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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묘한 대치 상황이 계속되다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러니까…….”
“먼저 말하시오.”
“그쪽이 먼저 말해요.”
양쪽 모두 나름의 예의를 지키며 말하다 그녀가 먼저 말하기로 했다.
어쨌든 잘못한 것의 우선순위는 그녀였으니까.
“아까 낮에 오해해서 때린 건 미안해요. 그리고 조금 전의 일도 제가 먼저 도발한 셈이니 사과할게요. 그냥 없었던 걸로 하죠.”
원래 눈을 맞추고 고개를 숙여 보여야 상대에게 진의를 제대로 전달한다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고 또 잘해 왔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단연경에게는 머리와 몸이 따로 움직이는 난감한 상황이 이어졌다. 역시 이번에도 그녀는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고, 단연경의 눈에는 당연히 마지못해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먼저 다가온 것 자체가 사과를 위해서임을 느끼고 있었기에 받아 주기로 마음은 정했다.
다만, 책에서처럼 그냥 대범하게 받아 줄 것인지 아니면 이 부분에 대해 몇 마디 말을 해 주고 받아 줄 것인지 고민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평소답지 않게 주의 집중력이 떨어져 있다 마음이 좀 안정되자 못 보았던 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얼굴도 수척해 보이는 데다 꺼칠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잠깐 호흡이 끊어지고 체온이 조금 떨어졌었던 것 때문에 이 정도까지 오진 않는다. 아까 낮부터 들렸던 울음소리와 그를 달래는 이들의 말소리를 얼핏 들었기에 심적 고통에서 온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행동이 좀 돌출되고 입이 험해서 그렇지 수하들에 대한 마음은 진실되어 보였고 마음도 착한 듯싶었다.
확 쏘아 줄까 하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단연경은 그냥 깔끔하게 받아 주기로 했다.
“좋소.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
그걸로 끝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또다시 묘하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단연경은 조용한 것에 익숙했다. 혼자서 십오 년을 지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이 어색한 침묵은 참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녀와 더 있다가는 또 실수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흠흠. 할 말 없으면 난 들어가겠소.”
단연경이 선창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녀는 그걸 말리고 싶었다.
‘그런데 왜 말리고 싶은 거지?’
스스로에게 반문했지만 답을 알 리가 없었다. 알면 반문도 안 했을 테니까.
잠시 멈칫거리는 사이 단연경이 그녀의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더 지체하면 그가 사라져 버릴 것이었다.
“그쪽은 나한테 할 말 없어요?”
일단 아무 말이나 던졌다. 그런데 역시 아무 말이란 게 문제였다.
“……?”
단연경은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과도 받았고, 조금 전 말을 좀 까칠하게 한 것도 없었던 일로 하자 했으니 무슨 말을 할 게 있겠는가.
그녀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 단연경이 물어보면 해 줄 말이 필요했다. 즉, 단연경에게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그녀가 말해 줘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래요. 아무리 그래도 그쪽도 나한테 사과를 해야죠.”
“…….”
단연경은 여전히 무슨 말이냐는 듯 바라보았다.
“후 대주한테 얘기 들었어요. 그쪽이…….”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결국 될 대로 되란 식으로 말을 이어 갔다.
“내 가슴도 만지고 입맞춤도 했다면서요.”
‘아,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미쳤어, 정말.’
속으로 통곡을 했다. 하지만 이미 기호지세(騎虎之勢)였다.
“심장도 멈추고 호흡도 멈춘 상황에 이를 회복시키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소. 예를 따진다고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지 않소?”
“그래도 처녀 몸을 만졌으면 미안하다, 이해해 달라 정도는 해야죠. 또, 아까도 그래요. 여자한테 그렇게 막말을 던졌으면 아무리 내가 없던 걸로 하자고 해도 미안하다는 말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억지였다. 단연경은 억지란 걸 알았지만 그녀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의로운 협객은 언제나 대인배의 모습을 보여야지.’
“경황 중인지라 그런 예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었소. 그러니 이해해 주십시오. 그리고 아까 험한 말한 것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오이다. 에…….”
사과를 하던 단연경이 그녀를 보며 멈칫거리자 그녀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예수란(藝秀蘭).”
그러자 단연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 소저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단연경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해 버리자, 억지를 부리며 그를 붙잡았던 그녀는 무안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젠장, 망할 놈.”
더 이상 단연경을 잡을 수 없게 되어 버리자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그에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수십 장 밖에 떨어지는 낙엽 소리도 들을 수 있는 단연경이 그 말을 못 들을 리가 없었다.
단연경은 괜히 계속해서 시비와 비방을 하자 날카롭게 예수란을 바라봤다. 그러자 예수란은 찔끔하며 고개를 돌렸다.
예수란이 고개를 돌리자 단연경은 다시 선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아지 새끼도 아니고 무슨 놈의 귀가 저리 밝아.”
다시 들려오는 작은 중얼거림. 우뚝 멈춰 선 단연경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예수란의 앞으로 다가와 그녀를 노려보았다.
예수란의 키는 여자치고는 큰 편으로 오 척 육 촌 정도 되는 키였다. 그래서 단연경이 노려보자 그녀도 지지 않고 노려보았는데 그 모습이 약간 턱을 치켜든 상태여서 굉장히 도도해 보였다.
“내 어지간하면 참고 넘어가려 했는데, 도대체 말하는 게 되먹질 못해 먹어서 버르장머리를 고쳐 줘야겠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이성적 판단하에 냉정하게 대처해 왔던 그녀는 자꾸만 감정적으로 행동하며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상한 짓을 하는 자신에 대해 짜증이 났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하게 만든 것도 싫었고, 그걸 못 알아차리는 것도 싫었다.
물론 그녀의 입장에서 말이다.
어찌 되었든 그런 상황에 단연경이 뭐라 하자 반사적으로 앙칼진 모습이 나타났다.
아무리 영리하고 잘 훈련되었다고는 하지만 처음으로 겪는 오묘한 자연의 섭리 앞에서 아직 그녀는 어렸던 것이다.
“웃기시네. 그쪽이 뭔데 내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네 마네 하는 건데?”
“생명의 은인이니까. 기껏 힘들게 살려놨는데 그딴 버르장머리로 돌아다니다 맞아 죽을까 봐 그런다. 왜?”
“그쪽만 아니면 내가 이러지도 않거든? 어디서 되도 않는 말라비틀어진 개똥 같은 논리를 갖다 붙이는 거야?”
정말 신선한 비유였다. 또한 여인의(그것도 젊고 엄청나게 예쁘기까지 한) 입에서 나오니 더더욱 신선하다고 생각한 단연경이었다.
‘책에서 보면 이렇게 욕먹으면서 좋아하면 변태 중에서도 상변태라던데. 나 변태 기질이 있었던 건가?’
잠시 뻘 생각을 하다 단연경은 입을 열었다.
“너 몇 살이야? 도대체 어디서 그런 말을 배운 거야?”
“나? 스무 살이다.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가 하는 말 보고 배운 거다 왜?”
어려서 가정 혹은 사문에서의 교육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끼며 단연경이 말했다.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말하는 것 보게. 내가 올해 나이가 서른둘이거든? 존댓말 써라.”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으르렁거리자 멀리 서 있던 후인동은 창피해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들어가서 모두 쉬도록 하게들. 배는 내가 받겠네. 어서.”
급히 배 위에서 일하던 쟁자수와 선원들을 선창으로 내려보내고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유치찬란한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보며 한숨을 내쉬는 후인동이었다.
‘아가씨의 저런 모습 보는 것도 오랜만이구만. 그나저나 저 사내 나이가 서른둘이나 된다고? 그냥 보기엔 많아 봐야 서른이 될까 말까 해 보이던데.’
두 사람의 말싸움은 점입가경으로 흐르고 있었다.
봉인이 풀려 있는 예수란의 입에선 다채로운 언어 공격이 쏟아졌고, 단연경은 서서히 표현력의 한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책을 많이 보고 대화를 많이 나눠봤지만 이런 비속어는 배우는데 한계가 있었다.
‘아, 진짜 생긴 건 곱상하게 생겨 가지고 무공도 익히지 않은 게 왜 이리 입이 거칠어. 거칠기로는 손꼽히는 배 사저도 상대가 안 되겠구만.’
일각이 흐르고 나자, 예수란이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붓고 있었다.
단어의 현란한 조합이 엄청난 비속어로 탈바꿈하는 언어공격 속에 정신마저 아득해져가자 단연경이 버럭 소리쳤다.
“그만!”
거의 팔 년 만에 봉인이 풀린 예수란은 한 번 시작하자 그 즐거움에 취해 신나게 쏟아 내고 있다 단연경의 외침에 말을 뚝 멈췄다.
단연경의 이글거리는 눈과 마주친 예수란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렸고 곧 자기합리화를 시작했다.
‘아, 잠시 숨이 멈췄었다고 하더니 그것 때문에 미쳐 버린 걸 거야. 분명해.’
이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수란이 말을 멈추자 단연경이 훈계하듯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가정교육을 받았길래 여자애가 남자도 입에 담기 힘든 말을 마구 쏘아 내는지 모르겠구나.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번에는 단연경이 일방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예수란이 그랬던 것처럼 화려한 단어와 문장으로 그녀를 압박했다.
다만 예수란과의 차이가 있다면 그녀는 기가 막힌 욕설 종류였다면 단연경은 유학(儒學), 도학(道學), 불학(佛學)에 이르기까지 예법과 도리에 관련된 성현들의 가르침을 쏟아 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멀리서 듣고 있던 후인동은 단연경의 말에 혀를 내두르다 이내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란의 말은 나중에라도 써먹을 수 있는 좋은 공부(?)가 되는 것이었지만, 단연경의 말은 강호에 알려진 어떠한 음공(音功)보다도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저게 서생이야, 무인이야?’
후인동은 진심으로 선창으로 내려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호위로서 차마 그러지도 못하고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한편 예수란 역시 단연경의 현란한 문자 공격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걸 느껴야만 했다.
그녀도 어려서부터 우수한 선생들에게 글공부를 했으며, 나름 수재 소리도 들었었다.
그럼에도 처음 듣는 말이 반 이상이었고, 또한 자신이 아는 부분에 대한 설명도 훨씬 더 우수한 것이었다.
어쨌든 무지막지한 문자 공격은 글공부깨나 했다는 예수란에게도 고역임에 분명했다.
“그만!”
결국 참다참다 못 참게 된 예수란이 소리를 질렀고, 그제야 단연경의 말도 멈추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졌어. 그러니까 그만 좀 해.”
“졌다가 아니고. 잘 알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잘하겠습니다. 해야지.”
“그게 그거지. 욕 안 하면 되잖아.”
“내 말을 제대로 이해를 못했나 본데, 욕도 욕이지만 그 말투. 말투가 문제라고. 윗사람에 대한 예의가 전혀 없잖아.”
단연경이 금방에라도 또 문자 공격을 할 듯싶자 예수란은 두 손을 쭉 내밀어 보였다.
단연경의 말이 멈추자 예수란은 귀를 막고는 머리를 두어 번 흔들었다.
그 사이 그녀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오라버니라고 부를께. 됐지?”
“어허, 호칭도 문제가 아니고…….”
“손윗 사람으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서 대하면 되는 거잖아. 그리고 나를 부를 땐 편하게 수아(秀兒)라고 해, 란아라고 하지 말고. 사란(紗蘭) 언니를 부를 때 란아(蘭兒)라고 부르거든.”
단연경은 예수란이 하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남녀 사이에서 오라버니나 자신의 애칭을 알려 주는 것의 의미를 말이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고…….”
“아니고 기고 간에 이제 됐어. 끝. 종료. 알겠어?”
“누구 마음대로 끝이란 거야? 내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잖아!”
단연경은 그저 그녀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멋대로 하는 것처럼 느꼈기에 계속 훈계하려 했다.
하지만 예수란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외간 남자에게 내색하지도, 말하지도 않았던 것을 노골적으로 말했음에도 제대로 못 알아먹는 단연경이 야속하고 미웠다.
생각 같아선 욕을 한마디해 주고 싶었다.
“에라이, 에라이 똥 싸다 풍이나 맞아라. 흥!”
생각이 그대로 입을 통해 전달됐다.
도대체 통제가 안 되는 상황에 예수란은 크게 당황해, 결국 눈물을 글썽거렸다.
또다시 엽기발랄한 말을 내뱉더니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자 단연경은 단연경대로 당황하며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단연경이 인상을 찌푸리며 한 발 물러나자 그것도 자신을 업수이 여긴다는 생각이 든 예수란이었다.
어떻게든 눈물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었지만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분하고 창피해진 예수란은 단연경을 매섭게 노려보다 확 돌아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예로부터 여자의 눈물은 남자에게 가장 확실한 무기 중 하나로 통했다. 아주 큰 죄만 아니라면 잘잘못을 떠나 일단 여자의 눈물 앞에선 거의 대부분의 남자들은 움찔거리게 되어 있었다.
단연경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런 눈물에 왠지 그녀에게 무슨 말이든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든 단연경은 오른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저기…….”
탁!
예수란은 자신의 어깨를 잡은 손을 야멸차게 쳐 내며 소리쳤다.
“놔! 이 꿩만도 못한 변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