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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곡주의 명에 여문학이 급히 물었다.
“곡주님. 너무 서두르시는 게 아니신지요. 자칫 우리의 움직임이 정도무림맹에 잡혀 들 수 있습니다. 그리되면 피곤해집니다.”
“그래서 이러는 것이다.”
“예?”
“이미 우리가 그것을 노린다는 걸 금화장에서 알아 버렸다. 그럼 금화장의 예광기(藝光忌) 그 늙은 너구리가 어찌 행동할 것 같으냐? 계속 비밀로 끙끙거리다 혼자 먹겠다고 움직일까, 아니면 그냥 어디 힘있는 곳에 넘겨 버리고 약간의 이득이라도 챙겨 먹을까?”
“…….”
여문학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곡주의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자, 모두 준비들 열심히 하도록. 이상!”
* * *
민지현에 내린 후 단연경은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처음에는 같이 갈 수도 있다는 뜻을 전했지만 역시 끝까지 함께하기에는 그 물건이 가진 위험성이 너무 높았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후인동은 더 이상 위험을 무릅쓰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정중히 사양했다.
그들이 떠나고 난 후 단연경은 바로 떠날까 하다 가까운 객점을 찾아갔다.
처음에는 뱃멀미로 고생했고, 공격당한 이후에는 최소 인원만으로 움직였기에 음식 자체가 시원찮았었다.
그리고 은근하게 신경 쓰느라 잠도 하루에 한 시진 정도밖에 못 잤고, 제대로 씻지도 못해서 이런 걸 좀 해결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음식에 대한 욕심이나, 피로감 같은 건 없었다. 음식이야 어릴 때부터 선식 위주로 지내 몸을 유지할 수 있게만 섭취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이 정도로 피로할 만큼 약한 육체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런 판단을 한 것은 두 번 다시 흉내내지 않겠다는 소설 속 협객의 모습 때문이었다.
‘말과 행동만 현실에 맞게 고치면 되잖아. 굳이 협객의 다재다능함과 박식함, 그리고 깔끔함 같은 걸 포기할 필요는 없잖아.’
바로 이것이었다. 박식함 속에는 음식에 대한 식견도 포함된다. 맛과 풍미를 알아야 하고 만드는 법도 알아야 된다.
그런데 음식이란 게 책으로만 봐선 정확한 느낌을 전달할 수 없었기에 꼭 직접 먹어 봐야만 하는 것이었다.
또, 꾀죄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말끔한 모습은 아니었기에 외모의 정리도 필요했다.
민지현에 오전에 도착했던 단연경은 일찌감치 객잔에 들어 뜨끈한 물에 몸도 풀고 옷가지도 빨았으며, 좋은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보냈다.
다음 날, 말 한 필을 구한 후 민지현을 출발한 단연경은 별 탈 없이 낙양으로 관도를 따라 움직였다.
주변 풍광도 즐기고, 때론 경치 좋은 곳에선 오수도 즐겼으며, 상쾌한 바람을 즐기며 신나게 내달리기도 했다.
여유로운 여행이었지만 낙양까지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는 않았다.
십오 년간이나 협곡에 처박혀 있었던 답답함이 마음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던 탓에 신나게 달리는 시간이 제법 되었기 때문이었다.
낙양에 접어든 단연경은 곧바로 아껴 두었던 백의를 착용하고 섭선을 꺼내 들었다.
준마를 타고 깨끗한 백의에 섭선을 흔드는 모습은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그를 반영하듯 낙양의 많은 여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역시 소설 속의 장면들을 적당히 바꾸기만 하면 이렇게 멋들어지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지.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면 꿈은 이루어질 거야. 하하하!’
흐뭇한 마음으로 시선을 즐기던 단연경은 관광을 좀 하다 금화장을 찾을까 하다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받아 두고 편한 마음으로 돌아다니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아서였다.
금화장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별 기대 없이 아무한테나 물어본 건데 의외의 정보까지 덤으로 자세히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금화장이 대단히 큰 상인 가문이란 사실이었다.
‘금화장이 그렇게 큰 곳이야? 음……. 사부님이 그런 곳과 거래를 했다는 게 좀…….’
단연경은 처음 사부의 서찰을 읽고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꼈던 게 생각났고 살짝 불안함을 느꼈다.
워낙 엉뚱한 구석도 있는 데다 일단 질러 놓고 보는 경향(단연경이 보기에)이 있어서였다.
‘에이, 설마 무슨 큰일이야 있겠어. 물건 찾는 건데…….’
애써 스멀스멀 피어나는 불안감을 떨쳐 내는 단연경이었다.
금화장은 낙양성 바깥쪽에 위치해 있었다. 처음에는 낙양성내에 있었으나 규모가 커지자 거대한 장원을 지어 이전하고 원래 자리는 전장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알려 준 대로 넓은 길을 따라 이동했다. 그리 멀지 않다는 말만 믿고 천천히 갔는데 의외로 거리가 있어 해가 진 뒤에서야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람들 말로는 워낙 큰 사업을 하다 보니 불야성이라 했고, 실제로 거대한 문과 높은 담장, 얼핏 봐도 엄청난 규모의 장원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다만 설명과 다른 부분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 북적거릴 것이란 것과 문이 활짝 열려 있을 거라 했는데 지금은 문이 굳게 닫힌 채 문을 지키는 이들 이외에 누구도 없다는 점이었다.
단연경은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이내 시간이 늦어 문을 닫은 것 정도로 생각하고 어찌할까 고민했다.
‘아무리 그래도 역시 밝을 때 찾아오는 게 예의겠지?’
날이 밝은 대로 찾아오기로 마음먹은 단연경은 말머리를 돌렸다.
낙양성내로 들어갈까도 했지만 이대로 가면 성문이 닫힐 수도 있었고, 객잔을 찾는 것도 여의치 않을 수 있어 노숙을 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문앞에서 노숙하는 것 역시 도의에 맞지 않았으므로, 좀 떨어진 곳에 적당한 곳을 찾아 멈추었다.
노숙이야 단연경에겐 생활이었으니 늘 휴대하고 있는 건량으로 저녁을 대충 때우고는 옷을 갈아입고(백의는 소중하니까)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 * *
머리가 반쯤 벗겨진 적월은 넓은 이마를 슥슥 문지르며 천랑대 일 조 조장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머리털이 작년보다 더 빠져나간 것 같아. 이 지긋지긋한 탈모를 어떻게 하지.”
적월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하자 일 조 조장 채돈규(彩暾赳)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금화장의 취급 품목 중에 탈모를 방지하고 발모를 촉진하는 약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서역에서 들여오는 귀한 품목으로 워낙 고가인지라 누구나 쓰진 못하고 돈 좀 있다는 부호들이 애용한다고 합니다. 효과가 좋아 한 번 써 본 이들은 계속 찾는다고 하더군요.”
“오호, 그래? 그걸 어디서 들었느냐?”
“저도 요즘 탈모의 기미가 있어 수소문해 보다 알게 된 것입니다. 이름이 해두안솔다포매안(該頭按率多包埋安)이라고 머리를 감싸게 만들어 마음을 편하게 한다 뭐 그렇답니다.”
“그럴싸하구나. 이따 꼭 찾아봐야겠구나. 노부가 찾으면 자네에게도 좀 주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부곡주님.”
그밖에도 탈모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 눈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흑의로 감싼 천랑대원 하나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방금 무림맹 소속의 무인들로 추정되는 자들이 금화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 몇이나 되더냐?”
“대략 오십 명가량 되었습니다.”
천랑대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적월이 입을 열었다.
“알았다. 더 이상 지켜볼 필요 없으니 돌아가 휴식을 취하도록.”
“존명!”
천랑대원이 돌아가자 적월은 아깝다는 듯 말했다.
“내일쯤 한꺼번에 도착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군.”
“그렇습니다. 아마 선발대를 먼저 보낸 것 같습니다. 좀 더 조용히 처리할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약간은 시끄러워질 듯싶습니다.”
“어쩔 수 없지. 괜히 빨리 온 그놈들 잘못이니.”
천랑대원이 물러나자 채돈규가 말했다.
“해도 곧 질 것 같고, 공손월 장로에게 백랑대에게 준비하라 이르게.”
“존명!”
* * *
한참 깊은 잠에 들어 있던 단연경은 조금씩 느껴지는 잡스러운 기운에 눈을 떴다.
“뭐야 이 느낌은…….”
잠에서 깬 단연경은 기운을 따라 시선을 던졌다.
멀리 금화장 쪽이 밝게 보였다. 원채 밝게 유지되는 곳이었지만 지나치게 밝은 빛이었다. 거기다 그를 잠에서 깨어나게 했던 잡스런 기운은 분명 살기와 투기였다.
“응?”
좀 더 정신을 집중하자 살기와 투기가 명확하게 느껴졌고, 은은하게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찾을 물건도 있고, 또 책에서 본 바로는 재화를 노린 악당들이나 이 밤중에 남의 집을 공격한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단연경이 할 건 하나뿐이었다.
“협객 출동이지.”
단연경의 신형이 쏜살처럼 튕겨져 나갔다.
순식간에 나무 위를 날아 오십여 장 정도 갔던 단연경은 돌연 방향을 바꿔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말 옆에 내려선 후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안장에 메어 둔 봇짐을 어깨에 걸며 중얼거렸다.
“말은 어쩔 수 없어도 짐은 가져가야지. 잃어버리면 답이 없잖아. 소설에는 이런 부분 없지 아마. 후후.”
약간 모양 빠지게 되돌아오기는 했지만 어쨌든 소설과 현실의 차이를 극복하며 제대로 된 협객이 되어 간다고 생각하는 단연경이었다.
산허리를 돌아서자 금화장이 눈에 들어왔다. 화마(火魔)가 거대한 금화장의 반을 삼키고 있었다.
다만 담장이 높아 안쪽 사정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그저 선명하게 들려오는 병장기 소리와 기합 소리, 비명 소리, 그리고 넘치는 살기와 투기로 안쪽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단연경은 빠르게 금화장 앞쪽에 도착한 후 곧바로 담장을 넘으려다 멈칫했다.
‘그냥 들어가면 존재감이 없잖아. 휘파람을…….’
크게 숨을 들이킨 단연경은 입술을 오므리고 천천히 호흡을 뱉어 내며 내력을 실었다.
휘히히.
작고 연약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단연경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아, 이런 젠장!”
마음이 급하니 휘파람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입술에 침을 살짝 적신 후 재차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이!
이번엔 제대로 나왔다.
하지만 문제는 소리에 내력이 실리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목을 통해 나오는 소리야 내력을 실고도 남지만 바람 소리에 내력을 실어 낸다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휘파람처럼 신체를 이용한 발성 이외의 소리에 내력을 싣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럴 것 같으면 음공(音功)의 고수가 따로 있겠는가?
“망할! 도대체 소설 속의 내용 중에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게 뭐야?”
천천히 생각해 보면 기를 싣는 방법도 찾아낼 수야 있겠지만 지금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그 사이에 불필요한 희생이 늘어날 테니 말이다.
“나중에 연구하도록 하고 일단 들어가자. 어차피 차선책이 있잖아?”
텅!
강렬한 진각을 밟는 순간 단연경의 신형이 높이 솟구쳐 높은 담장을 단숨에 넘었다.
담장 안쪽으로 들어서자 몇 구의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 청록색의 옷을 입은 시신이 열 구 정도 있었고, 전혀 다른 옷을 입은 시신이 두 구 있었다.
이곳에서의 전투는 끝난 듯 강렬한 기파는 더 안쪽에서 전해져 오고 있었다.
두어 개의 전각을 지나쳤을 때 처음으로 살아 있는 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 빼고는 전부 흑의에 흑색 복면을 한 이들이 이러저러한 물건들을 급히 옮기고 있었다.
‘아직 전투가 벌어지는 것 같은데, 꽤나 무공을 익힌 자들을 전투에 참가시키지 않고 물건을 옮기는데 이용해? 이곳 주인은 돈에 환장한 자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그냥 지나쳐 가려는 순간, 한쪽에서 이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복면인이 호로병이 든 상자를 확인하더니 외쳤다.
“이만 하면 됐다. 일 조는 물건을 이동시키고 사, 오 조는 나를 따른다.”
“존명!”
일사분란한 동작으로 이동을 하자 단연경은 일단 안쪽으로 들어가는 이들을 따라갔다.
잠시 후 전각들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곳에 도착했다. 넓은 마당인지 연무장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넓은 공터가 있었고 그곳에는 거의 오십여 명의 무인들이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상황은 복면인들과 똑같은 복장을 한 이들 열 명을 자유복을 입은 오십여 명에게 포위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보통 책에서 보면 악당들이 다수이고 협사들이 소수였다. 또한 소수라지만 언제나 협사들의 실력은 뛰어나서 다수를 압도하기 마련인데, 지금 상황이 소수의 복면인들이 무공과 진법 모두 뛰어나 다수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과 더불어 조금전 모습을 봤을 때 복면인들이(복면을 하고 있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금화장 소속인 듯싶었으니, 그들을 돕는 게 맞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단연경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일단 복면인들의 복장이 마음에 걸렸다. 흑의에 복면이면 악당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고, 현실적으로도 금화장 소속의 무인들이 복면을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복면이란 게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을 때나 사용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또 한 가지, 거대한 전각 앞에 서 있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맞은편, 그러니까 전각으로 통하는 큰 문 앞에 복면인 하나가 여유만만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전투를 관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