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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숨 두어 번 쉬는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짜증에서 분노로, 분노에서 경악으로, 경악에서 담담함으로 변해 가는 단연경을 보며 예광기는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예사란은 큰 변화 없이 차를 마셨고, 예수란은 회심의 미소와 함께 어떻게 잡아 나갈까 계산하기 시작했다.
단연경은 찻잔을 슬며시 내려놓고는 연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 돈, 정말 저희 사부님께 빌려 주신 겁니까?”
“물론일세. 좋은 곳에 쓰신다고 하셔서 그냥 기부하겠다고 했는데 굳이 빌리는 것으로 한다고 하시더군.”
그 말을 듣는 순간 백회혈 부근이 펑하고 터지는 기분이었지만 초인의 경지에 든 심법을 바탕으로 표정 관리를 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셨군요. 그럼 지금이라도 기부하는 걸로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음…… 그럴 수야 없지 않겠는가? 자네는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이 사업이란 게 자금 계획을 늘 동반하게 되어 있거든. 그 당시에 기부했다면 이 금액은 자금 계획에서 빠졌겠지만 이게 대여하는 시점에 이미 모든 게 계획에 포함되서 말이야.”
“그렇지요. 자금 계획이야말로 큰 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기본이지요. 하하하…….”
단연경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예사란이나 예수란의 눈에는 무척이나 담담하고 여유 있어 보였지만, 예광기의 눈에는 그의 당혹스러움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연륜이 그의 아주 미세한 변화를 잡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자, 수를 내 보거라.’
예사란과 예수란도 이 차용증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옥허와 예광기만 아는 이야기가 또 하나 더 있었기에 단연경을 보며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있는 것이다.
‘아, 망할! 아까 준다고 할 때 받을 걸. 그랬으면 이 빚하고 퉁치는 거잖아. 가만, 이걸 노리고 아까 그런 건가? 이런 망할 영감탱이가…….’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지나간 배였다. 이제 와서 준다고 했던 돈을 다시 달라고 하기도 그랬고 설령 말해도 과연 줄까 싶었다.
진짜 줄 것 같았으면 아까 그런 연극도 하지 않을 것이다.
“헌데, 이걸 갚지 않게 되면 어찌 됩니까?”
“글쎄, 생각은 안 해 보았네만 자네가 이걸 못 갚는다고 하면 원 계약자에게 다시 추심을 해야겠지.”
“그게 맞겠지요?”
담담함을 유지한 채 단연경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그의 모습이 살짝 흐릿해진다고 느꼈다.
파파팍!
그리고 그 순간 문쪽에서 타격음이 들려왔고 앉아 있던 그의 모습이 스르륵 사라졌다. 단연경이 단거리 이동에 있어서 꿈의 경지라는 이형환위를 펼친 것이었다.
“……!”
예광기 등이 놀라 문쪽을 보니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단연경과 활로 적월을 괴롭혔던 사내와 손을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일 척가량의 거리를 두고 마주서서 밀고 당기고 치고 막고 있었다.
워낙 가깝고 그 자리에서 두어 발 정도 왔다 갔다 하며 싸우는지라 오직 권법에 의지해 손을 나누고 있었다.
파파팍!!!
동작은 크지 않고 짧고 간결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경지만큼이나 강렬한 내력과 힘이 실려 한 수 한 수가 필살기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의 동작은 권법이라고 말하기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주먹은 물론 반주먹에 손날과 팔꿈치, 장심을 사용하는가 하면 꺾고 할퀴고 잡아채기까지 골고루 섞여 있었다.
거기다 한 동작마다 인체의 가장 약한 부위로 날아드는 살기 넘치는 동작으로 중원에서는 이런 류의 무공은 없는 것이었다.
파파파파팍!
“윽!”
“흡!”
격렬하게 싸우던 단연경은 순간적으로 가슴 쪽이 열리며 연속으로 두 대를 얻어맞고는 짧은 신음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
다만 힘 조절을 해 줘서인지 아프기는 했지만 어디가 부러지거나 내상 같은 치명타를 입지는 않았다.
“헉헉!”
두 사람 모두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매서운 눈으로 잠시간 노려보았다. 그러다 단연경의 시선이 살짝 왼쪽 창으로 향하자 사내도 그쪽 방향으로 발을 조금 옮기며 입을 열었다.
“그 실력으로는 날 뚫고 나갈 순 없다. 포기해라.”
그 말에 단연경은 바로 답하지 못한 채 서 있다 몸에서 힘을 빼더니 왼쪽 가슴 위쪽을 문지르며 말했다.
“혹시 아저씨가 최기원(崔己元)이란 분이십니까?”
“그렇다.”
“어쩐지……. 가르침 고맙습니다.”
단연경은 머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그러자 최기원이 예의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가 쓴 걸 보고 수박(手搏)을 생각 이상으로 잘은 익혔다만, 유연함이 부족하다.”
“예.”
최기원의 충고에 다시금 머리를 숙여 보인 단연경은 자리에 와 앉았다.
“도망갈 생각은 버렸는가?”
조금 전 차용증을 보자마자 도망치는 걸 성공했다면 모를까 나중에 도망치는 건 사나이로서 할 일이 아니었다.
그럼 빚을 청산하는 길 이외에는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없으니 최대한 유리한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도망이 아니라 사부님을 찾아 확인을 좀 하려 한 것일 뿐입니다.”
단연경이 시침 뚝 떼고 말하자 예광기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이순간은 노련한 사업가의 모습이었다.
“허허허. 그랬는가? 이거 오해를 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예사란은 굉장히 다채로운 단연경의 모습에 더욱 흥미가 생겼는지 계속 그를 주시했다. 그 모습에 예수란은 괜시리 화가 났고, 그 화의 방향은 단연경에게 향하며 더욱 그의 행동이 싫어졌다.
“때가 되면 사부님이 오실 테니 그때 확인은 하기로 하고, 계약은 계약이니 이행하도록 하죠. 단, 도움을 좀 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도움을 원하는가?”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의 구 할은 책에서 얻은 것들입니다. 즉, 현실과는 차이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현실적 조언 같은 걸 원하는 겁니다.”
예광기도 지금 이 순간 단연경과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사업가 대 사업가의 대결로 이기는 사람이 조금 더 이윤을 가져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 건 공짜로 해 주지 않네만…….”
그러자 단연경은 심각해진 얼굴로 예광기를 보다 손을 쭉 내뻗었다.
워낙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었는지라 최기원이 막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차!’
하지만 무슨 큰 문제가 벌어지진 않았다. 다만…….
“어르신! 이자까지 생각하면 큰 고객이니 이 정도는 그냥 해 주셔도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예 못 갚을 수도 있는 판에 갚을 길을 알려 주셔서 조금이라도 많이 받아 내시는 게 더욱 큰 이득 아니겠습니까?”
예광기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꼭 부여잡고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입에는 비굴한 웃음이 걸린 괴이한 표정으로 말하는 단연경이었다.
“음……. 그러니까 한 푼도 못 받는 것보단 답을 알려 주고 조금이라도 회수하는 게 낫다, 이건가?”
“그렇죠. 책에서 보니 이걸 바둑에 비유해 대마불사(大馬不死)라고 하더군요.”
“흐음…….”
예광기가 날카로운 눈으로 단연경을 보았다. 하지만 단연경 역시 지지 않고 이를 받아 냈다.
“좋네. 단, 계약서 하나 쓰세. 생판 남한테 길을 보여 주는 건 일종의 영업 방식에 대한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니 말이야.”
“좋습니다.”
계약서 작성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뜻밖에도 계약서 양식이 있었던 것이다.
말로는 이런 일이 가끔 있어서라지만, 역시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그렇지만 딱히 증거가 없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계약 내용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금화장 소속으로 일을 처리한다. 기본급은 월 금 열 냥으로 하고, 업무에 따라 성과급을 별도 지급한다. 성과급의 규모는 업무의 성격 등을 종합하여 협의에 따라 정한다. 급여는 매년 협의에 따라 조정하며, 매년 갱신에 대한 재계약을 별도로 진행한다.
둘째, 업무 시간은 진시부터 미시까지로 하며, 그 외 시간에 일을 할 경우 기본급의 일점오 배로 계산하여 지급한다. 오 일 근무 후 이틀을 휴식한다. 이와는 별도로 하계 휴가 오 일(유급), 연 십오 일(유급)을 임의로 쉴 수 있다. 단, 이를 행사하지 않을 경우 일 년이 되는 시점에 기본급의 일점오 배로 계산하여 지급한다.
셋째, 업무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상식과 의와 협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하며, 계약은 양쪽 모두 신의와 성실을 바탕으로 이행한다.
계약서 내용을 꼼꼼히 확인하고 필요한 부분은 수정을 하고 수인을 맺고 간인을 했다.
“됐네. 이것으로 자네는 우리 금화장의 식구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단연경이 시원스럽게 말하자, 예광기는 씩 웃더니 빈 종이를 꺼내 휙휙 글을 써 내려갔다.
상환 확인서
금 이만오천칠백이십팔 냥을 상환받았음을 확인함.
상환 확인서를 다 쓴 후 수인을 하고 간인을 한 예광기는 이를 단연경에게 내밀며 말했다.
“수인하시게.”
예광기의 말에 단연경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뭐하는가? 어서 수인하지 않고. 그냥 이건 없던 일로 할까?”
“아닙니다. 당장 합죠. 그럼요.”
단연경이 재빨리 수인하자 예광기는 허허롭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좀 쉬시게. 내 자네에게 줄 만한 일을 조만간 찾아 알려 주도록 하겠네.”
“예. 부디 비싼 걸로다가 부탁드리고 아울러 앞으로도 계속 지금처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요.”
단연경은 시작과 동시에 반 이상의 빚을 털었다는 기쁨에 인사를 했다. 아직까지 세상에 덜 적응한 단연경이었다.
고작 조삼모사(朝三暮四) 수법에 걸려들고 좋아라 하니 말이다.
7. 교토삼굴
태사각으로 돌아온 예광기는 자리에 앉자마자 최기원을 보며 물었다.
“직접 가르친 건 아니지만 자네가 만든 책을 통해 익혔으니 제자나 다름없지. 그래, 제자를 본 기분이 어떤가?”
“장주님의 말씀대로 제가 쓴 책을 보고 배운 것일 뿐이니 제자는 아닙니다. 다만 고국의 무공을 그것도 제대로 익혀 저와 손을 섞을 수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은 좋았습니다.”
고국이란 말을 하자 최기원의 눈 깊은 곳에 잠시 아련함이 스쳤다.
“그러지 말고 정식으로 제자로 들여 자네의 그 활술과 검법도 가르쳐 보지 그래? 옥허 진인께서도 자네 정도라면 연경이란 아이의 사부가 되기에 충분하다 했으니 말이야.”
“아닙니다. 제가 수박을 책으로 만들어 진인께 드린 것은 과거 마마의 옥체를 돌보아 주신 것에 대한 보답일 뿐이었습니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중원인에게 무공을 전하는 일 따윈 하지 않았을 겁니다.”
“허허허. 자네를 버리고 며늘아기를 버린 나라일세. 그런데도 충의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나라가 버린 게 아니고 위정자들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나라에 대한 백성에 대한 충의를 저버릴 순 없지요. 전 나라의 힘이 되어 줄 사람이 아니라면 무공을 전수할 생각이 없습니다.”
“자네를 보면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 알겠네.”
최기원. 그는 중원인이 아닌 고려인이었다. 약 삼십여 년 전 고려의 왕족 신분인 며느리가 몽고의 공녀로 올 때 호위대의 인솔 무장으로 중원에 왔었다.
그 당시 원 황실은 당금의 명 황실의 공격을 받아 쫓기게 되면서 원 황실엔 들어가 보지도 못했었다.
고국으로 되돌아가려 길을 돌렸지만 고려에서는 그들을 반기지 않았다. 고려에는 친명파가 대두되는 시점이었는데 그들은 공녀 일행을 나라의 수치로 매도해 그들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데 이용했다.
그리고 원을 밀어내고 중원의 주인이 될 가능성이 높은 명 황실에 잘 보이고자 그들을 원 황실의 첩자란 이름으로 잡아 바치려고까지 했다.
결국 명 황실과 고려에서 파견된 이들에게 쫓기된 공녀 일행은 정처없이 중원을 떠돌게 되었다. 다행히 원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느라 명황실의 추격은 유야무야되어 어느 정도 피해 다닐 수 있기는 했다.
그러나 고려에서 파견된 이들은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위협했다.
쫓겨 다니기를 일 년, 간신히 고려에서 파견된 병력을 모두 제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공녀들은 모두 죽고 최기원과 수하 무장 셋, 그리고 며느리만 살아남아 있었다.
그나마 최기원은 비교적 멀쩡했지만 수하 무장 셋은 마지막 전투에 큰 상처를 입었고, 며느리는 오랜 도망으로 건강이 쇠해져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사경을 헤매이고 있을 때 하늘의 도움인지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예광기와 그의 아들에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뒤 며느리는 아들과 맺어져 예사란과 예수란을 낳았고, 호위무장이었던 최기원은 그녀의 호위로서 금화장에 머물렀던 것이다.
예광기는 최기원의 고집을 잘 알았기에 시선을 돌려 예사란에게 말했다.
“곧 무림맹의 본대가 도착할 터이니 준비들 하거라.”
“예. 할아버지.”
예광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분에 넘치는 물건이 들어와 선대 때부터 어렵게 쌓아 올린 가업이 무너지려 하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아직 무너지지 않았잖아요. 그리고 그 물건도 무림맹에 넘기면 더 이상 문제도 없을 거구요.”
예수란이 위로의 말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