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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5(18화)
6장 복희의 유적(2)


구우우우우웅!
그때였다.
굉음이 울리며 미로의 벽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헉!”
혹시 함정인가 하여 잔뜩 긴장한 천성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벽들이 제멋대로 앞뒤 좌우로 움직이며 미로를 완전히 뒤바꾸는 게 아닌가.
마치 살아 있는 듯 움직이던 벽들이 멈추었을 때는 방금 전 통로였던 곳은 막혀 버렸고, 벽이라 생각했던 곳에는 새로운 길이 나 있었다.
“이래서는 영안으로 통로를 확인한다 해도 소용이 없잖아!”
영안을 열어 확인한들 그 뒤에 미로의 구조가 바뀐다면 어차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영안으로 일단 가까운 곳만 확인해서 막히지 않은 곳으로 움직이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전체는 알 수 없어도 당장에 갇히지는 않을 것이다.
결정을 내린 천성은 영안을 이용해 막히지 않은 길로 움직였다.
움직인 지 반 각쯤 지나자 다시 미로의 구조가 바뀌었다.
천성은 그에 상관하지 않고 막히지 않은 길을 선택해 다시 움직였다.
그렇게 반 시진 정도를 움직인 천성은 다시 영안을 확장시켰다.
얼마나 출구와 가까워졌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악! 이럴 수가!”
놀랍게도 천성은 다시 입구 쪽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마디로 그동안 제자리를 맴돌았다는 소리였다.
‘길을 보고 찾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
계속 바뀌는 길을 보고 가 봐야 결국에는 행운이 따르지 않는 한 출구를 찾기란 요원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 미로를 통과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 미로가 복희의 유물을 얻기 위한 관문이라면 반드시 그 해법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천성은 생각에 잠겨 이 미로의 특징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일단 벽이 반 각마다 움직이고 오행의 기운이 가득 차 있다.
“가만!”
천성은 영안을 통해 오행의 기운을 다시 자세히 살폈다.
분명 기운들은 무작위로 흩어져 있었다.
숫자도 다 달랐고, 두 길이나 세 길이 연달아 같은 기운인 곳도 있었다.
하지만 반드시 각 길마다 한 가지 오행의 기운이 존재했다.
미로와 연관된 것이 분명했다.
‘대체 어떤 법칙이 존재하는 것이지?’
천성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때, 천성의 머릿속에 복희가 화산에서 수(水)의 열쇠에 대해 설명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 열쇠는 오행 중 수(水)의 열쇠로, 우(羽)의 음을 내는 악기이기도 하다.”

분명 열쇠들은 한 가지 음을 내는 악기의 역할도 한다고 했다.
게다가 이곳 미로의 이름은 바로 궁(宮)의 미로였다.
궁의 음에 해당하는 열쇠는 오행 중 토(土)의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천성은 즉시 영안을 열어 토의 기운이 있는 곳을 확인했다.
“하하하하하!”
역시 토의 기운을 연결하니 입구에서 출구까지 이어져 있었다.
아마도 미로의 구조가 바뀐다 해도 토의 기운은 항상 출구를 가리킬 것이다.
“이거였군!”
토의 기운이 있는 길을 찾아 움직인 천성은 반 각도 안 되어 출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한편, 치우의 유인조와 상대하던 무림맹과 마련의 무사들은 곧 무언가 수상함을 느꼈다.
놈들이 열쇠가 있는 곳으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두 명의 장로가 포함된 치우 일족의 실력이 만만치 않은 터라 그로 인해 양측의 피해만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대론 안 되겠군. 일단 놈들의 수뇌들을 제압하는 것이 먼저이니 불왕과 일수파산, 매화신검, 복마검선은 나를 따르시오!”
남궁영이 직접 나서자 혁련우도 장로들을 이끌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아무리 치우 일족의 장로들이라 하나 두 명의 현경 고수와 여덟의 화경 고수를 한꺼번에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일각 정도 시간이 지나자 결국엔 무릎을 꿇고 말았다.
두 장로와 팔신들이 당하자 나머지 이천의 무사들도 점차 제압되었다.
워낙에 인원의 차가 큰 탓이었다.
“허, 대단하군. 이때까지 버텨 내다니!”
남궁영이 두 사람의 신위에 혀를 내둘렀다.
만일 자신과 일대일로 싸웠다면 간신히 이겼을 정도로 두 장로의 실력이 경악스러웠기 때문이다.
“어느 놈이 치우 일족의 우두머리냐!”
남궁영은 분명 두 사람 중 치우 일족의 우두머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부상이 심해 움직일 힘조차 없는 장로들은 대답 대신 조소를 날릴 뿐이었다.
“이놈들이!”
“잠깐! 심문은 우리 군사에게 맡겨 주시오!”
그때, 혁련우가 나섰다.
마련에는 적의 의지를 무력화시키고 정보를 뽑아내는 사술이 수도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끄윽!”
그때, 장로와 팔신들이 독단을 깨물고 자결을 했다.
“아니, 이놈들이!”
이들이 치우 일족의 수뇌라 생각한 남궁영은 설마 자결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던 것이다.
처음 작전을 세우면서 이들 이천여 명은 이미 목숨을 버리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런 이유로 평상시에는 독단을 소지하지 않는 장로들조차도 모두 독단을 받았다.
“대체!”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면 유물을 찾을 길이 막막했다.
“아무래도 놈들은 유인조인 것 같습니다.”
그때, 사마굉이 나서서 이야기했다.
“무슨 소리인가?”
혁련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일 이자들 중에 적들의 수뇌가 있었다면 이렇듯 쉽게 목숨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도 유물을 코앞에 두고 말이지요.”
“그렇다면 본대는 다른 곳에 있다는 말인가?”
“그럴 확률이 높다고 봅니다.”
남궁영 역시 사마굉의 말이 맞다고 느껴졌다.
놈들이 진정 본대였다면 이곳에서 싸움을 하기보단 빠르게 돌파하는 편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움직임은 분명 이곳을 떠나려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 정찰조를 파견하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많은 무인들이 사방으로 뛰어갔다.
자신들이 먼저 유물의 입구를 찾아내려는 것이다.
그 뒤로 무림맹과 마련의 무사들이 움직였다.
“어떻게 되어 가는 거지?”
모용혜가 멍한 표정으로 흩어지는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는 천성으로 변신한 무숙이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 * *

가장 먼저 입구를 통과한 치우 일족의 수장 용천광은 당혹감에 빠져 있었다.
분명 사백이 넘는 이들이 입구를 통과했는데 갑자기 도착한 곳에 오직 자신과 구공, 그리고 아들 용문회밖에 없던 것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용천광이 얼이 빠진 표정으로 구공에게 물었다.
하지만 구공으로서도 현 상황에 대한 뾰족한 답을 낼 수가 없었다.
“나머지 전사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설마 모두 죽은 것은 아니겠지!”
만일 그렇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경우였다.
이곳에 들어온 사백이야말로 치우 일족의 알맹이라 할 수 있는 최고의 실력자들이었다.
만일 그들이 사라진다면 치우 일족의 앞날은 암담했다.
구공이 심각한 표정으로 천률음보를 훑어보았다.
혹시라도 그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을까 해서였다.
“아버님, 우선 진정하십시오. 제 생각엔 아무래도 일행이 입구를 통과하면서 나뉜 것 같습니다.”
용천광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들어왔던 입구 자체가 허공에 떠 있지 않았습니까? 원래대로라면 그 검은 공간을 통과한 우리는 뒤쪽으로 나왔어야 하지요. 하지만 지금 이곳은 입구와는 전혀 다른 곳이 아닙니까?”
순간, 구공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 입구는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입구로 들어설 때 그 크기 때문에 한 번에 세 명씩 통과한 것을 기억하시겠지요?”
“그랬지.”
“지금 여기 있는 우리 셋은 가장 먼저 입구를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다른 이들도 이렇듯 세 명씩 또 다른 공간으로 이동된 듯합니다.”
“흐음…….”
“소공자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 것으로 보아 복희께서 어떤 신묘한 안배를 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 관문들은 유물을 가질 수 있는 자의 자격을 보기 위함인데, 만일 인원을 제한하지 않는다면 세력이 큰 단체나 문파가 최후의 승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공평한 기회를 주기 위해서일 듯싶습니다.”
구공의 말에 용천광도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일단 그럼 우리끼리 먼저 움직이도록 하지.”
세 사람은 ‘상(商)의 미로’라는 명패가 붙어 있는 문 앞에 도달했다.
“첫 번째 관문은 미로인 모양이군. 한데 이름이 좀 괴이하군그래.”
용천광의 말에 구공이 문을 살피러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혹시라도 함정이 설치되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유물을 얻으려는 자, 목숨을 걸고 그 자격을 증명하라. 그것이 두렵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이곳을 떠나라. 만일 그대가 이 앞으로 나선다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음을 명심하라!
순간, 역시 천성이 들었던 것과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구냐!”
용천광이 재빨리 사방의 기척을 살폈다.
하지만 용천광이 잡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체! 분명 너희도 들었겠지?”
“그렇습니다.”
“육합전성 같은 것은 절대 아니었어. 그 괴상한 목소리라니! 대체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놈의 정체가 무엇이든 원하는 게 있으면 결국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일단은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용문회가 일행을 재촉했다.
“일단 살펴본 바로는 앞쪽은 미로로 되어 있습니다.”
구공이 문 뒤쪽의 상황을 살핀 후 일행에게 말해 주었다.
그의 능력 중 하나는 천안(天眼)이었다.
용혜란이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기술로, 영안에 비해서는 그 기능이 많이 떨어지나 먼 곳의 영상이나 기운을 잡아내는 데는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앞장서게. 천안을 이용하면 금방 통과할 수 있겠지?”
“미로의 넓이가 워낙 넓어서 전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해서 우선은 조심스럽게 전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 사람은 문을 열고 미로로 들어서 천천히 전진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천성이 겪은 것과 똑같은 상황을 맞이했다.
미로가 움직인 것이다.
“이런!”
용천광의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래서야 처음에 맞는 길을 간다 해도 그 길이 막다른 길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아무래도 이곳을 통과할 무슨 다른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용문회 역시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흠…….”
구공이 멈추어 서더니 다시 천안을 사용했다.
“이상하군요. 오행의 기운들이 길마다 한 가지씩 흩어져 있습니다. 규칙도 없고, 숫자조차 제각각이군요. 일단 천률음보를 이용해 보겠습니다.”
구공이 천률음보를 꺼내자 용의 그림자가 다시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구공은 입구를 찾을 때 그랬던 것처럼 천률음보를 오른쪽으로 천천히 회전시켰다.
바로 그때, 천률음보 위로 음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宮宮商緻宮角羽緻羽…….

신기하게도 방향이 바뀔 때마다 다른 음계들이 떠올랐다.
“가만! 이것은!”
구공이 다시 천안을 펼쳤다.
“오, 그렇군!”
“대체 무엇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용천광이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이곳에 흩어진 각각의 기운은 모두 악보의 음과 연결되어 있군요! 토금목화수의 순서로 궁상각치우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이오?”
“아까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확인한 미로의 이름이 바로 상(商)의 미로였으니, 우리는 천률음보에 나온 음이 상이 되는 곳으로 움직이면 될 것 같습니다!”
“허, 놀랍군그래. 역시 복희 사조의 신묘함은 우리가 예측조차 할 수 없구나!”
용천광이 탄성을 질렀다.
세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천률음보를 이용해 미로를 탈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