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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5(17화)
5장 유물 쟁탈전(3)
“쯧쯧, 목숨을 건졌으면 조용히 숨죽이고 살 것이지, 어찌 겁도 없이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이냐.”
제갈중이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치우 일족을 도발했다.
“우리가 네놈들의 꼼수를 모를 거라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겨우 유인책에 속아서야 어찌 헌원 일족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도 머리는 없고 힘만 쓸 줄 아는 놈들이 내놓은 얄팍한 수작에 당한다면 더욱 부끄러운 일이지.”
제갈중의 계속되는 도발에 용천광과 치우 일족의 얼굴이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되었다. 놈들을 너무 자극하지 말거라.”
그때, 제갈승이 나섰다.
“내 생애에 치우 일족을 보게 될 줄이야, 참으로 감회가 새롭군. 그대들과 우리의 인연이 결코 좋다고 볼 수는 없지. 하지만 과거가 어떻든 지금 상황은 흥분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나? 그대들도 알겠지만, 여기서 시간을 끌면 정사마의 고수들이 곧 몰려오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그대들이 열쇠를 가지고 있다 해도 문을 열기가 쉽지 않을 걸세. 그리고 문을 연 순간, 수많은 이들이 함께 안으로 들어가겠지.”
천성은 제갈승이 하는 양을 일단 지켜보았다.
“거기, 자네. 흑협, 그대 역시 마찬가지야. 지금 여기서 싸움이 벌어진다면 이곳을 찾은 많은 무림인들이 말려들고 말 걸세. 그렇게 되면 지금 치우 일족의 유인조와 벌어지고 있는 혼란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사상자가 생길 걸세.”
“흥,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용천광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일단 입구를 열고 우리의 승부는 안쪽에서 보도록 하자는 것이네.”
제갈승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뜻을 전했다.
“뭐라! 네놈은 우리 치우 일족이 바보로 보이느냐! 그동안 고생해서 열쇠와 천률음보를 확보했는데, 이제 와서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리라는 말이냐!”
치우 일족으로서는 당연히 반발할 수 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여기서 모두 함께 유적으로 들어가려면 그동안 무엇 때문에 피해를 감수하며 열쇠와 천률음보를 확보했다는 말인가.
그야말로 죽 쒀서 개 주는 꼴이었다.
“후후, 진정하시게. 대신 그대들이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가게. 우리는 그 뒤를 따르지. 지금 여기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어차피 그대들이 아닌가. 먼저 들어가서 길을 막는다면 그대들은 그만큼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네. 이 정도면 충분한 이점이 아니겠나? 아니면 우리를 상대할 자신이 없는 겐가?”
용천광의 눈썹을 꿈틀했다.
마치 자신들을 가지고 노는 듯한 제갈승의 태도에 기분이 상한 것이다.
당장에 모든 걸 때려치우고 이 자리에서 놈들을 헤치우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백 명을 해치운다 해도 남은 헌원 일족이 문제였다.
게다가 그사이 다른 무림 세력이 도착하면 진흙탕 싸움으로 변해 버릴 것이다.
[천황, 지금은 놈의 제안에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놈의 말대로 우리가 먼저 진입한다면 놈들보다 충분히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구공의 전음이 아니더라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흑협이라는 자도 무시 못할 변수였다.
“좋다. 우선은 너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지. 하지만 안쪽에서 무슨 일이 생기든 우릴 원망하지 말거라!”
결국 용천광이 제갈승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대도 이의는 없겠지?”
제갈승이 천성을 보며 물었다.
치우 일족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못마땅했으나, 이곳에서 치우와 헌원 일족이 싸움을 벌이고 무인들이 말려들게 되면 돌이킬 수 없음을 천성도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겪어 온 치우 일족의 위험성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지금까지 만난 헌원 일족의 무사들 또한 최소 화경이 넘어선 극강의 고수들이었다.
여기 있는 육백여 명이 모두 그렇다면 이곳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핏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게다가 마련을 견제하기 바쁜 무림맹이 이곳을 통제할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좋소!”
천성도 동의하자 용천광이 구공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오라!”
구공은 다시 환사와 섬응에게 성화령과 빙정을 넘겨받고 석탁 좌우에 위치한 수정 서랍을 열어 두 물건을 집어넣었다.
후우우웅!
순간, 석탁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오더니, 투명한 기운이 반구형으로 주변을 감쌌다.
“오, 저것이 바로 혼돈의 기운이로군!”
제갈승이 흥분된 얼굴로 소리쳤다.
반구형의 기막 안에 있는 구공의 모습이 마치 형체가 없는 유령처럼 흐물거리고 있었다.
“구공! 괜찮은가!”
용천광이 놀라 소리쳤다.
“괜찮습니다. 이제 열쇠를 가져와라.”
보이는 것과는 달리 아무 이상이 없는 듯 구공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머뭇거리던 환사와 섬응이 조심스럽게 다섯 개의 열쇠를 가지고 반구형의 기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그들의 모습도 형체를 잃고 흐물거렸다.
그사이, 긴장된 표정으로 구공이 열쇠들을 다섯 개의 구멍에 꽂았다.
기이이이이이잉!
순간, 기관이 움직이는 듯한 기계음이 들리고, 석탁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유적의 문일 열리는 것이다.
치우 일족과 헌원 일족 모두 긴장한 채 입구가 열리길 기다렸다.
이윽고 석탁이 한 바퀴를 회전하고 멈추자 앞쪽으로 작은 계단이 생겨나더니 그 위의 허공에 검고 둥근 공간이 열렸다.
“저, 저게 무엇인가?”
용천광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놀라 소리쳤다.
둥근 공간은 마치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보였는데, 그 크기가 지름 일 장 정도나 되어 세 사람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도 그곳이 유적으로 들어가는 입구일 것이 분명했다.
구공은 조심스럽게 드러난 공간으로 손을 집어넣어 보았다.
다행히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아무래도 이것이 입구인 듯합니다.”
구공의 말에 용천광이 앞으로 나섰다.
“좋아! 그렇다면 약속대로 우리가 먼저 들어가겠다! 가자!”
용천광이 앞장서고 치우 일족이 그 뒤를 따랐다.
용문회는 그 틈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헌원 일족과 천성을 견제했다.
헌원 일족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치우 일족 중 삼분지 이가 입구를 통과했을 때였다.
“혼천풍 일대는 남아서 아무도 유적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라!”
용문회가 입구로 들어서며 갑자기 명을 내렸다.
유물을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서는 천성이나 헌원 일족을 절대 유적 안으로 들어서게 할 수 없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약속을 저버리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용문회의 명에 따라 혼천풍 일대 백 명의 인원이 남아 입구를 막아섰다.
“후후, 치우 놈들이 이젠 마지막 자긍심도 버린 모양입니다.”
제갈중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혼천풍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이 정도야 예상했지 않느냐. 하지만 이미 문이 열린 이상 조금 늦는다 해도 큰 손해는 없지. 어차피 놈들도 시험을 통과해야 하니 빠르게 움직이진 못할 것이다.”
“그래도 다른 세력이 도착하면 골치 아파지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놈들 사이에 우리 측 무사들을 숨겨 두었으니 혼란은 당분간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게야. 그래도 일단은 서두르는 것이 좋겠지. 선인들은 놈들을 쓸어버려라!”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제갈승의 뒤쪽에 서 있던 백 명의 무인들이 혼천풍을 향해 돌진했다.
그 순간, 혼천풍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놀랍게도 백 명 중 절반이 넘는 인원이 검강을 구사하고 있었다.
오십 명이 넘는 화경 고수가 등장한 것이다.
혼천풍이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 오십 명의 화경 고수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천성은 더 이상 지켜보지 않고 입구를 향했다.
어차피 마음만 먹으면 누구도 천성의 움직임을 막을 수 없었다.
휘이이익!
신형이 사라진다 싶은 순간, 천성은 이미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입구를 막고 있던 두 명의 혼천풍 대원은 멀찌감치 튕겨 나간 뒤였다.
어느새 천성의 주먹에 직격당한 것이다.
“이런! 막아라!”
뒤늦게 혼천풍들이 달려들었지만, 이미 천성은 입구로 진입한 뒤였다.
“놀라운 속도군.”
제갈승이 눈을 빛내며 천성이 사라진 입구를 바라보았다.
“실제로 보니 들었던 것보다 더 강한 것 같습니다. 대체 정체가 무엇일까요? 군산에서 신농 일족과 함께했던 것을 보면 신농의 후손일까요?”
제갈중 역시 탄성을 토해 냈다.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겠지. 아니면 복희께서 안배한 또 다른 유물의 수호자든가.”
그 누구도 천성이 다른 별에서 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다 정리되었군요. 저희도 움직이지요.”
결국 반 각도 되지 않아 헌원 일족 선인들에 의해 혼천풍 일대는 괴멸되었고, 헌원 일족 역시 유유히 유적의 입구로 들어섰다.
6장 복희의 유적(1)
천성이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슈우우우욱!
마치 열쇠에 손을 얹어 복희를 만났던 느낌과 비슷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천성은 빛이 거의 없는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곳이 유적 안인가?’
천성은 영안을 열어 사방을 살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앞서 들어갔던 치우 일족은 대체 어디로 향한 것인지, 영력이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던 것이다.
영안의 범위를 생각하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안으로 확인한 결과, 이십여 장 앞쪽으로 문이 있고 그 뒤로는 미로처럼 수많은 길들이 엇갈리듯 엮여 있었다.
천성은 일단 눈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폭이 반 장 조금 넘는 좁은 길이었다.
양쪽 벽은 마치 대리석을 다듬어 만든 듯 매끈했고, 어둠 속에서도 약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또 다른 문이 나왔다.
문의 위쪽에는 ‘궁(宮)의 미로’라고 쓰여져 있었다.
아마도 이 뒤로 이어져 있는 미로의 이름인 듯했다.
천성은 문을 열기 위해 앞으로 다가섰다.
―유물을 얻으려는 자, 목숨을 걸고 그 자격을 증명하라. 그것이 두렵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이곳을 떠나라. 만일 그대가 이 앞으로 나선다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음을 명심하라!
그때, 갑자기 허공에서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는 기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반 백성들이라면 이 목소리만 듣고도 혼비백산하여 달아났을 것이다.
하지만 천성은 즉시 영력을 펼쳐 목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이상하군. 어디에도 기운이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아.’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전혀 살아 있는 자의 기척을 찾을 수가 없었다.
‘대체 그럼 누가 말한 거지?’
갑자기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유령이나 악귀가 있는 것이 아닐까 두려운 마음이 생긴 것이다.
‘하기야 그렇게 따지면 무숙이나 복희의 존재도 신기한 일이지.’
무숙도 처음에는 귀신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영적인 것과는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천성은 다시 마음을 단단히 잡고 앞으로 한 발 내밀었다.
이대로 치우 일족에게 유물을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으으응!
손을 가져간 순간, 놀랍게도 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 뒤로는 영안으로 미리 확인했던 것처럼 미로가 펼쳐져 있었다.
‘어디 한 번 길을 찾아볼까!’
천성은 영안을 열은 상태에서 앞으로 전진했다.
‘어라, 이 기운은?’
영안으로 살펴보니 미로 곳곳에서 오행의 기운이 느껴졌다.
다섯 가지 기운이 여기저기 무작위로 흩어져 있는데, 천성이 들어온 문에서 오른쪽으로는 토(土)의 기운, 왼쪽은 수(水), 직진은 목(木)의 기운이 자리잡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살펴보니 기운들은 각각의 길마다 다 달랐으며, 특별한 규칙이 보이지도 않았다.
‘혹시 무슨 진법인가?’
천성이 잠시 고민을 하며 영안을 확장시켰다.
미로를 전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놀랍게도 미로는 사방 삼백 장에 이르는 거대한 공간에 펼쳐져 있었다.
‘허, 이거 계산하기도 만만치 않겠네.’
전체를 빤히 볼 수 있음에도 그 구조가 복잡해서 입구로 가는 길을 찾기가 만만치 않았다.
천성은 집중을 한 채 미로의 입구를 찾으려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