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4화
“이 할애비도 그랬으면 좋겠다만, 세상이 그리 단순하지가 않지 않더냐. 그리 조심했음에도 정보가 밖으로 샜는데 이제 공식적으로 우리가 지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천명한 꼴이니 천하에 모든 이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야. 그럼 개떼처럼 몰려와 지도에 대해 묻고 어떻게든 얻어 내려 할 테지.”
예광기의 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런 일이 안 벌어지길 바라며 한 말일 뿐이었다.
“우리를 공격했던 그자들, 아마 백운곡일 것이다. 현 무림에서 그만한 고수들을 보유한 곳은 무림맹 아니면 백운곡이니 말이야. 어쨌든 백운곡이 맞다면 물건이 세 가지 중 지도란 것도 알 가능성이 많을 게야. 그럼 필사본 혹은 외워 두었을 것이라 생각해 분명 다음 기회를 노릴 테지. 아울러 우리 금화장을 풍비박산 내려고도 할 테고.”
“…….”
예수란의 표정이 침울해지자 예광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리 침울해할 것 없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만, 그 뜻만은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금화장이란 이름은 사라질지 모르지만 그 의미만은 너희에게 이어질 것이니 이 할애비는 괜찮다. 그러니 마음 편히 갖거라.”
무당파의 청수(淸水) 도장이 이끄는 무림맹 본대는 사시초에 도착했다.
청수 도장은 선발대의 전멸 소식에 놀라기도 했고, 또한 한편으로는 슬퍼했다.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무림맹에서는 실력자들을 중심으로 꽤 많은 인원을 보냈었다.
선발대들도 강호 경험이 많고 실력이 괜찮은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의 무인들이었는데, 그들이 전멸했다 하니 놀라고 슬퍼한 것이다.
청수 도장은 죽은 선발대를 위해 간단한 의식을 치른 후 곧바로 이들과 침입자들의 시신을 인계받았다. 청수 도장은 곧바로 무림맹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킨 후 예광기를 찾았다.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눈 예광기는 일 척 정도 크기의 상자를 잘 싸서 청수 도장에게 넘기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청수 도장, 모쪼록 잘 부탁하겠습니다.”
청수 도장은 도호를 외우며 말했다.
“무량수불, 물론입니다. 이런 귀한 물건을 아무 조건없이 천하를 위해 본 맹에 넘기시기로 한 장주의 마음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예광기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그렇게 노부의 얼굴에 금칠을 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비록 그 물건이 귀한 것이기는 하나 분에 넘치는 것입니다. 자고로 분에 넘치는 물건은 복(福)이 아닌 화(禍)가 되는 것인지라 천하의 정의를 위해 일하시는 분들에게 인계를 하는 것이지요.”
솔직한 예광기의 말에 청수 도장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말씀하셔도 용단은 용단이고, 큰일을 하신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요. 앞으로 본 맹의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고 말씀하십시오. 곧 맹주령으로 포고문이 나갈 것입니다. 내용은 힘 닫는 한도 내에서 본 맹은 물론이고, 맹에 가입된 모든 문파들이 최선을 다해 도와드릴 것이란 내용이지요. 이것이 귀한 물건을 기부하신 금화장과 장주에 대한 본 맹의 결정입니다.”
“신경 써 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허나 우리 금화장을 위해 그리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좋은데 써 주시기만 하면 그걸로 족합니다.”
“허허허. 아닙니다. 그 정도는 해드려야죠.”
몇차례에 걸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자는 예광기의 말은 묵살되어 버렸다.
무림맹 입장에서야 정말 귀한 희대의 물건을 입수했으니 그것을 보내 준 이에 대해 보답을 해야 했으니 당연했지만, 예광기 입장에선 이 물건이 자신의 손에 있었던 게 알려져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에 사양을 한 것이었다.
‘이런 멍청한 자식들…….’
이게 웃고 있는 예광기의 진실한 속마음이었다.
하루가 지난 뒤 무림맹 본 대 중 칠 할은 귀환에 올랐고, 나머지 삼 할, 약 삼십여 명이 금화장에 남아 추가로 있을 공격에 대한 방비를 맡아 주었다.
하지만 예광기는 이들을 삼 일 만에 돌려보내 버린 후 금화장의 모든 사업을 빠르게 재편하는 작업을 진행시켰다.
* * *
태사의에 턱을 괸 채 비스듬히 기대앉아 손가락 끝으로 팔걸이를 톡톡 치던 곡주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었다.
“이 사태를 본 좌가 어찌 받아들여야 되는 거지? 무려 본 좌에 이어 우리 백운곡의 서열 이 위이신 적월 부곡주와 서열 육 위이신 공손월 장로께서 천랑대 한 개 조와 백랑대 다섯 개 조를 이끌고 가서 고작 가져온 게 저딴 물건들이다? 그것도 무려 열 몇 명이나 되는 대원은 죽어 나갔고?”
“면목 없습니다. 곡주님.”
적월이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떨궜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무림의 대문파를 상대한 것도 아니고 일개 상가(商家)를 상대로 이만한 전사자가 나온 건 백운곡 오백 년 역사 속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끔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무지막지한 무력을 보유한 곳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무림세가로 거듭나는 게 일반적이었다.
백운곡 초창기인 사백 년 전쯤 정도무림 최강이라 불리던 적성세가가 대표적 예로 그들은 상가로 시작해 무가로서 최전성기를 누렸었다.
그 당시 무림일통을 위해 움직인 백운곡과 전면전을 벌여 적성세가는 무너졌고 그들의 무공은 백운곡 서고에 고이 모셔져 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백운곡은 당시 전력의 팔 할을 잃고 오십 년 가까운 세월을 회복에만 소모시켜야만 했었다.
어쨌든 그건 상가라기 보다는 무가로 받아들여야만 했으니 열외였다.
“후우, 아니오. 보고대로라면 그만한 사상자로 끝난 게 다행일 수도 있지. 무려 화경급에 해당하는 자가 둘이나 있었으니 말이오. 백랑대의 결원과 사망자에 대한 내외 문제는 알아서 잘 해결하도록 하시구려.”
“알겠습니다.”
적월과 공손월이 자신의 자리로 물러나자 곡주는 여문학을 보며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
포괄적인 질문이었지만 여문학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진본이 무림맹에 넘어간 이상 그를 입수하는 건 전면전을 실시하지 않는 한 사실상 어렵습니다. 이번에는 관의 조사를 적당선에서 무마시켰습니다만 무림과 무관한 상가를 대상으로 이번 같은 일을 벌일 경우 관의 대대적 조사를 막아 낼 방도가 없습니다. 따라서 금화장에 대한 직접 공격은 무리지요.”
“…….”
곡주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쭉 늘어놓자 살짝 짜증 섞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문학의 능력은 나무랄 데가 없는데 가끔 지나치게 설명이 길다는 흠이 있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심기가 불편한 경우 사설은 넘기고 요점만 간단히 듣고 싶을 때는 더더욱 문제였다.
여문학은 곡주의 표정을 보고 찔끔했다. 사실 빼도 되는 이야기를 했다가 곡주에게 끌려가 얻어맞은 적이 몇 번 있었던 것이다.
찔끔한 여문학은 아직 몇 가지 더 말할 게 있었지만 몽땅 건너뛰고 바로 요점 정리로 들어갔다. 물론 말도 굉장히 빨라졌다.
“금화장에서 입수한 진품을 넘겼다 해도 모사품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뼛속까지 상인인 예광기가 그걸 그토록 쉽게 넘겼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 금화장을 노리는 게 유리합니다만…….”
요점 정리로 들어갔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결론 쪽으로 말이 돌아가자 곡주가 입을 열었다.
“한 이 년 됐나?”
“헉!”
곡주의 말에 여문학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이 년이란 시간은 바로 마지막으로 얻어맞은 때였다.
안색이 살짝 핼쓱해진 여문학은 말에 가속을 붙였다.
“그러니까 금화장 공격시 관에서 관심을 갖는 건 워낙 큰 상가란 사실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금화장이 작은 상가라면 관의 조사는 그리 심하지 않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그래서 금화장을 관에서 관심을 갖지 않을 정도로 무너뜨려 놓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거의 한 호흡에 이 긴말을 해낸 여문학은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
태사청에 모인 이들 중 무공이 가장 낮았지만 그래도 절정 중급에 해당하는 그였지만 역시 말을 할 때 호흡 조절은 쉽지가 않았다.
여문학은 호흡을 조절하며 곡주의 눈치를 보니 약간은 안색이 풀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금화장의 재력을 무너뜨리겠단 건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쉬워? 중원 오대 부호잖아. 그런 집안이 쉽게 무너질까? 그냥 일반적인 부자도 망하는데 삼 년이 걸린다잖아.”
“금화장은 생각 이상으로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왜?”
“그건 금화장의 사업 구조 때문입니다. 보통 부호들은 농업(農業)을 기반으로 합니다만 금화장의 경우 전장업을 통해 일어서 상업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습니다. 전장업이나 상업이나 모두 재력이 막강하면 지탱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신용이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당장 재력이 막강해도 신용이 무너지면 순식간에 재력은 사라지게 됩니다. 자금의 유동성이 높은 만큼 신용이 떨어지며 흐름이 막히면 순식간에 재력은 말라 버리는 것이지요.”
아주 간단히 알아듣기 쉽게 요약 설명한 경제론이었지만 수뇌들 중 이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공만 죽자고 익히고 글공부라고는 얼마 하지 않은 이들이니 당연했다.
심지어 백운곡 역대 곡주들 중 가장 박식하다는 곡주조차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으니 말 다한 것이다.
하긴 경제 원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오랜 시간 학문에 매진한 서생들도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었다.
모두의 표정이 도대체 무슨 말이란 듯이 보이자 여문학은 보충 설명을 했다. 어린아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말이다.
“간단하게 농사짓는 만석꾼들은 땅에서 나는 걸로 부를 쌓으니 풍년이 들면 조금 더 벌고 흉년이 들면 조금 적게 벌지요. 즉, 외부 요인에 의해 재력이 많이 변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지요. 하지만 상단의 경우 영업을 통해 주문을 받아 물건을 사 와서 다시 이윤을 붙여 팔지요. 그런데 물건을 제대로 못 팔면 어찌 되겠습니까? 돈을 쓰기 만한 꼴이 되겠지요. 즉, 외부 요인에 의해 변동이 크게 온다는 의미입니다. 또 전장의 경우 돈을 맡기고 어음을 사용하는 것인데 어음을 내밀었을 때 바꿔 줄 돈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쇼. 맡겨 두겠습니까?”
그제야 곡주는 완전히 이해했고 나머지는 어렴풋이나마 알아들은 듯 보였다.
“그러니까 적당히 외부 요인을 만들어 주면 금화장은 무너지고 나중에는 관에서 어찌 되든 신경 쓰지 않는단 말이구만.”
“맞습니다.”
“하하하! 좋은 방법이로구만. 시행하게.”
“알겠습니다.”
그밖에도 몇 가지 안건을 처리하고 회의가 종료되었다. 곡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다 문득 멈추더니 말했다.
“아참, 금화장에서 챙겨 온 물건들 말이야. 그건 잘 처분해서 이번 작전에서 전사한 백랑대원 가족에게 위로금 재원으로 사용하게.”
“저, 곡주님.”
적월이 재빨리 말했다.
“몇 가지는 뺐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무슨 소리지? 적월 부곡주는 원래 재물에 관심이 없지 않았소?”
“그렇긴 합니다만 몇몇 품목은 곡주님과 여기 장로들을 위해 특별히 맞춤형인지라…….”
금화장에서 물건을 챙긴 건 단순 강도로 위장하기 위해 애초에 계획된 것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기왕 가져오는 거 쓸 만한 걸 챙겨 온 적월이었는데 분위기상 말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곡주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래도…….”
곡주가 뭐라 하려는 순간 적월은 그에게 전음을 보냈다.
“품목 중에 시할리수(염?理水)라는 남성 전용 고급 약이 있는데, 남자한테 그렇게 좋답니다. 그러니까 특히 에…… 밤에 남자한테 그렇게 좋다는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냥 써 보시면 아실 겁니다. 오늘내일 하는 영감도 그 약 한 모금이면 밤새도록 호랑이로 변한다 하더이다. 후궁이 많은 황제들을 위해 황궁에 진상되는 품목으로…….”
여기까지 들었을 때 곡주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적월 부곡주께선 품목을 정리해서 몇 가지는 빼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곡주가 나가자 적월은 씨익 웃으며 공손월을 바라보았고 그 역시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