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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5(21화)
6장 복희의 유적(5)
한편, 용천광은 현재의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급히 영력을 끌어 올려 보았지만 역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영력마저 통하지 않는다면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기에 용천광은 암담했다.
‘좀 더 조심했어야 해! 마지막이란 생각에 너무 서둘렀어! 이런 함정에 빠지다니!’
용천광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유물을 얻기 위한 관문이 허술할 리가 없었다.
한데 마지막 하나를 남겨 두고 이런 꼴을 당하다니,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젠장, 내가 어떻게 되더라도 문회가 반드시 유물을 찾아야 할 텐데!’
자신의 죽음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실패한다면 일족의 미래는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용천광은 아들이 유물을 찾을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그대는 왜 유물을 얻으려 하는가?
예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 * *
계단에 올라서자마자 온몸이 마비된 채 꼼짝도 할 수가 없게 된 천성은 당황하지 않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관문 중 하나라 했으니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이 있겠지.’
천성은 즉시 영안을 열고 사방을 살폈다.
―그대는 특별한 존재군!
그때, 천성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누구지?’
마치 에리안과 대화하던 것처럼 목소리가 천성의 심령을 통해 전달되었다.
―나는 초월자 여와가 이곳에 남긴 사념이다.
‘복희와는 또 다른 존재인가?’
복희는 여와가 만든 복제체라고 했다.
한데 이번엔 또 여와의 사념이라니,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존재라 칭할 수 없다. 그저 여와의 의지가 세상에 투영되어 그 잔상이 남은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설명을 들어 봐도 나아진 것이 없었기에 천성은 일단 다른 것을 묻기로 했다.
‘지금 내 상태는 어찌 된 것인가?’
―걱정할 것 없다. 잠시 의식 외에 그대의 모든 시간이 멈춘 것뿐이다. 그대라면 지금이라도 충분히 벗어날 수 있지.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지?’
천성은 즉시 지금 상태를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내가 낸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필요 없는 절차지. 우선 한 가지만 묻지. 유물을 얻고 싶은가?
천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에게는 굳이 유물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단지 복희와의 약속, 치우 일족을 막는 일, 그리고 신농의 저주를 풀어 주는 일 때문에 이곳에 왔을 뿐이다.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기에 되도록 얻어야겠지.’
―사실 그대에게 이곳의 유물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여기 있는 유물은 완전한 영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방법과 신물들임을 알고 있겠지? 하지만 어차피 그대는 이미 완전한 영력을 사용하고 있어. 그렇다면 그대가 원하는 것은 다른 이들이 함부로 영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인가?
천성도 이미 복희를 통해 유물의 내용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목소리의 말대로 자신에게는 별다른 효용 가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치우 일족이나 헌원 일족이 유물을 얻도록 놔두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사용하는 힘이지만 영력은 너무도 위험한 힘이었다.
그동안 보아 온 바로 두 일족은 모두 탐욕스러운 자들이었다.
그들이 완전한 영력을 사용하게 되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훤했다.
물론 천성도 완벽한 존재는 아니었기에 조금 이기적인 생각일 수도 있으나 목소리의 말처럼 자신 외에 다른 이들이 사용하는 것은 막고 싶었다.
‘다른 이들이 사용하는 것을 막고 싶다.’
천성은 솔직하게 답했다.
―좋다. 그렇다면 그대의 뜻대로 하라. 하지만 누군가 먼저 유물을 차지한다 해도 나는 막지 않을 것이다.
목소리는 아무래도 복희와는 다른 의지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복희는 되도록이면 천성이 유물을 얻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그에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지?’
천성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내가 그냥 보내 줘도 되겠지만, ‘태초의 파편’을 품고 있는 자에 대한 예의로 한 가지 작은 선물을 하도록 하지. 그대는 주로 영안을 기를 느끼고 주변을 살피는 데 쓰고 있지?
‘그렇다.’
물론 비행이나 염동력을 사용할 때도 영안을 통해 조절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역할은 아직까지 미미했다.
―사실 영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영안이다. 영안은 의지의 발현을 위한 통로이며, 권능을 행하는 도구이지. 그대의 강력한 의지가 일어난다면 영안은 그것을 이루어 줄 것이다. 이곳을 벗어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대가 원한다면 의지를 세워서 영안을 통해 발현하라. 뜻하는 순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치 무슨 종교적 예지라도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뜻하는 순간 이루어진다라…….’
한마디로 영안을 통해 의지를 발현하라는 이야기였다.
아마도 염동력을 사용할 때 천성이 물체들을 움직이는 원리와 비슷할 것이다.
할 말이 모두 끝났는지 더 이상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천성은 영안을 열고 몸을 움직인다는 생각으로 의식을 집중했다.
정신을 집중할수록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영안만이 천성의 심상에 자리 잡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오로지 하나의 의지가 강력하게 일어났다.
‘움직인다!’
화아아악!
순간, 영안이 확장되는 듯하더니 손발에 감각이 돌아왔다.
동시에 천성을 옭아매던 시간의 결계가 깨지고 영안이 다시 원래의 크기로 돌아갔다.
천성은 서둘러 몸을 움직여 보았다.
천성의 육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낯설면서도 신기한 경험에 천성은 한동안 얼이 빠져 있었다.
‘이렇게도 사용이 가능하구나.’
사실 지금 천성이 영안을 통해 의지의 발현을 한 것은 세 번째 단계를 넘어서야 간신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두 번째 단계의 끝에 도달해 있던데다 목소리의 도움이 더해져서 이루어진 현상이었다.
이번에 얻은 깨달음으로 인해 천성은 세 번째 단계를 그야말로 눈앞에 두게 되었다.
방금 전의 느낌을 다시 한 번 되새긴 천성은 마지막 문을 열고 유물이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 * *
―그대는 왜 유물을 얻으려 하는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용천광은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느냐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용천광의 머리가 재빨리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 계단의 이름이 분명 진실의 계단이었다.
그렇다면 아마 거짓을 이야기했을 경우, 통과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복수를 위해서라든가 강호를 지배하기 위해서라고 자신들의 목적을 거짓 없이 이야기했을 때 목소리가 과연 그것을 인정하고 통과시켜 줄 것인가가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의 사조인 복희가 그랬듯이 오히려 벌을 내릴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이곳이 복희의 유물이 보관된 곳임을 생각해 볼 때 목소리는 복희의 안배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런 대답을 용납할 리가 없었다.
‘진실이면서 복희께서 용납할 수 있는 대답을 찾아야 해!’
용천광은 고민에 빠졌다.
과연 어떤 이유가 좋을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머릿속에 마땅한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조바심이 일고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수천 년간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기다려 왔던 일족을 어찌 보란 말인가.
답답함을 넘어서 분노가 머릿속을 지배했다.
치우 일족은 피해자였다.
일족이 몰살당하는 참사를 겪고 힘까지 빼앗겼다.
반면, 헌원 일족은 어떠한가.
용서 못할 대죄를 범하고도 지금도 암중에서 세상을 조종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너무도 불공평했다.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에 악이 받친 용천광이 결국 참았던 분노를 터뜨렸다.
“젠장! 복희가 진정 공정하고 세상을 위하는 존재였다면, 어찌 우리 일족의 고통을 이토록 방관하고 방조한단 말인가! 헌원의 무리에게 사무친 피의 값을 치르지 않고서야 내가 어찌 눈을 감을 수 있단 말인가! 난 반드시 유물을 얻어 더러운 헌원 놈들을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고통 속에서 삶을 이어 온 우리 일족이 이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도록 할 것이다!”
마치 고함이라도 친듯 용천광의 소리가 스스로의 머릿속을 쩌렁쩌렁 울렸다.
―좋다. 절실히 원한다면 그대 스스로 유물을 쟁취하도록 하라.
그때, 놀랍게도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며 용천광의 몸에 감각이 돌아왔다.
용천광은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얼빠진 표정으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아버지!”
용문회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용천광이 주변을 살폈다.
“대체…….”
복수를 천명하며 복희를 욕하기까지 했는데 통과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구공이 달려와 용천광을 붙잡았다.
“어라? 자네는 계단에 올라와도 아무렇지 않군?”
구공도 그제야 자신이 계단에 발을 디뎠음을 알고 깜짝 놀랬다.
“아마도 같은 공간에 떨어진 이들은 하나로 취급하는 것 같습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용문회가 근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용천광은 자신이 겪은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 역시 어떻게 통과를 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마지막 문을 바라보았다.
“어찌 되었든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것은 분명하니 다른 생각은 집어치우고 어서 유물을 찾으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