로 나온 단연경은 근처에 있는 큰 나무 위에 올라 아무렇게 드러눕더니 이내 잠들어 버렸다.
나무가 크기도 했고, 무공도 무공인데다 이런 노숙은 그가 폐관 수련 동안 밥 먹듯이 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다음 날부터 단연경은 사부의 명대로 책을 옮기기 위해 움직였다.
일단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서고를 청소하고, 건물에 부서진 부분도 수리했다.
서고다 보니 건물이 망가지면 서책이 금방 손상되어 버리니 당연한 것이었다.
서고를 청소하고 고치는 데만 꼬박 이틀을 소비한 후 본격적으로 책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문의 제오대 장교였던 장춘 진인의 명에 따라 서고를 만들고 책을 보관하며 계속해서 새로운 서적을 모아 온 게 백오십 년이 훌쩍 넘었다.
그러다 보니 책 종류도 많았고 분량도 어마어마했다. 이를 옮기는데 다시 삼 일이 걸렸다.
이렇게 정리가 끝나고 나자 단연경은 그제야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옷장을 열자 서찰에 적혀 있는 대로 옷가지 등이 있었다. 유지로 싸 두어서인지 원래 색이 검은색이라서 그런 건지 빛이 바랜 느낌은 거의 없었다.
그걸 들고 나온 단연경은 도관 한쪽에 흐르는 계곡으로 가 옷을 훌훌 벗어 버리고 뛰어들었다.
“우후후! 시원하구나. 이게 얼마만의 목욕이냐.”
해는 이미 져 어두웠고 완연한 봄임에도 계곡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이미 그런 것에 구애받는 경지는 오래전에 넘어갔기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때밀이용으로 들고 온 천으로 온몸을 벅벅 문질러댔다.
목욕을 하며 머리도 자르고 수염도 정리를 했다. 특히 수염은 그가 늘 꿈꿔 왔던 대로 만들었다.
턱과 코밑에 짧게 수염을 만든 것이다. 동경을 바위에 비스듬히 세워 두고 머리를 잡고 이리저리 둘러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사내답고 멋지게 잘 나왔구먼. 나중에 산 내려가면 여자들이 줄줄 따를 거야. 므흘흘흘…….”
다음 날 일찍 동이 트자마자 종남파로 찾아가 목유청을 만났다.
“난 며칠 전에 바로 올 줄 알았는데 이제야 오는구나.”
“하하하! 그럴까도 했지만 우선 보던 책도 좀 정리해야 했고 또 너무 거지 꼴이라서요.”
“그래, 고생했구나. 아침은 들었느냐?”
“실은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요.”
“저런…… 식관으로 가 보거라. 지금이면 한참 식사 중일 게야.”
“알겠습니다. 좀 있다 뵙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단연경이 밖으로 나가다 문득 멈춰서더니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냥 여기서 좀 먹으면 안 될까요?”
“허허허. 공항은 조금 전에 무림맹에 일이 있어 떠났다. 그러니 걱정 말고 가 보거라.”
“그렇습니까? 하하하! 오랜만에 친구들과 인사 좀 나눠야 될 테니 너무 기다리진 마십시오. 시간 좀 걸릴 수도 있습니다.”
“오냐.”
보무도 당당하게 식관에 들어선 단연경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반위 사형! 국진 사형!”
삼삼오오 모여 아침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제법 시끄러운 분위기였지만 이렇게 크게 말하는 경우는 없어 단숨에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걸 느낀 단연경은 크게 웃으며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여어, 종남파의 사형, 사제, 그리고 친구들 정말 오랜만이야. 나 전진의 단연경이다! 잘들 지냈나?”
식관은 일순 조용해졌다. 그리고 한 방에 시장통마냥 시끄러워졌다.
“단 사형!”
“문제아!”
사방에서 몰려들며 한마디씩 했고, 단연경은 크게 웃으며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식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목유청과 종남파의 장로들은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허허허. 오늘 오전 수련은 넘어가 주는 게 어떤가?”
“그렇게 하지요. 십수 년 만에 해후인데 그 정도는 해 주는 게 어른으로서의 도리겠지요.”
“다른 사제들은 어떠신가?”
“저희도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보기 좋은 모습 아닙니까?”
“자, 그럼 우리도 오랜만에 옛이야기나 좀 해 보세. 저 모습을 보니 과거 옥허 사형과 신나게 뛰놀던 시절이 생각나는구먼.”
“그럴까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