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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재천 5(22화)
7장 드러나는 비밀(1)


용천광이 앞장서서 마지막 문을 열었다.
구우우우우웅!
곧이어 기관이 움직이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문이 열리며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석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곳은 석실이라 하기엔 크기가 상당히 넓었는데, 반구형으로 이루어진 천장을 스무 개의 기둥이 바치고 있는 거대한 공간이었다.
그 중심에는 빛을 뿜어내며 허공에 떠 있는 두 개의 수정관이 있었는데, 넓은 석실의 크기에 비해 무척 작아 보였다.
용천광은 떨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수정관을 향해 다가섰다.
“이런, 이런! 그대들이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인가?”
그때, 갑자기 수정관 앞에 하나의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신은?”
형체의 모습을 확인한 용천광이 긴장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렇다. 나는 너희 일족을 비롯해 이 땅의 인간들에게 문명을 전파한 태호 복희이니라!”
“오, 복희시여!”
용천광과 일행이 즉시 그 자리에 엎드려 오체투지했다.
“복희시여! 저희는 모든 시험을 통과하고 유물을 얻을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우리 일족이 유물을 얻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용천광이 간절한 목소리로 복희에게 청했다.
“그래. 비록 너희가 죄를 범했고 나의 뜻을 어겼으나 수천 년 동안 그 대가를 치렀지. 모든 관문을 통과했으니 약속대로 유물을 얻을 자격은 충분하다.”
복희의 말에 용천광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이 모든 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이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잠시만 기다리거라.”
갑작스런 이야기에 용천광과 구공, 용문회가 불안한 표정으로 복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관문을 다…….”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감히 다시 나를 거역하려는 것이냐!”
복희의 호통에 두려움을 느낀 세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
복희가 마음만 먹으면 그들은 예전처럼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때, 문이 열리며 천성이 나타났다.
“설마, 네놈들은?”
천성은 엎드려 있는 용천광 일행에게서 느껴지는 영력이 치우 일족의 것과 비슷함을 알고는 살기를 뿜어냈다.
“아, 이제 온 것인가? 맞아, 그들은 바로 치우 일족이지. 가장 먼저 관문을 통과했다네. 사실 유물은 이들의 것이지.”
용천광 일행은 천성의 등장에 당혹했다.
게다가 복희와 이미 서로 알고 있는 듯 대화를 주고받자 무언가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느꼈다.
‘젠장, 아무래도 복희께서 기다린 자가 저놈인 모양이군!’
정황상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흥! 나는 놈들이 유물을 얻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천성으로서는 절대 치우 일족이 유물을 가져가게 할 수 없었다.
그들에 대한 원한도 깊었지만, 그간 이들이 행한 악행들을 생각할 때 치우 일족의 손에 유물이 들어가게 되면 강호에 피바람이 불게 될 것이 자명했다.
“하하하! 그거야 그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마음대로 하시게. 하지만 우리에겐 더욱 중요한 일이 있지.”
천성은 무슨 이야기인가 싶어 의아한 표정으로 복희를 바라보았다.
‘유물을 파괴할 것인지 결정하라는 것인가?’
이전에 화산에서 복희가 이야기했던 것이 언뜻 생각났다.
그때, 다시 한 번 문이 열리며 제갈승과 제갈중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허. 이거, 우리가 제일 늦었군그래. 하지만 아직 유물은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듯하군.”
제갈승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장내를 훑어보다 복희를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헌원의 제갈승이 복희를 뵈옵니다!”
눈치 빠른 제갈승은 즉시 무릎을 꿇고 용천광이 그랬듯 오체투지했다.
“그래, 이제 다들 모인 것인가? 뭐, 그건 어차피 중요치 않고.”
천성은 어쩐지 복희의 모습이 그동안 보아왔던 것과는 많이 다름을 느꼈다.
무언가 들뜬 듯했고,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복희는 초월자 여와의 복제체였다.
복희 또한 초월자처럼 감정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아니, 그동안은 분명 그랬다.
물론 천성을 만날 때마다 항상 미소를 짓곤 했지만, 그것은 감정과는 다른 것이다.
마치 인형의 얼굴에 걸린 미소와 같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늘은 분명 그의 감정이 느껴졌다.
목소리마저 평상시보다 조금 높은 것이, 상당히 상기된 모습이었다.
“복희께선 유물의 주인을 정하신 것입니까?”
그때, 제갈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일 치우 일족에게 유물이 돌아간다면 자신들의 앞날은 없었다.
자신들이 그랬던 것처럼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멸족시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복희는 그의 물음을 무시하고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수정관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첫 번째 수정관에 들어 있는 것은 바로 혼원수라네. 이것은 육신을 변화시켜 태초의 상태로 만들어 주는 귀한 물건이지.”
쩌어억!
순간, 벌어진 상황에 모든 이들이 경악스러운 얼굴로 복희를 바라보았다.
복희가 수정관을 부수어 혼원수를 쏟아 버린 것이다.
“이것은 영력을 사용하는 법과 기문을 생성하는 법이 담긴 비급이지.”
복희의 손이 나머지 수정관을 향했다.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수정관과 그 안에 보관되어 있던 비급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만은 그대와 의견이 같군. 저 미천하고 어리석은 족속들은 아직 힘을 가질 자격이 없네!”
복희의 말에 헌원과 치우 일족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또다시 이전처럼 복희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인간은 탐욕스러운 존재지. 그것이 생존 본능에 의한 어쩔 수 없는 현상임은 나도 알고 있다네. 하지만 그 더러운 본능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 모든 살아 있는 것들 중 오직 인간만이 적당히라는 것을 모르는 것들이지. 참으로 통탄스럽게도 나는 그들에게 힘을 주고 문명을 주었지.”
복희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헌원과 치우 일족은 두려움을 느꼈다.
이미 한 번 죄를 범해 내쳐졌던 그들이다.
또다시 복희가 그들을 벌한다면 이제는 무엇을 빼앗아 갈 것인가.
분명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 최악의 경우 목숨까지도 버려야 할 것이다.
“복희시여! 어리석은 저희를 용서하소서! 간절히 바라오니 이 한목숨 거두시고 일족의 살길은 터 주소서!”
위험을 느낀 용천광이 울부짖으며 간청했다.
“시끄럽구나! 너희는 아직 볼일이 없으니 입 다물고 조용히 엎드려 있거라!”
갑작스럽게 변한 복희의 기세가 사방을 압박했다.
헌원과 치우 일족은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천성은 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인가 알 수 없어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하하하하하!”
복희가 허공을 향해 광소를 터뜨렸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웃음을 멈춘 복희가 천성을 바라보았다.
“흠, 그래. 그대에겐 설명이 필요하겠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복희가 천성에게 다가왔다.
“그대도 알고 있겠지만, 나를 만든 것은 초월자 여와라네. 나는 여와의 명을 전하고 뜻을 행하는 일종의 사자이자 도구였지. 하지만 오랜 시간 인간들과 함께하다 보니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더군. 나는 분명 인간들이 두려워하고 칭송하는 존재였으나, 과연 인간들에 비해 무엇을 더 가지고 있는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인간과 스스로를 비교하기 시작했지. 내 모든 힘과 존재에 대한 고민이 그때부터 생겨났다네. 비록 초월자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으나 여와가 원할 때에만 가능했고, 세상에 현신할 수 있었으나 여와가 필요로 할 때만 가능했지. 그에 비해 인간은 어떠한가? 초월자가 베푼 끝없는 은혜를 받아 무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또 나처럼 초월자의 껍데기가 아닌 홀로 존재하고 자각하는 생명체지. 게다가 모든 걸 스스로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네. 나에게는 하나도 없는 것이지. 겨우 하찮은 인간 따위에게 너무도 많은 것이 주어진 반면, 그들이 떠받들고 추앙하는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네.”
복희가 지금 하는 이야기들은 치우와 헌원 일족에겐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거의 신으로 모시다시피 한 존재가 결국엔 인간을 부러워하던 신의 파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던 것이다.
“나는 무척 화가 났고, 인간에게 질투를 느꼈네. 그때, 어리석은 인간들이 탐욕에 젖어 서로를 죽이는 데 힘을 쓰는 것을 보았지. 분노한 나는 그들에게서 힘을 빼앗고 징벌을 내렸네. 하지만 그것은 여와의 뜻과는 어긋난 것이었어. 여와는 초월자. 인간은 그저 이 세상을 구성하는 구성원일 뿐이지. 그들끼리 무슨 일을 벌이든 행성이 멸망하거나 문명이 사라질 정도의 위기가 아니면 관여치 않는다네. 결국 내가 여와의 뜻과 달리 그 권능을 빌어 인간들을 징치한 것이지. 그 대가로 나는 열쇠에 봉인되어 세상에 현신할 수 없게 되었지.”
그때의 일이 생각났는지 복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너무도 불합리한 일이었어! 오히려 죄를 범한 인간들에게는 다시 힘을 찾을 기회를 주고 나는 열쇠에 봉인해 버리다니!”
분노한 얼굴로 복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복희는 여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인간들에게는 유적을 남겨 다시 힘을 얻을 기회를 준 반면, 자신은 열쇠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초월자와 가장 가까운 존재인 자신은 그나마 있던 것까지 빼앗긴 반면, 인간들에게 내린 징벌은 겨우 잠시 힘을 거두어 간 것뿐이었다.
그때부터 복희는 여와와 독립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을 꿈꾸게 되었다.
“그때, 여와로부터 인간들에게 내릴 신탁을 받았다네. 천률음보와 유적, 열쇠, 그리고 ‘태초의 파편’을 소유한 구원자에 대한 것이지!”
순간, 복희의 눈동자에서 광채가 일었다.
천성은 결국 이 모든 게 자신과 관련이 되어 있음을 느꼈다.
“나는 ‘태초의 파편’에 주목했네. 초월자와 연결된 나는 단편적이지만 우주의 진리를 엿볼 수 있다네. 해서 ‘태초의 파편’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지. 그 힘과 권능은 인간은 결코 상상도 못할 정도라네. 초월자조차도 ‘태초의 파편’의 권능을 함부로 할 수 없다네. 거기다 나처럼 이미 반신의 존재는 ‘태초의 파편’을 얻음으로 인해 초월자가 될 수 있지!”
천성을 불안하게 했던 느낌의 정체가 드러났다.
지금까지 이야기로 보아 복희는 ‘태초의 파편’을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결국 천성의 심장에서 태초의 파편을 가져가려 할 것이다.
그것은 곧 천성에게는 죽음을 뜻했다.
“자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해 주게. 물론, 여와가 도와주리란 기대도 말게. 초월자는 아까도 말했듯이 이 행성의 멸망이나 생명체와 문명의 말살이 걸린 일이 아니면 신경을 쓰지 않는다네. 어차피 내가 초월자가 된다 해도 이 행성을 멸망시킬 생각은 없다네. 그저 내 존재를 찾고 싶은 것이지.”
천성으로서는 어이가 없는 이야기였다.
결국, 복희가 초월자가 되려면 자신이 죽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미안한데, 태초의 파편이 필요하니 심장 좀 꺼내 줘’라는 이야기였다.
천성으로서는 당연히 들어줄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