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오전 수련이 취소되었단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 식관은 그야말로 난리였다.
이제 나이들이 차서 각자의 길을 떠나기 위해 외부로 나가거나 적전으로 선발되어 문파에 남아 다음 대 제자들을 볼 나이들이 되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십대의 어린 시절처럼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래서 곽 사형이 근엄한 얼굴을 하고서는 악적들을 꾸짖고 돌아서 그 아리따운 소저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는데 그 소저가 얼굴이 빨갛게 되며 고개를 돌리지 뭡니까?”
“오호라, 현우한테 반했나 보구나.”
단연경이 맞장구를 치자 사내는 고개를 강하게 흔들며 말했다.
“그게 아니고 그 악적들과 싸우던 중에 가랑이 쪽이 찢어졌던 게지요. 그래서 중요 부위가 슬쩍 보이지 뭡니까?”
“뭐야? 푸하하하!”
“그걸로 그 소저와는 영원한 이별을 고했지요. 하하하!”
폐관 수련을 하는 동안 그와 함께 뛰어놀았던 이들은 다 강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강호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단연경은 열심히 맞장구를 치며 듣고 있었다.
“그런데 현우는 어디 갔는데 안 보이는 거지?”
“현우는 장문 사백의 명을 받들고 여산오흉(廬山五凶)이란 녀석들이 날뛰어 그 녀석들 잡으로 사제들과 함께 갔다. 이틀 전에 잡았단 소식이 들어왔으니 아마 며칠 안에 돌아올 게야.”
국진의 말에 단연경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녀석 실력이 좀 늘었나 보죠? 사제들을 데려간 거면 그 녀석이 대장인가 본데…….”
“하하하! 그 녀석 실력이야 우리 중에 최고지.”
국진의 말에 단연경이 짐짓 놀란 척하며 주위를 돌아봤고 모두 긍정의 눈빛을 보냈다.
사실 곽현우는 어려서부터 종남파의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재목으로 지목받아 올 만큼 두각을 나타냈었다. 그리고 성격도 시원시원해 누구 하나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어른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는 남달랐다.
물론 어릴 때 단연경과 가장 많은 사고를 쳤고, 덕분에 혼나기도 엄청나게 많이 혼났지만 말이다.
“자식, 맨날 사고만 치더니 많이 컸네.”
단연경의 말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사방에서 아우성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네놈이 할 말이냐?”
“사형 때문에 곽 사형이 고생한 게 어딘데 말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떠드는 사이 점심 시간이 되었고, 다시 신나게 식사를 했다. 그리고 오후 수련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기에 단연경은 목유청을 찾아갔다.
“자, 이게 옥허 사형이 네가 오면 전해 주라 했던 서찰이다. 읽어 보거라.”
“예.”
서찰 봉투는 잘 봉합되어 있었다.
사실 단연경과 그의 사부 옥허는 종남파와 같은 사문처럼 지내 오고는 있다지만 엄연히 다른 문파였다.
물론 따지고 보면 한집안이 맞다고 할 수도 있었다. 과거 전진교가 세워지고 위세를 떨칠 무렵 종남파는 아주 작은 무도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전진교의 속가제자들 중 일부가 이곳에 정착하며 문파를 발전시킨 것이 오늘날 종남파의 시초라 할 수 있었다.
속가제자들에 의해 발전하다 보니 전진교의 교리는 빠졌고, 내공심법도 전진교의 정통 심법과는 차이가 생겨났다. 당연히 무공도 달라져 있었다.
변질되었다지만 전진교는 연경에 남아 있다. 하지만 전진칠자 등이 활동하던 시절의 전진교와는 차이가 상당했다. 교리도 변질되었고, 무공도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그렇지만 구처기의 마지막 안배를 통해 전진교의 원류를 지키고 있는 소수가 있었는데, 무공은 단연경에게 교리는 그의 사형 도진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역사로 인해 종남파의 초기부터 중양궁터에 자리 잡은 전진의 제자들과 사형제라 칭하며 스스럼없이 지내 왔던 것이고 지금도 그리 지내고 있는 것이었다.
서찰을 꺼내어 읽은 단연경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옥허로부터 대략의 계획을 들었던 목유청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무난한 반응에 의외라 생각하며 물었다.
“뭐라 써 있는데 그런 표정을 짓는 게냐?”
“별말 안 써 있습니다. 다만 말이 조금 이상스러워서요.”
단연경이 서찰을 건네주자 목유청은 빠르게 내용을 읽어 나갔다.
우선 대성을 하고 출관한 걸 진심으로 축하하고 사부로서 네가 정말로 자랑스럽구나. 아마 선대의 진인들께서도 크게 기뻐하며 대견스러워하실 게야. 이 사부는 네 사형인 도진과 함께 초대 장교 진인이셨던 중양 진인의 유적을 찾아 떠난다. 아마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니라. 그래서 너에게 이 사부가 남겨 둔 게 있으니 가서 인수하도록 하거라. 그것은 하남 낙양에 있는 금화장(金華莊)의 장주에게 맡겨 두었으니 찾아가 내 제자라 하고 네 이름을 말하면 바로 인계할 것이야. 그리 어려운 게 아닐 테니 잘 처리하리라 생각한다. 과거 현우와 가출해서 섬서성을 발칵 뒤집어 놓으면서 강호 경험을 제대로 했을 테니 너라면 할 수 있을 게야. 이 사부와 네 사형 걱정은 하지 말거라. 그래도 전진교의 후인으로서 이 한 몸 지킬 정도의 실력은 되니 말이야. 어쨌든 인계가 잘되면 도관에서 기다리던지 아니면 종남파에 어디 있다고 말만 해 두거라. 알아서 찾아가도록 하마.
서찰을 다 읽은 목유청은 단연경의 반응이 왜 그랬는지 이해했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글쎄다. 특별히 이상한 건 못 느끼겠는데…….”
“그런가요?”
단연경은 계속 갸우뚱거렸지만 그런 내용을 쓰게 된 뒷배경을 알지 못하는 한 절대 이해 못할 말들이었다. 그리고 그 뒷배경을 목유청은 옥허에게 들어 잘 알았기에 웃음을 힘들게 참고 있는 것이었다.
“어찌할 테냐?”
“어쩌긴요. 할 것도 없는데 가 봐야죠. 보아하니 사부님께선 제가 나오면 한바탕 난리칠 걸 예상하고 멀리 도망친 것 같으니 천천히 다녀오도록 해야겠습니다. 세상 구경도 좀 하고요.”
“그래. 그것도 좋은 결정인 것 같구나. 경험만큼 좋은 재산도 없는 것 아니겠느냐?”
“예.”
“언제 갈 생각이더냐?”
“음……. 내일 바로 떠나도록 하죠. 제가 워낙 노는 걸 좋아해서 여기서 있다 보면 가기 싫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또 지금 제가 있어 봐야 조만간 제자들이고 독립도 해야될 사형제들한테 도움도 못되구요.”
“허허허. 그런 것까지 생각하다니 확실히 세월이란 게 흐르긴 했나 보구나.”
다음 날 식관에서 아침을 해결하며 모두에게 떠난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모두 아쉬워하며 그를 정문까지 바래다 주었다.
“한동안 다녀올 테니 보고 싶다고 울지들 마.”
“이놈아, 누가 너 같은 녀석을 보고 싶다고 울겠냐?”
반위가 아쉬운 얼굴로 그리 말하자 단연경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알겠소. 그럼 나중에 봅시다. 반 사형.”
“강호에 나가서 또 옛날처럼 들불 맞은 소마냥 날뛰지 말고.”
“푸하하하!”
국진이 현우와의 소싯적 가출 후 사고를 빗대어 말하자 단연경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웃지 마! 거 소싯적에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좀 요란스럽기는 했지만 어쨌든 섬서를 어지럽혔던 그 악당들을 추살했잖아.”
“자, 그만들 하거라.”
목유청의 말에 주변이 좀 조용해지자 단연경에게 다가와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제법 두툼한 봇짐과 함께 말고삐를 건네주었다.
“옥허 사형께서 떠나시기 전에 부탁했던 것들이다.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과 약간의 노잣돈, 그리고 천하 정세에 대해 정리해 둔 책자이니라.”
“이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말은 그리했지만 밤새 고민했던 부분이 한 방에 해결되었기에 봇짐과 말고삐를 냉큼 받아들었다.
“허허허.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더냐?”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래. 특히 정세에 관한 책자는 잘 보아야만 한다. 너도 아이들과 얘기를 하며 들었겠지만 네가 폐관 수련하는 동안 천하가 무척이나 많이 바뀌었다. 몽고 달자 놈들을 쫓아내고 다시금 제대로 된 황실이 세워졌다. 당금의 황실이 민초들의 어려움을 덜어 주고자 이러저러한 정책을 펼쳐 많이 좋아지고는 있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이 어수선하긴 하다. 변방에선 지금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고, 중원에선 패악질을 일삼는 무리들이 도처에서 날뛰고 있어 자칫 쓸데없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으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사숙의 말씀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오냐.”
목유청은 진중한 말과 몸가짐을 보며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단연경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며 말했다.
“몸가짐을 바로해 당당함을 유지하고, 일을 행함에 있어 깊이 생각해 실수와 후회를 만들지 말거라. 또한 많은 이를 만나고 좋은 벗을 사귀거라. 흠흠…… 무엇보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말고 건강하게 지내다 와야 하느니라. 알겠느냐?”
따스함이 절로 느껴지는 말이었다.
“예. 사숙. 그럼 몸 건강히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종종 연락하고.”
그렇게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말에 오른 단연경은 강호로의 첫발, 아니, 두 번째 발을 내디뎠다.
2. 봉인해제!!!
출발하기 전에 이미 경로는 잡아 놓고 있었다. 장안에서 늘 꿈꿔 왔던 모습을 갖추기 위해 흰 무복과 섭선을 장만해 걸치고 움직였다.
사실 검도 백색으로 겉을 칠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래 봤자 시간이 지나면 벗겨질 테고 그럼 모양세가 더 안 좋을 것 같기도 했고, 검은색의 검이 백의와 생각 이상으로 잘 어울려 그냥 넘어갔다.
어쨌든 폐관 중 꿈꾸던 강호 미남 협객의 모든 걸 갖춘 단연경은 기분 좋게 관도를 따라 이동했다.
장안에서 빠져나오고 첫날은 정말 최고였다. 육 척에 이르는 훤칠한 키에 탈태환골에 의한 적당한 근육질의 몸매, 남성미가 흐르는 외모와 이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짧은 수염.
백의와 섭선에 검까지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 멋진 외모였고, 지나가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에게 최소한 한 번 정도는 눈길을 주었다.
개중에는 잘생겼다나 멋지다는 말을 속삭이기도 했으니 단연경이 안 좋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기분 좋은 첫날이 지나가고, 노숙을 한 후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예상치 못한 문제점을 발견했다.
바로 기분을 최고로 만들어 줬던 백의였다. 관도에서 먼지가 알게 모르게 묻고, 노숙중에 또 다른 게 묻는 등 백의에 하룻만에 때와 얼룩이 보였다.
어제의 그 깨끗했던 백의에 은근히 때가 묻고 나자 오히려 다른 옷들보다 더 지저분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리 크게 지저분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하루 더 입었다. 하루 종일 조심도 했고, 내력을 조절해 몸에 먼지가 묻지 않도록 주의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렇게 둘째 날이 지나가고 셋째 날 아침에 일어나 백의를 보니 언제 묻었는지 때가 더 생겨나 있었다.
전체적인 느낌상 이대로 입으면 꾀죄죄한 모습과 더불어 오래된 낙방 서생마냥 보일 가능성이 다분했다.
“젠장, 역시 소설은 소설일 뿐이로구만. 고작 이틀 입었는데 이리 더럽게 보이다니. 그렇다고 매일 아침마다 빨아 입는 것도 못할 짓이고. 언제나 티끌 한 점 없는 백의라고? 에라이!”
현실과 소설의 괴리를 처음으로 느낀 단연경은 잠시 고민을 하다 그냥 목유청이 챙겨 준 청의로 갈아입었다.
“잘 뒀다가 특별한 날이나 큰 도성에 들어갈 때나 입어야지.”
역시 쉽게 백의를 포기할 순 없었다.
매일 백의를 입지 못한다는 작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기분 좋은 여행이었다.
간혹 작은 규모의 상단도 보았고, 싱그러운 봄날의 관도는 십오 년이나 그리 넓지 않은 골짜기에 갇혀 지냈던 단연경에게 즐거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런 즐거운 날도 나흘을 넘기지 못했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한 손으로 살살 부채질을 하고 다른 손엔 정세 정리집을 들고 보며 말의 움직임에 맞춰 이동하고 있었다.
두두두.
멀리서 상당히 묵직한 소리와 함께 제법 화려한 마차 한 대와 이를 호위하는 이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단연경은 그냥 급한 일이 있나 싶어 옆쪽으로 비켜섰다. 잠시 후 그 행렬이 스쳐 지나갔고 뿌연 먼지가 뒤를 덮었다.
“으익…….”
호신강기 정도는 아니었지만 기를 일으켜 먼지를 뒤집어쓰진 않았지만 기분이 나쁜건 어쩔 수 없었다. 보통 이렇게 가면 최소한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하는 게 예의였다.
“저런 싸가지 없는 놈들을 봤나. 에잇! 가다 바퀴나 빠져 버려라.”
이만한 일로 쫓아가 주먹다짐을 하는 건 무리가 있었기에 그냥 벌써 저만치 멀어진 무리를 향해 작은 저주를 해 주고는 다시 한들한들 이동했다.
정세 요약집의 내용이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사서삼경이나 도교경전처럼 난해한 게 아니었기에 어느새 마지막 장을 넘겼다.
더 이상 볼 게 없어진 단연경은 주변 풍광과 자연을 즐기며 가다 이내 봄바람에 취해 꾸벅거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렇게 꾸벅거리며 가던 단연경은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깜짝 놀라 깬 단연경은 크게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아으. 몽고 놈들은 말 위에서 잘만 자던데 난 안 되네. 자, 날도 좋고 졸음도 오고 하니 기분도 풀겸 한 번 신나게 달려볼까나. 히야!”
일단 달리기 시작하자 또다른 상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각여를 신나게 내달려 산허리 하나를 돌아섰을 때 멀리에 아까 보았던 화려한 마차 일행이 눈에 들어왔다.
단연경은 속도를 줄일까 하다 주변 풀과 나뭇잎의 흔들림을 보고 방향을 가늠한 뒤 그대로 내달렸다. 그러다 대략 오 장 정도까지 가까워졌을 때 급히 말을 멈추었다.
쏴아아!
말을 급히 멈추며 더 많은 먼지가 일어났고 그 먼지는 바람을 타고 멈춰 있는 화려한 마차 일행을 완전히 뒤덮었다.
‘후후후. 어떠냐 이놈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