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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다음 날 후인동 등은 경로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전날 공격으로 이미 행적이 노출된 이상 물길로 가는 건 위험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육로야 경로를 어떻게든 바꿀 수 있지만 수로는 그게 안 되었으니 공격당할 위험이 너무 높았다.
후인동, 판태발, 계도식, 예수란은 물론이고 단연경도 한배에 타고 있는 관계로 의견을 나누는데 함께했다.
애초에는 단연경은 제외시키려 했었다. 그들이 서둘러 본가로 가는 것도, 어제의 공격을 받은 것도 모두 같은 이유 때문이었고, 그 이유 자체가 굉장히 위험한 내용이었다.
그 이유는 적게 알면 알수록 좋았고, 또한 남이 알아서 좋을 게 전혀 없었다. 자칫 멸문지화에까지 이를 수 있는 엄청난 것이었니까.
하지만 어제 대화를 나눠 본 후인동은 단연경이 박식한 것도 있고, 또 어쩌면 이유를 모르게 한 채 도움을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적극 주장을 편 것이다.
예수란은 질러 논 말들이 있어 꺼름칙했지만 현실적으로 충분히 일리가 있었기에 할 수 없이 받아들였다.
지도를 보며 예수란은 강을 따라 애초에 목적했던 민지현까지 간 후 관도를 따라 이동하자고 했다. 그러나 후인동은 어제의 일을 들어 또다시 공격을 당할 수 있으니 지금 곧 지나갈 이령에서 하선해 육로로 이동하자고 했다.
두 사람 의견 모두 나름 일리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가자, 후인동이 아무 말 없이 있던 단연경에게 물었다.
“단 대협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의 질문에 잠시 수염을 만지작거리던 단연경이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엔 강을 따라가는 게 훨씬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선 육로에 비해 결코 느리지 않고, 또 어제의 그 녀석들이 또 공격을 한다 해도 인원수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강을 넘어오려면 배가 필요할 텐데 쉽게 구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한 가지, 이런 제약을 뚫고 만약 공격이 진행된다면 역시 육로보다는 여기 배 위가 더 방어와 호위가 쉬울 것입니다. 육로에서 매복에 걸려서 사방을 호위하는 것보다야 배 위에서 선창을 등 뒤로 하면 앞만 방어하면 되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민지까지 가니까 한손 거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단연경의 말에 후인동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마지막 말은 후인동으로 하여금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강기를 구사할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고수가 호위해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단 대협의 말이 맞는 듯싶습니다.”
예수란도 속으로 찬성은 했지만, 그냥 대놓고 좋다고 하기 싫어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후 대주가 알아서 하세요.”
그녀는 그 말만 하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는데, 단연경은 그 모습에 어이없는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소설에 나오는 버르장머리 없는 귀한 집 자손의 전형적인 아이.’
예수란에 대한 단연경의 결론이었다.
중간에 시신을 내려 부검과 가매장을 할 수 있게 처리하고 곧바로 민지를 향해 움직였다. 그렇게 큰 문제 없이 강을 따라 흘러갔다.
그사이 후인동은 물론 계도식과 판태발과는 형님 동생하며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세 사람 모두 붙임성이 좋은데다 단연경도 단순한 부분이 있어 금방 친해져 버린 것이었다.
이들 셋과 편하게 지냈지만 배를 타고 이동하는 며칠 동안 단연경과 예수란은 서로 최대한 피해 다녔다.
단연경이야 특별히 할 말도 없었고, 또 책에서 나왔던 인물 중 가장 피해야 될 인물형이었기에 피해 다닌 것이다.
물론 가끔은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과 붉은 입술을 보면 심장이 뛰면서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집중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얼마 뒤부터 보인 그녀의 싸늘한 시선에 이마저도 뜸해졌고, 슬슬 그녀를 완전히 피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예수란은 시작이 어긋난 데다 그 뒤 관계 개선을 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친 탓에 말하는 게 껄끄러운 게 이유였다.
그리고 후인동 등과는 잘 지내면서 자신에게는 말은 고사하고 슬슬 피해 다니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껴 눈이라도 한 번 마주칠라 치면 재빨리 시선을 돌리고 모른 척해 버리자 야속하기도 하고 해서 되도록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나자 감정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야속했던 마음이 미움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미움으로 변하자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왠지 한동안은 기분좋게 만들었던 그의 시선은 훔쳐보는 끈적한 것으로 느껴졌다. 헌앙한 외모는 그저 허우대만 멀쩡한 것으로, 재치 있는 말과 가끔 보이는 학식과 호방한 모습은 그냥 가식처럼 보였다.
심지어는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꿈꿔 왔던 멋진 사내와의 낭만적인 첫 입맞춤을 자신이 정신을 잃은 틈에 훔쳐갔다고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내 꿈을 무참히 짓밟은 허우대만 멀쩡한 가식 변태.’
이것이 그녀의 단연경에 대한 최후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오해와 감정의 골이 깊어져 갔지만 걱정했던 적의 공격은 더 이상 없었고 또한 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중간에 진짜 수적이 두어 번 나타났으나 이 바닥 상관행에 따라 통행료로 해결하고 계속 이동해 배가 출발해 보름째 되는 날 민지현에 도착할 수 있었다.
5. 나도 멋지게 나타나고 싶다!
“그 말을 지금 본 좌 보고 믿으라는 게냐?”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사람을 압도하는 기운이 실려 있었다.
“곡주님! 믿어 주십시오!”
오체투지한 채 사내가 외쳤지만 곡주는 태사의에 앉아 턱을 괸 그 자세 그대로 말했다.
“본 좌도 믿고는 싶은데, 상황이 영 이상하잖아. 안 그렇소, 적월(赤月) 부곡주?”
“그렇습니다. 곡주님. 이 녀석의 말만 들으면 최소한 초절정급에 해당하는 자니까요.”
“적월 부곡주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손 들어 봐.”
태사청에 모인 서열 십 위까지의 인물들 중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없군. 그럼 이 녀석을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는가? 혈랑대(血狼隊) 소속이니까 대주인 포대혁(浦大赫) 장로가 말해 보게.”
키는 육 척이 훌쩍 넘고 엄청난 근육질에 얼굴엔 고슴도치 같은 수염이 잔뜩 나 있는 데다 얼굴을 좌에서 우로 가로지를 긴 상처가 인상적인 사내가 나서며 말했다.
“태형 삼십 대에 처하면 될 듯싶습니다.”
생긴 것만큼이나 걸걸한 목소리로 말하자 곡주는 고개를 돌려 강퍅한 인상의 오십대가량의 사내를 보며 말했다.
“호계악(鎬契岳) 집법장로(執法長老), 그것이면 되겠는가?”
호계악은 곡주의 지명에 앞으로 나서며 답했다.
“작전 실패와 부하를 모두 잃고 홀로 살아온 것은 중죄에 해당하나 죄인 우중충(禹重忠)은 혈랑대 백인대장으로서 활동하며 그간 곡을 위해 세운 공이 있으니 그 정도면 타당하리라 생각됩니다.”
“좋아. 혈랑대 백인대장 우중충에 대해 태형 삼십 대에 처한다. 그리고…….”
시커먼 사내, 우중충은 곡주의 말이 잠시 멈추자 마른침을 삼켰다.
“우중충의 직위를 해제한다.”
“헉!”
우중충은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태형이야 그냥 맞으면 그만이지만 직위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그가 평생에 걸쳐 만든 모든 걸 잃는 것이었다.
부하도 잃고 명예도 잃는 것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곡주님! 직위 해제만은……. 차라리 속하를 죽여 주십시오! 크흐흑!”
우중충이 박박 기어 곡주에게 다가가려 하자 호법장로(護法長老) 목완주(木完株)와 수석장로(首席長老) 서휘(徐輝)가 그의 몸을 내리눌렀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가만히 있거라.”
“곡주님!”
우중충이 두 사람에게 눌린 채 버둥거리며 눈물을 쏟아내며 소리치자 곡주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이놈 웃긴 놈일세. 명에는 변함이 없다. 현재의 직위는 해제하고, 천랑대(天狼隊)로 배속한다.”
곡주가 딱 잘라 말하자 우중충은 대성통곡을 하려다 눈을 크게 치켜떴다.
“예?”
동작을 멈추자 목완주는 물러났고, 서휘는 그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그를 향해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노부의 휘하로 온 걸 환영한다.”
우중충은 그때까지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다.
“뭐하느냐? 속히 곡주님의 은혜에 예를 올리지 않고!”
포대혁의 말에 번쩍 정신을 차린 우중충은 기쁨에 크게 외쳤다.
“고, 곡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우중충 신명을 다해 충성을 맹세합니다!”
천랑대는 고작 삼십 명밖에 안 되었지만 개개인의 무공 수위는 절정급에 다다른 곡 최강의 무력 집단이었다.
비록 호법원(護法院)과 집법원(執法院) 소속의 무인들도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그들을 이끄는 이는 두 명의 부곡주 다음인 서열 삼 위 서휘(徐輝) 수석장로가 이끌기에 최고로 평가받는 곳이었다.
천랑대에 소속되면 천랑도법이라는 최상승의 무공을 배울 수 있게 되고, 새로운 내공심법과 최고의 대우를 받는 등 곡내에서 엄청난 특권을 누리게 된다.
한마디로 혈랑대 백인대장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높은 자리로 파격적인 진급을 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우중충이 그토록 목이 터져라 곡주를 향해 충성을 부르짖는 것이었다.
“시끄러우니까 데려가서 형 집행해.”
곡주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바깥쪽에서 무사들이 들어와 그를 끌고 나갔다.
우중충은 나가면서도 그 시커멓고 험한 얼굴에 눈물, 콧물 범벅인 채로 웃으며 계속해서 충성을 외쳐 댔다.
“하여튼 요즘 애들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태사청이 조용해지자 곡주는 미간을 엄지와 검지로 누르듯 문지르며 말했다.
“자,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보지. 우중충 저 녀석 생긴 건 더럽게 생겼지만, 실력은 분명 절정에 도달했다. 그런 녀석이 설마 거짓을 말한 건 아니겠지? 여문학(呂文學) 군사 자네 생각은 어떤가?”
문사건을 쓴 사십대 정도의 사내가 나서더니 입을 열었다.
“맨 처음 보고를 받고 곧바로 혈무단(血霧團)을 급파해서 조사했사온데, 우중충이 한 말은 약간의 오차가 있는 걸로 사료됩니다.”
“오차가 있어?”
곡주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평소 약간은 가볍고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모든 걸 분명히 계산하고 판단해 행동하는 그였다.
방금도 보고 들은 바를 바탕으로 우중충에 대한 형벌과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오차가 있다고 보고한 것은 곧 잘못된 정보 전달 및 곡주의 오판을 조언해야 할 군사의 의무를 져버린 셈이었다.
직무 해이는 어떤 직위에 있든 큰 죄다. 그리고 최상급에 있는 이의 경우는 중죄 중에 중죄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곡주가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것은 여문학이 그렇게 행동했던 이유를 정확하게 알기 위함이었다.
“예. 그자들이 내려놓고 간 본 곡의 혈랑대의 시신과 무기를 살펴본 보고에 따르면 우중충의 말대로 분명 강기에 의한 게 맞았습니다. 단번에 검과 함께 뼈째로 두 동강이 났고, 단면도 굉장히 말끔한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정도라면 검기 따위로는 어림도 없는 것이지요.”
여기까지 듣자 우중충의 보고는 오차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중충의 말대로라면 얼핏 생각하기에 초절정급의 무인이 검법에 의지한 강기를 사용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곡주는 물론 태사청에 모인 이들의 시선이 강렬하게 변했다.
“그럼 검법에 의해 발생된 강기에 당한 게 아니란 건가?”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첫째, 아무리 초절정의 무인이라 하더라도 초식 연계를 통한 강기 발현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즉, 약간의 시간 차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이번에 파견된 혈랑대원들은 우중충이 가려 뽑은 자들입니다. 분명 피하라는 말을 했고, 또 검법의 변화를 보았다면 최소한의 회피 동작이나 방어 동작은 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신과 검에는 방어 동작은 모르겠지만 회피를 위한 흔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음…….”
여기저기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둘째, 평소에 비슷한 동작을 많이 연습해서 그 간격이 말도 안 되게 짧았다는 가정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검법입니다. 천하에 강기를 뽑아 올릴 수 있는 검법은 몇 되지도 않고, 거의 다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검법에 의하면 그에 대한 검로의 변화가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왜냐! 모든 검초는 그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한, 연계를 위한 변화를 끝에 항상 내재시키기 때문이죠. 그런데 시신과 검에는 그런 변화가 전혀 없는 걸로 나왔습니다. 그냥 횡으로 길게 벤 것입니다. 시신을 일렬로 놓고 상처 위치를 정확하게 그려 왔는데 그 궤적은 이렇습니다.”
여문학이 자세를 낮추며 수도 모양을 만들어 길게 횡으로 베는 동작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곡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선우선(宣宇線) 부곡주와 적월 부곡주의 생각은 어떤가?”
곡주의 태사의 바로 앞쪽에 양쪽으로 서 있던 적월과 선우선이 눈빛을 교환하더니 적월이 입을 열었다.
“여 군사의 말대로 오차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대로 강기를 구사하는 화경급의 인물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적월의 말에 곡주는 태사의에 몸을 기대더니 코끝을 살짝살짝 긁으며 깊이 생각을 한 후 말했다.
“이차 공격을 위해 나가 있는 혈랑대 전원을 철수시켜. 그리고 군사는 그 알 수 없는 고수의 정체 파악을 하는데 주력해서 칠 일 안에 보고해. 혈무단으로 부족할 수도 있을 테니 아약사(阿藥士) 외총관은 적극 지원하도록 하고. 서휘 수석장로는 이번에 새로 배속되는 천랑대 후보 일곱에 대한 수련에 신경 쓰도록. 천랑대 일 개 조는 적월 부곡주한테 인계해. 모레 적월 부곡주는 금화장으로 간다. 그리고 공손월(公孫越) 장로는 백랑대 중 오 개 조를 데리고 낙양 인근에서 대기하다 적월 부곡주가 위험에 처하면 구출하도록 한다. 나머지도 명이 떨어지는 즉시 출곡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