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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의외로 그 셋의 무공이 강했지만 보아하니 그들만으로는 남은 여섯을 상대하기 힘들어 보였다.
티딩!!
뒤쪽을 힐긋거리다 적월은 훨씬 강력하고 빠르고 많은 화살에 뒷걸음질 쳐야만 했다.
적월은 시간을 계산했다. 생각 이상으로 시간이 걸렸고, 또 제대로 해결도 못한 데다 입수할 물건도 입수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외곽에 흩어져 몰래 빠져나가는 자들을 잡기 위해 배치한 백랑대 이 개 조가 와도 큰 도움은 되기 힘들 듯싶었다.
그리고 백랑대나 천랑대의 무공은 무림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일부만 알아볼 수 있었는데 여기에 남은 이들 중 알아볼 사람은 없어 보였다.
나중에 시신에 남은 자상을 보고 확인하겠지만 그런 거야 잡아 떼면 그만이었다.
무공 초식을 직접 보지 않는다면 전문가가 상처를 보고 초식을 유추한다 해도 그것이 맞다는 보장은 없었다.
천하에 변초가 얼마나 많고 유사한 초식은 또 얼마나 많으며 조작의 가능성도 있는데 어떻게 장담을 하겠는가.
한마디로 현장에 있던 인물들이 그 무공이다라고 알아보지 않는 한 자신들의 정체를 규명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퇴각한다!”
적월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무림맹 본대가 도착할 때까진 아직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지만 여기서 죽어 나간 선발대처럼 소수가 먼저 와 자신들을 보고 무공을 알아보면 곤란했다.
결코 그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지금 시점에 큰 문제를 만들 이유가 없어서였다.
적월의 명이 떨어지자 백랑대가 우선 벗어났고, 천랑대가 몸을 뺐다.
단연경은 겨우 진법의 변화에 적응해 본격적인 실력을 발휘하려는 찰나 그들이 물러나자 따라붙으려 했다.
하지만 뒤이어 따라온 적월의 연속적인 공격에 멈추어야만 했다.
“오늘은 그냥 간다만, 나중에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애송이 네놈과 거기 활 들고 설친 두 놈! 잊지 않겠다!”
적월은 호로병이 있는 상자를 옆구리에 끼더니 이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단연경은 남의 물건을 챙겨서 도망치는 주제에 자주 들었던 말에 피식 웃었다.
‘저건 또 책이랑 똑같네. 나중에 후회하게 해 주마. 악당의 전형적 대사.’
단연경은 이래서 책 속의 내용을 다 버릴 수가 없었다.
6. 아! 사부님!
그들이 모두 물러나고 나자 후인동 등이 그를 알아보고 다가와 크게 기뻐하며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또한 금화장주인 예광기와 간단하게 인사를 듣고 곧바로 진화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워낙 넓은 데다 불길이 거세서 몇 명이선 도저히 어떻게 하기 힘든 상태였다.
단연경으로서도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런데 이때 어디선가 거의 삼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나타났다.
분명 전투에 참가하고 있던 그 복면인들과 지금은 죽어 버린 무인들이 전부였었다.
어디에도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이었고, 일부는 약간의 무공을 익힌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주변을 확인하더니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당히 조직적이었고, 또 내부 구조를 잘 아는 듯 빠른 동작으로 불길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단연경이 그들의 출현에 당황해하자 후인동이 다가와 설명해 주었다.
“모두 본 장의 사람들이네. 겁란에 대비해 장 내에 비밀 공간을 만들어 뒀었는데 그곳에 몸을 숨기고 있다 나온 것이지.”
“아…….”
어찌 되었든 그들의 노력으로 해가 뜰 무렵엔 불길을 거의 다 잡아낼 수 있었고, 시신들도 수습했다.
대략의 정리가 끝나자 금화장주인 예광기가 손녀들과 환상적인 활 솜씨를 보여 준 사내와 함께 단연경을 찾아와 다시금 감사의 뜻을 전했다.
“단 대협의 도움 다시 한 번 고맙게 생각합니다.”
깎듯한 예광기의 인사에 단연경은 깊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협과 의를 행하는 이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말씀 편히 하십시오.”
“그래도 되겠는가?”
예광기는 사양하지 않고 곧바로 말투를 바꿨다. 단연경은 아는 것과 약간은 다른 반응에 흠칫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허허허. 무척이나 호방하구만. 그래, 노부가 대충 이야기는 들었네. 우리 수아의 목숨을 구명해 준 일이 있다고?”
“우연찮게 그리되었습니다.”
예광기는 그토록 큰일을 당했음에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무척이나 담담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갔다.
단연경은 무림의 고수이든 아니든 어쨌든 일가를 이룬 이는 확실히 대범한 면을 가지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런데 어떻게 본 장을 온 것인가? 듣기로는 다른 곳에 볼일이 있다 하던데 말이야.”
“실은 볼일이 있다는 곳이 바로 이곳 금화장이었습니다.”
“오호, 그랬는가? 이런 우연이 있나. 허허허. 그 특별한 우연이 본 장의 위험을 넘길 수 있게 하다니, 실로 재미있구먼.”
“저도 신기해하고 있습니다.”
“그래, 자네의 볼일이라는 게 무엇인가? 보아하니 자네는 본 장엔 처음인 것 같은데.”
“소생의 사부되시는 분께서 이곳에 물건을 맡겨 두었다고, 찾으라 하셔서 온 길입니다.”
“사부가 물건을 맡기셨다고? 흐음, 존장의 존성대명이 어찌 되시는고?”
예광기는 단연경의 말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지만, 모른 척하고 물었다.
“존성대명은 아니고 그저 평범한 도사님이십니다. 도호는 옥허라고 하시지요.”
“오오!”
예광기는 고개를 끄덕였고, 예사란은 이채를, 예수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십니까?”
장주 정도 되면 아주 큰 고객이 아니면 상대하지 않는다. 옥허 진인이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명성이 자자한 것도 아니어서 장주가 알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단연경이었다.
“물론일세. 노부가 젊은 시절부터 인연이 있던 분이시지. 어쩐지 이름이 무척 낯익다 했는데 그분이 늘 말씀하셨던 제자가 바로 자네였구만.”
흐뭇한 미소를 짓는 예광기를 보며 단연경은 조금은 안도를 했다.
워낙 엉뚱한 면도 많고 남들(거의 종남파)에게 자신에 대해 험담을 많이 해서 예광기에게도 이상한 소리를 한 게 아닌가 해서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수아 넌 가서 옥허 진인께서 맡기셨던 걸 가져오너라.”
예수란이 밖으로 나가자 예광기가 말을 이었다.
“늘 뛰어난 제자 하나가 있다고 하셨지. 무공도 학문에도 꽤 재능을 보인다고 말이야.”
“그러셨나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셨지. 안 그렇더냐, 란아?”
예수란 옆에 있던 또 한 명의 미녀에게 묻자 그녀는 연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러셨지요. 하도 칭찬을 하셔서 무척이나 궁금했었습니다.”
기품 있고 차분하면서도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 모습은 자매라고 하는데 예수란과는 전혀 달랐다.
예수란이 물건을 가져오는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예사란은 단연경에게 꽤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단연경 역시 그녀의 말에 성심성의껏 대답을 했는데 예광기는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얼마 뒤 예수란이 큰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특히 부드러운 미소로 예사란과 이야기를 나누는 단연경의 모습을 보고 살짝 얼굴이 굳어졌다.
‘뭐야, 나한테는 그렇게 험하게 막 대하더니 언니한테는 이렇게 대한다 이거지?’
예수란에게서 봉투를 건네 받은 예광기는 단연경에 전해 주며 말했다.
“진인께서 자네에게 전하라 한 것이 이것일세. 그리고 이것은 인수증일세.”
봉투를 건네받은 단연경은 봉투의 뒷면을 봤다. 봉합은 완벽했고, 수인도 되어 있었으며 단연경에게 남김이란 글도 분명 사부인 옥허의 필체였다.
“확인했으면 여기에 지금 시간과 인수한 물품에 대해 쓰면 되네. 그리고 이곳에 수인을 해 주면 끝이네.”
예광기는 인수증의 몇 곳을 손으로 가르키며 친절하게 설명했다.
단연경은 예광기의 친절한 말에 따라 별 생각 없이 예광기의 말에 따라 날짜와 인수 시간, 인수 물품에 대해 쓰고 수인을 맺었다.
하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부드러운 눈빛 깊은 곳에서 반짝거리는 매의 눈빛을 말이다.
“되었네. 인수는 끝났네.”
“감사합니다.”
단연경의 말에 예광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두 손녀에게도 일어나라고 한 후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다시 한 번 수아를 구해 주고 간밤의 겁화에서 우리 금화장을 구원해 준 일, 정말 고맙게 생각하네.”
예광기의 행동에 단연경은 살짝 당황하며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맞절을 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아닐세. 우리 모두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인데 이걸로도 부족하네. 그래, 이렇게 하세. 노부가 가진 것이라고는 돈 정도밖에 없으니 자네에게 그걸로 보답하겠네. 란이 넌 가서 지금 있는 돈을 다 가져오너라. 아마 한 십오만 냥 정도는 될 것이야. 그리고 안휘성에 있는 우리 사업장에 대한 권리서도 챙겨오너라.”
“예.”
굉장히 파격적인 것이었지만 예사란은 군말없이 밖으로 나가려 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러지 마십시오. 제가 한 건 어디까지나 협과 의를 행한 것입니다. 결코 그런 돈을 바라고 한 게 아닙니다.”
“그래도…….”
단연경이 극구 사양하자 예광기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뭐,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받아들이도록 하겠네. 흠흠.”
예광기는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허허허. 정말 자네 같은 사람은 요즘 세상에 보기 힘들 게야.”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은 멋쩍은 웃음소리였다. 단연경은 그저 고마움 때문이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별말씀을요.”
“그런데 자네, 안의 내용물을 확인해 보지 않는 겐가?”
예광기의 말에 단연경은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그의 눈 깊은 곳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단연경은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참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사부의 눈빛과 똑같은 빛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부가 이런 눈빛을 보인 후 항상 고생을 했었다. 실례로 사부가 그 눈빛을 마지막으로 보인 하루 뒤, 그는 폐관에 들어 오도 가도 못하고 십오 년을 지냈었다.
단연경은 부랴부랴 봉투를 개봉해 안의 내용물을 펼쳤고 그 안의 내용을 읽는 순간 사람의 턱이 어디까지 벌어질 수 있는지를 모두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안에 들어 있던 종이의 맨 위에는 멋들어진 글씨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차용증(借用證)
‘이거였구나. 서찰을 처음 봤을 때의 그 묘한 기분과 목 사숙이 웃었던 그 의미가……. 사부님이야 그렇다 해도 목 사숙은 너무하시네. 알면서 귀뜸도 안 해 주시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내용을 읽어 나갔다. 일단 일은 벌어졌으니 해결책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내용을 알아야 제대로 대처할 것 아닌가. 그리고 빌린 돈이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었으니 좀 귀찮고 고생스러워도 해결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딱 두 줄 읽었을 때 열이 뻗쳐 얼굴이 구겨졌고, 세 번째 줄을 넘었을 때는 열 뻗치는 걸 넘어서서 경악으로 입이 떡 벌어졌다.
차용증의 내용은 간단했다.
첫 번째 줄은 갑(사부)과 을(금화장)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자금을 차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줄부터는 차용이 발생한 날짜와 금액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칠 년 전 처음 차용이 발생했고 금 오천 냥을 시작으로 일 년 전까지 육 년에 걸쳐 무려 금 이만오천칠백이십팔 냥을 차용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이자율은 연 사리로 나름 저리였지만, 금액의 규모가 있다 보니 이자만 해도 상상을 불허하는 금액이었다.
거기다 제일 중요한 사항은 단연경이 이에 대한 상환 의무를 갖을 것이며 차용증을 인수할 때 그 권리(?)가 발생한다고 적혀 있었다.
차용증은 두 장이 작성되어 간인까지 완벽하게 되어 있어 지금 이걸 없애도 소용이 없었고, 문구도 전혀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아! 사부님!’
단연경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아마 태어나서 가장 빨랐을 것이다.
금액 수준으로 볼 때 잘못했다가는 자신의 꿈도 못 펼쳐 보고 빚 갚다 인생 마감하게 생겼으니 당연했다.
객점에서 파는 가장 싼 국수 한 그릇이 보통 동전 다섯 냥이었다.
동전 백 개가 은 한 냥이었고, 은 열 냥이 금 한 냥이었다. 이렇게 계산하면 차용한 원금만으로도 국수 오백십사만오천육백 그릇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현재 직업군 중 가장 고수익을 올린다는 전장의 지점장 월급이 은 구십 냥 정도라고 들었다.
물론 이건 십오 년 전 폐관에 들기 직전 그 해 발간된 직업군별 소득이란 책에서 본 것이니 지금은 물가 상승률을 생각해 대충 백 냥 정도라 예측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기준으로 계산하면 한 달에 금 열 냥을 버는 셈인데 한 푼도 안 쓰고 열심히 모아도 무려 이백십사 년이란 시간 동안 모아야만 가능한 금액이었다.
여러 가지 셈법을 익히고 있는 단연경이었고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보니 이 정도 계산하는데 걸린 시간은 숨 두어 번 쉴 정도의 극히 짧았다.
‘침착해라. 마음은 잔잔한 물과 같이, 몸가짐은 산악과 같이…….’
심법을 운용하며 순간적으로 벌어진 입을 닫고 담담한 표정을 만들어 낸 단연경은 무시무시한 집중력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차용증을 내려놓은 후 차를 한 모금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