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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4. 공부의 신(공부 잘하는 법)
그녀는 이 말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단연경은 멍하니 서서 입만 뻥긋거렸다.
후인동은 예수란이 어렸을 때부터 그러한 모습을 많이 보았었다. 많이 보아 온 자신도 그녀가 저런 모습을 보이면 당혹스러운데 생판 남이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알았기에 가벼운 한숨과 함께 단연경에게 다가갔다.
“단 대협.”
정신적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 여전히 입만 벙긋거리자 재차 불렀다.
“단 대협!”
“에?”
그제야 반응을 보이자 후인동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포권을 취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작은 아가씨를 대신하여 대협께 사과드리겠습니다.”
후인동이 진심으로 사과를 하자 단연경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 예…….”
“평소에는 저러시지 않으시는데, 아무래도 낮에 충격이 과했던 모양입니다.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이해해야겠지요.”
단연경의 행동과 말투에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이 같은 정중함이 보였다.
낮에 보였던 엉뚱함이나 조금 전에 예수란과 말다툼을 하던 가벼움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허……. 이 사람도 작은 아가씨와 비슷한 부류인가?’
“그래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의외로 간단히 일이 마무리됐지만 조금 더 마음을 풀어 줄 필요성이 있었다.
후인동이 아무리 무인이라지만 거대 상가에서 근 이십여 년을 있었기에 그도 상인들의 처세술과 대화술을 몸에 익히고 있었다.
“역시 높은 무공과 깊은 학문을 익히신 분이라 그러신지 마음이 넓으시군요. 실로 존경스럽습니다.”
천하에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심한 무공과 학문을 익힌 것처럼 보였지만, 얼핏 보인 무협 소설을 따라할 정도의 순진한 구석이나 나이에 비해 경박스러운 모습도 있었다.
천하에서 다시 보기 힘든 괴상한 부분이었지만 어쨌든 분명 다른 이들보다 더 큰 효과를 볼 것이라 생각하는 후인동이었다.
“하하하! 아닙니다. 누구라도 저와 같이 행동했을 겁니다.”
금새 환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단연경을 보며 역시나란 생각을 하며 후인동은 말을 이어 갔다.
“그럴 리가요. 대협만큼 사과를 시원스럽게 받아 주는 호방한 사내가 천하에 과연 몇이나 있겠습니까? 아마 대협 같은 분이 많다면 천하에 싸움은 거의 일어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가요? 하하하!”
후인동은 몇 차례 더 그의 호탕함과 낮에 보여 준 높은 무공에 대하여 칭송하였다. 그리고 단연경은 그의 말에 따라 책에서 묘사한 호탕한 젊은 협객의 모습을 취해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단 대협, 정말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성심성의껏 말씀해 드리지요.”
“예. 제 나이가 올해 마흔일곱입니다.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많은 경험을 하고 사람도 제법 만났다고 자부합니다. 그 만난 이들 중에 문무겸전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들도 있었지요. 그런데 그들을 보면 말이 그렇지 실제로는 둘 중 하나는 그저 그런 수준이거나 아니면 둘 다 어중간했습니다.”
단연경은 후인동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알 수 있었다.
“아마 백에 아흔아홉은 그랬을 겁니다.”
잘난 척을 하는 것인가 싶었지만 지금은 궁금함도 있었고 무엇보다 그를 띄워 주기가 목적이었기에 맞장구를 쳤다.
“백에 백 다 그러했었지요.”
단연경은 후인동의 말에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건 후 대주께서 진짜 대단한 분들을 못 봐서 그러셨을 겁니다. 제대로 된 분들이라면 분명 저보다 더 깊은 학식을 지니셨을 겁니다. 그것이 학문이 되었든 종교에 관한 것이든 말이지요.”
“하긴 제가 단 대협 같은 천재들은 못 봤지요.”
“전 천재가 아닙니다. 제가 천재이면 진짜 천재들이 땅을 치고 통곡할 겁니다.”
“그럴 리가요. 그 대단한 무공하며 아까 보여 주셨던 그 학문들……. 범인으로선 꿈도 못 꿀 것이고 기재라 불리는 이들도 결코 그 정도는 못되었습니다. 무공으로나 학문으로나.”
단연경은 후인동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대화를 걸어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이에 비해 아직 세상 경험이 적고 조금 전 같은 여자의 미묘한 심리를 잘 몰라서 그렇지 후인동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사람은 아니었다.
책 속에 세상이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니까.
다만, 후인동을 상대하는 것이 나쁘지도 않았고, 손해 나는 것도 아닌데다 기분도 좋으니 그냥 받아 주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도 대충 넘어가면 되었지만 너무 지나친 건 아니함만 못했기에 정확하게 설명해 줄 필요성이 있었다.
“제가 무공에서 성취를 어느 정도 이룰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공이 좋아서입니다. 뛰어난 내공심법과 상승의 무공을 익혔으니 둔재가 아닌 이상 당연히 어느 정도의 성취는 가능한 것이지요.”
무림에서는 실력의 차이는 무공의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닌 사람의 재능과 숙련도에서 온다고들 한다.
같은 무공을 펼쳐도 고수가 펼칠 때와 하수가 펼칠 때의 위력 차는 천양지차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약한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한 말일 뿐이었다.
실제로 대문파는 계속 대문파이고 삼류문파는 계속 삼류문파일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내공심법 혹은 근육 단련법과 이를 뿜어낼 수 있는 무공의 차이 탓이었다.
내공심법의 차이에 따라 같은 시간을 투자해도 그 효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축기(縮氣)되는 양과 그 기가 정순하게 쌓일 수 있게 하는 정제 기술의 차이 때문이었다.
그러니 명문 대파 출신 젊은이들이 삼류문파의 최강이란 이들보다 더 심후한 내력을 보유하는 것이다.
근육 단련법의 경우도 내공심법과 마찬가지로 효율도 및 발달 정도, 유연성 유지 같은 게 차이가 나게 된다.
무공은 이런 기본적인 힘을 끌어내는 도구 같은 것이다. 도구가 나쁘면 효율이 떨어진다. 즉, 무공이 좋지 않으면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무공이나 외가무공이나 똑같이 적용되는 사항이다.
한마디로 좋은 내공심법과 상승의 무공을 익히면 더 빨리 높은 경지로 쉽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거야 그렇지만 학문은 다르지 않습니까? 두 가지를 동시에 익히는 건 저도 해 보았지만 결코 쉽지가 않았지요.”
“하하하! 맞습니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건 쉽지가 않죠. 무공을 익히느라 체력적 한계에 부딪칠 때가 많고, 또 잘 안 풀리면 그걸 또 고민해야 되는데 책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죠.”
“그렇지요. 가뜩이나 피곤한데 고리타분한 책까지 보려 하면 졸음이 몰려와 도저히 오래 볼 수가 없었지요.”
“사실 저희 사부님은 글을 가르쳐 주시고 기본 경전을 풀이해 준 이후에 그 이상의 학문을 익히란 말씀은 안 하셨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이상은 익히지 못하게 하셨지요. 내공이 약한 상황에 육체 수련에 의한 피로를 운기만으로는 풀 수 없으니 무조건 쉬어야 몸이 상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또 그때 당시 익히고 있는 학문 정도만 해도 사람의 도리를 아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하시더군요.”
후인동은 단연경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고 단연경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 * *
“어릴 때는 무조건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는 게 가장 좋은 것이야.”
옥허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단연경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무공은 왜 그렇게 오래 시키십니까? 그것 때문에 사형이나 현우, 종남파 사형제들하고 노는 시간이 부족하잖아요.”
그 말에 옥허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이놈이? 그냥 죽자고 놀기만 하면 그게 사람이냐?”
“어릴 땐 그러는 거라면서요.”
딱!
머리를 한 대 맞은 단연경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한마디하려다 여전히 매의 눈을 하고 있는 옥허를 보고 말을 삼켜 버렸다.
“잘 들어라 이놈아. 무공이야 어린 시절부터 익혀야 제대로 익힐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내공과 무공은 네 몸을 더욱 건강하게 하고 성장 발육에 더없이 좋은 것이니라. 정신도 맑게 해 주니 앞서 말한 것들 만큼이나 좋은 것이야.”
옥허의 말에 단연경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 옆에 있는 도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물었다.
“제자가 알기로는 무공에도 때가 있듯 학문에도 때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올해 열다섯이고 사제가 열셋입니다. 책에서는 이때에 익힘을 게을리 한 이들은 나중에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다 하였는데 이는 어찌 해석해야 되는 겁니까?”
도진의 물음에 단연경도 그것도 그렇네란 의미를 담아 눈을 반짝거렸다.
“맞다. 모든 배움에는 그 시기라는 게 있어 그때를 놓치면 익힘에 있어 힘이 들게 마련이지. 그래서 도진 네가 본 책에서도 그 시기에 대해 이야기로서 풀어 놓은 것이니라. 허나 배움의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고, 또한 시기마다 배움의 양과 질도 다르니라. 배움의 시기는 기억력이 가장 왕성한 때가 가장 좋고, 더불어 부족함을 스스로 느끼고 그를 채우고자 할 때가 최적기이다. 그전에는 부족함을 느낄 수 있도록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양과 질, 그리고 가르치는 방법을 조절해야 하느니라. 이러한 점을 간과하면 지식 자체를 제대로 쌓지 못하거나 혹은 배움을 통해 지식은 쌓되 지혜가 얕아지고 사고의 한계가 생겨 발전을 하지 못하게 된다.”
아직 배움이 깊지 못한 두 사람은 옥허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눈을 껌뻑거리기만 했다.
그런 제자들을 보며 옥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단연경은 그 미소가 왠지 현우가 난 이런 것도 알고 있다라고 잘난 척할 때 보이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지만 이를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래 봤자 돌아오는 건 알밤일 가능성이 높아서였다.
“천하에는 서너 살부터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열 살 이전에 엄청난 지식을 쌓았다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허나 우리가 아는 명성 높은 이들 중 어려서 천재란 소리를 들었던 이가 과연 몇이나 되느냐? 아니면 천재 소리를 듣던 이들 중에 커서도 이름을 떨친 이들이 또 몇이나 될 것 같으냐?”
“음…… 글쎄요. 딱히 떠오르지 않는데요.”
도진과 단연경은 나름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지는 않았다.
“천재란 소리를 듣던 아이들 대부분은 나이가 들면 일반 사람들과 비슷해진다. 이유는 배움의 즐거움을 잃어버리거나 배움 과정에서 스스로 만들어 낸 한계에 부딪쳐 더 이상의 발전을 못 보기 때문이지.”
도진이 질문했다.
“배움에서 만들어 낸 한계란 게 무엇입니까?”
“스스로 사고가 미약한 시기에 정형화된 것을 배우게 되면 그 자체가 사고의 한계를 만들어 냄을 말하는 것이니라. 이 한계는 쉽게 깨지지 않는다.”
이번에는 단연경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그럼 늦게 배우는 사람들은요?”
“흔히 나이를 먹으면 머리가 굳는다고 한다. 이는 아주 나이를 많이 먹어 노화로 인한 기억력 감퇴 때문이 아닌 배움을 멈춘 시기가 오래되서 오는 현상을 말함이다. 그러니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이는 발생하지 않는 문제이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데요.”
단연경이 눈을 찌푸리며 말하자 옥허가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쯧. 그러니 네가 툭하면 머리 나쁘단 소리를 듣는 거다. 너희들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일반인의 경우 무인들보다 노화가 일찍 일어난다. 그에 따른 집중력과 익힘의 속도가 높은 시기도 짧게 마련이다. 허나 너희는 무공을 익히고 있어 집중력과 기억력을 더 늦은 시기까지 유지할 수 있느니라. 아울러 무공이 좀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학문에 힘쓸 수 있는 시간과 부족함에 대한 탐구욕이 생길 것이니라. 당연히 그때 가서 학문을 익히는 게 지금보다 더 높은 효율과 성취를 볼 수 있는 것이지.”
“그런가요?”
“그렇다.”
단연경은 여전히 못미더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무공을 익힌 사람이 순수한 서생보다 더 학문을 잘 익힐 수 있는 소양이 있고, 실제로 천하에 그런 사람이 많아야 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공이 높은 이들 중에 학문이 깊은 사람은 생각이 안 나는데요.”
“그래서 아까도 말했지 않으냐. 방법이 잘못되어 그런 이들이 적은 것이라고.”
“칫, 그럼 사부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군요. 그런 걸 깨닫고 이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베푸시니 말이죠.”
단연경이 입을 삐쭉거리며 말하자 옥허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그러니까 그냥 이 위대한 사부가 시키는 대로 따라오면 된다. 왜냐고? 이 사부는 위대하니까. 그리고 위대한 가르침을 받은 너희는 새롭게 태어나게 될 것이다.”
“참으로 위대한 탄생이구만요.”
그날 단연경은 머리에 혹 위에 혹을 달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 *
단연경의 말에 후인동은 맞장구를 쳤다.
“단 대협의 사부님은 참으로 좋은 분이십니다. 제 사부님께선 무공만 익히면 단순 무식해진다 하여 어려서부터 서책을 꽤 많이 읽게 하셨거든요. 참으로 부럽습니다.”
“하하하! 그런 면에선 좋은 것 같기도 하군요. 여하튼 그래서 폐관에 들기 전까진 익힌 건 소학(小學)이나 십팔사략(十八史略) 정도까지였습니다. 그나마도 강호에서 문무겸전의 협객이 되고 싶단 생각이 많아서 스스로 죽자고 해서 간신히 거기까지 익힌 것이었지요.”
“그렇군요. 저도 나중에 제자를 들인다면 그대로 시행해 봐야겠습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