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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결국 후인동 등은 배 위에 오른 복면인들을 상대해야 했고,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나머지 복면인과 시커먼 얼굴의 사내도 배 위에 올라섰다.
순식간에 배 위에서 난전이 벌어졌다. 후인동, 판태발, 계도식을 제외하고는 인원수가 더 많음에도 모두가 간신히 버티는 수준이었다.
난전이 벌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표사들의 태반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나마 숫적 우위로 버티던 보표들도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전력 차가 벌어지자 복면인들 두 명이 빠져나오더니 면사 여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녀를 호위하던 보표들이 이들의 검을 가로막자 그중 하나가 살짝 물러나더니 선창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
이를 본 면사 여인은 탄식을 흘렸다. 선창 아래에는 무공을 모르는 이들 뿐이었는데 복면인이 들어갔으니 모두 살해당할 거라 생각해서였다.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있던 보표들은 복면인 하나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제 막 검을 섞었음에도 둘 다 두어 개의 상처가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하지? 이대로 있다가는 모두 죽을 텐데…….’
그녀는 쉽사리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 죽이려 하고 있으니 협상이고 뭐고 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협상이란 게 상대가 좋아할 만한 패가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그녀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그나마 선전하고 있는 판태발의 등에 허점이 드러났고 복면인은 이를 놓치지 않고 공격했다.
“크흑!”
급히 회피 동작을 하며 피해 치명상은 피했지만 등에는 긴 검상이 나며 자세가 흐트러졌다. 복면인은 검을 회전시켜 허점을 연속적으로 파고들었고, 판태발은 최소한의 동작으로 검을 피했다.
복면인의 검은 판태발의 옆구리에 다시 한 번 상흔을 남겼지만 그로 인해 중심이 무너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멍청한 새끼!”
그 말과 함께 재빨리 몸을 회전시키며 복면인의 목을 잘라 버렸다.
복면인의 목을 친 판태발은 다시 등에 허점이 드러나며 위험해지자 급히 몸을 굴려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 복면인들을 상대해 나갔다.
가문의 무인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판태발이 위험을 넘길 때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상대가 좋아할 패!’
생각이 나자 그녀는 지체없이 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움켜쥐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그녀였지만 그래도 호신을 위해 혹은 자결을 위해 품에 지니고 다니던 단도였다.
길이라고 해 봤자 손잡이를 포함해 손바닥만 했고, 폭도 손가락 두 마디 정도도 못되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목숨을 끊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착!
단도를 뽑은 그녀는 목의 경동맥 쪽에 가져다 대고는 외쳤다.
“그만!”
멀리서 싸움판을 보며 실실 웃고 있던 시커먼 사내는 그녀의 외침에 시선을 돌렸다 눈살을 찌푸렸다.
“보고는 받았지만 혹시했는데, 진짜 피곤한 계집이로군.”
작게 중얼거린 시커먼 사내가 짧게 휘파람을 불고 외쳤다.
“휘익! 모두 물러서!”
난전 중이었지만 복면인들은 쉽게 빠져나왔다. 그만큼 훈련이 잘되어 있었고, 또한 실력 차도 뚜렸했던 것이다.
복면인들이 물러서자 상황이 드러났다.
대표두를 포함해 표사 스무 명이었는데 모두 죽어 있었고, 보표가 후인동 포함 열다섯이었는데 고작 여덟 명만 살아남았다. 그나마 후인동, 판태발, 계도식이외에는 더 이상의 전투는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중상으로 신음을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에 반해 복면인들은 총 열여덟 명이었는데 죽은 자 넷에 중상자 둘뿐이었다. 모두 후인동, 계도식, 판태발에게 당한 자들이었다.
이 모든 일이 고작 반 각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일단 복면인들이 물러나자 후인동은 재빨리 면사 여인 앞쪽으로 움직였고, 나머지도 따라 움직였다.
후인동도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계도식과 판태발을 보며 입을 열었다.
“괜찮으냐?”
“대주께선 이게 괜찮아 보이십니까요?”
판태발이 피에 절은 얼굴로 씨익 웃어 보이자 후인동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말하는 걸 보니 아직은 살 만한가 보구나.”
“나름 정이 있어 보이는구먼. 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갈 거야.”
시커먼 얼굴의 사내가 후인동 등에 가려 잘 안 보이는 면사 여인을 보기 위해 몸을 좌로 기울이며 말했다.
“아직도 그 칼을 대고 있나?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시나. 일단 칼 좀 치우고 얘기하자고.”
“내 요구를 들어주면 칼을 치우죠.”
“좋아. 한 번 말해 봐라.”
“지금 남은 이들 모두의 신변을 책임지세요.”
그녀의 말에 시커먼 사내는 자세를 바로하더니 뒤에 서 있는 복면인들과 죽임을 당한 복면인들을 차례로 본 후 입을 열었다.
“안 돼. 너희가 왜 이 지경인지 알잖아? 그것에 대해 알려져 봤자 피곤하니 그냥 다 죽이는 게 편해. 찌르고 싶으면 찔러. 치료하면 되니까.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가장 황홀하고 짜릿한 경험을 못하게 되서 후회할 거야. 흐흐흐…….”
그러면서 시커먼 사내는 허리를 앞뒤로 두어 번 튕겨 보였다.
마지막 패도 먹혀들지 않고, 오히려 말로서 희롱당하자 그녀의 할아버지로부터 봉인당한 모습이 터져 나왔다.
“나이를 똥구멍으로 처먹었나, 하는 말 하고는. 붕알을 확 까서 콧구멍을 막아 버릴까 보다!”
3. 아, 이게 아니잖아
“……!”
판태발과 계도식이 했던 것보다 더한 충격이 배 안에 휘몰아쳤다. 가문 어른들에 의해 봉인되어진 모습이 터져 나오자 가벼운 한숨과 함께 후인동 등은 고개를 떨구었고, 시커먼 사내는 어정쩡한 자세로 입을 쩍 벌린 채 서 있었다.
잠시간의 정적…….
이 묘한 정적은 금방 깨졌다.
쿠당탕!
선창으로 가는 문을 부술 듯 열고 나온 단연경은 난간으로 뛰어가 내장까지 뱉어 내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의 토악질을 해댔다.
“우에에에엑! 켁켁!”
몸을 난간 밖으로 반 정도 빼고 어마어마한 토악질을 하던 단연경은 겨우 진정이 됐는지 무너지듯 난간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어찌나 심한 토악질이었는지 눈은 충혈되고 눈물마저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그렇게 늘어져 숨을 고른 단연경은 의지와는 관계없이 흘러나온 눈물을 닦으며 투덜거렸다.
“그냥 처음부터 위로 올라올 걸 괜히 그놈의 책대로 했다가 쓸데없는 희생만 키웠잖아. 백의부터 현실과 괴리가 있는 걸 인정하고 따라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망할…….”
이틀간 뱃멀미와 조금전의 격한 토악질로 가뜩이나 초췌해 보이는 데다 소설 따위를 보고 무림의 환상을 쫓아 나온 초출로 보이자 시커먼 사내는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이놈의 배에는 이상한 놈들이 왜 이리 많아?”
“방귀 뀐 놈이 성질낸다고 허락도 없이 배에 오른 놈이 어디서 짜증이야?”
단연경이 힘겹게 일어서면서 곧바로 말을 받아치며 말하자 시커먼 사내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런 천둥벌거숭이를 보았나? 저 새끼도 산채로 잡아! 저 자식 껍질을 벗겨 물고기가 천천히 뜯어 먹게 해 줄 테니까.”
“존명!”
복면인들에게 다시 공격 명령을 내리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지만 그 손은 내려오지 않았다.
단연경이 두리번거리더니 한쪽에 떨어져 있던 검을 향해 손을 뻗자 검이 실에 끌리듯 손으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걸 보고 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한 게 아니었고 그 다음 동작 때문이었다.
검을 잡기 직전 단연경이 뻗었던 손바닥을 앞쪽으로 보이게 움직이자 검이 허공에서 그대로 멈추었다.
“검신이 망가졌잖아.”
그렇게 말하며 손짓을 하자 검은 그대로 바깥쪽으로 날아 강에 떨어져 내렸다.
단연경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을 향해 손짓을 했고 그에 따라 검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떨어지고 떠올랐다 떨어지고를 반복했다.
그러다 그중 하나가 둥실 떠올라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좋아. 괜찮군.”
자신감과 여유가 넘쳐흐르는 자세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시커먼 사내와 후인동 등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허공섭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검을 당겨 잡는 건 일류급 중간 단계만 되도 가능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을 방금처럼 허공에서 제어하는 건 절정급에서도 쉽게 구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허공섭물이란 게 신외(身外)의 기를 제어하는 기술인데 그걸 중간에 임의로 조정한다는 것은 그만한 집중력과 기에 대한 높은 이해 및 제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 초고난위도의 기술을 마치 손으로 직접 만지는 것처럼 구사했다는 것은 단연경의 실력이 최소한 절정급에서도 최상위에 해당한다는 방증이었다.
죽자고 수련을 하면 일류급의 최상위까지는 가능하지만 깨달음이 병행되지 않는 한 절정의 반열에는 올라서지 못한다.
즉, 이때부터 육체 수련만큼 심상 수련도 중요해지게 되는데 심상 수련 정도에 따라 같은 절정의 반열 간에도 꽤 큰 실력 차가 보이게 된다.
같은 일류급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지만 절정급부터는 실력 차가 확연하게 나타난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이제 겨우 절정의 반열에 올라선 시커먼 사내나 절정의 반열에 이르기 직전인 후인동으로선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단연경의 출현에 시커먼 사내는 일이 틀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후인동은 면사 여인을 지켜 낼 수 있겠다는 안도감을 갖게 되었다.
“누구냐 넌?”
시커먼 사내가 굳은 얼굴로 묻자 단연경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정의를 지키는 협객이지.”
그 한마디에 찬바람이 불며 양쪽 다 얼어붙어 갔다.
단연경은 언제고 한 번은 꼭 해 보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책하고는 완전히 다른 반응과 스스로도 전혀 멋지지 않을 뿐더러 낯도 간지럽고 손발이 오글거려 오자 다시금 소설 작가에 대한 저주를 퍼부었다.
‘이런 빌어 처먹을 작가 같으니라고. 내가 미쳤지. 그 창피를 다 당하고도 그걸 그새 잊어 먹고 또 소설대로 하다니. 조심하자, 조심해.’
잠시 생각을 할 때 봉인이 풀린 면사 여인의 입에서 가슴을 후벼파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생긴 건 멀쩡해 가지고 돼지 콧구멍 파다 코피 쏟는 말을 뱉어 내고 그래.”
그 말에 단연경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이봐. 지금 난 당신을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거든? 아까도 그 창의적 욕설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무슨 놈의 여자애 입이 그 모양이야.”
그 말에 면사 여인의 아미가 상큼하게 솟아올랐다.
“내가 말을 어떻게 하든 무슨 상관이야?”
“무슨 상관은, 그 기가 막힌 말의 상대가 나잖아.”
“흥!”
면사 여인이 고개를 돌려 버리자 단연경은 그녀를 한 번 날카롭게 쏘아보고 한마디 더해 줄까 하다 말았다.
그녀의 이마의 한쪽이 푸르딩딩한 작은 혹을 발견하고 자신의 작은 저주가 제대로 먹혀들었다고 생각하며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주기로 결정했다.
그녀와의 일을 간단히 마무리한 단연경은 표정을 가다듬은 후 근엄하게 말했다.
“아까 건 농담이고, 난 전진파의 단연경이다.”
“어디에 누구?”
시커먼 사내가 갸우뚱했다. 무림의 이름 있는 중견 문파까지 꿰고 있었지만 전혀 생소한 이름이어서였다.
그건 후인동이나 면사 여인도 똑같았다.
남송 말엽에 전진칠자 시대에 전성기를 잠시 맞이했을 뿐 그 이후 무림에서의 활동을 포기해 버렸기에 현 무림에선 그 이름이 생소해진 것이다.
“어쨌든 우리 일에 끼어들지 말고 비켜서라. 보아하니 무림 초출인 것 같은데 험한 꼴 당하지 말고 말이야.”
시커먼 사내의 말에 단연경은 어이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아까 안에 뛰어들었던 놈은 모조리 죽어 줘야겠다고 하던데?”
시커먼 사내는 분명히 죽어 버렸을 수하에게 욕지기를 해댔다.
‘병신 같은 새끼. 그런 쓸데없는 소리나 해대다니.’
“최대한 붙잡고 늘어져라. 나는 저년을 생포한다.”
전음으로 명을 한 후 손짓을 하자 복면인들이 일제히 공격을 가했고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시커먼 사내도 동시에 움직였다.
시커먼 사내의 계획은 단순했다. 고작해야 이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단연경이었지만 워낙 강해 보였기에 직접 충돌은 피하고 최초의 목적이었던 여인을 인질로 삼는 것이었다.
정파의 인물들은 인질이 생기면 쉽게 덤비지 못하는 생리를 이용하려는 속셈이었다.
복면인들이 동시에 덤벼들자 단연경과 후인동은 급히 맞서 나갔다.
구석 쪽으로 면사 여인을 보내 방어선을 좁히고 대결을 하자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시커먼 사내의 예상대로 단연경의 검법은 무지막지하게 위협적이었다. 그와 수하들 중 최고인 녀석 둘까지 합쳐 셋이 협공을 가하는데도 오히려 수하 중 하나의 목이 날아갈 뻔했다.
‘그렇다면…….’
시커먼 사내는 생각을 바꿔 뒤로 살짝 빠져 다른 수하에게 빈자리를 매꾸게 하고 자신은 이들 중 가장 약한 판태발 쪽으로 가 공격을 가했다.
“크흑!”
멀쩡했어도 상대가 되질 않았는데 부상과 체력적 부담까지 있었던 판태발은 순식간에 가슴에 큰 상처를 입고 쓰러져 버렸다.
시커먼 사내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면사 여인을 낚아채려 손을 내뻗었다.
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