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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다음 날 저녁 예광기의 호출에 의해 단연경은 그의 처소에 들었다.
그곳에는 예광기와 두 손녀 그리고 최기원이 있었다.
“이쪽으로 앉게.”
단연경이 자리에 앉자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간간이 식사 자리가 있었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약간 달랐다.
식사가 끝나고 다과상이 차려진 후에도 한동안은 일상적인 대화가 오고 갔다.
“그래서 이번에 나가니까 자네를 보더니 금화장의 혈무추노(血無追擄)라면서 벌벌 떨었다고?”
예광기의 말에 예사란이 입을 가리고 웃었고 본인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더군요. 피도 눈물도 없이 돈 되는 건 모조리 휩쓸어 간다는 의미랍니다. 줄여서 추노라고 소리치더군요.”
“허허허. 하긴 자네가 휩쓸고 가면 남아나질 않는다는 소리가 노부의 귀에까지 들렸으니 그럴 만도 하네그려.”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실제로 그러했다. 그가 상대했던 곳들은 모두 힘을 믿고 선량한 이들의 재화를 갈취하는 자들이 모인 곳들이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런 자들은 살려 두면 또다시 그길로 접어들 자들이었다.
물론 개과천선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모습을 그들은 보여 주지 못했다.(뭐, 단연경과 처음부터 예수란이 같이 다녔었는데 그녀의 현란한 언어 공격에 이성을 상실한 자들이 속출해서 그런 것도 꽤 된다.)
여하튼 그런 못된 자들이 득실거리는 곳을 치는데 인정사정 봐줄 이유가 없었다. 또한 그들의 공격으로 금화장이 받는 피해도 만만치 않았으니 그를 보존하기 위해선 최대한 박박 긁어 와야 될 필요성이 있었다.
“자네에게 이 노부가 참으로 미안하구먼. 협의를 실천해야 될 검을 그런 곳에 쓰게 만들고, 얼토당토않은 외호까지 얻게 했으니 말이야.”
“아닙니다. 그들에 대한 것은 협의 실천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리 생각 안 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기는 하는구먼.”
예광기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 앞에 놓여진 차를 한 모금 하며 말문을 열었다.
“오늘 자네를 부른 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네.”
단연경은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구나 싶어 경청했다.
“자네의 능력을 볼 때 우리 금화장의 앞날이 어떠할 것 같은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예광기였다. 단연경은 예광기를 잠시 본 후 말했다.
“부총관이란 직함을 얻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 업무를 보았지만 금화장의 사업을 모두 상세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예측을 해 보자면 솔직히 어렵습니다.”
예수란은 그 말에 한마디하려 했지만 옆에 있던 예사란이 그녀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뿐이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이유는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이유야 상품이 도난당하고, 거래가 끊기고, 전장에서의 예금들이 인출되는 것 때문이죠. 하지만 근본적 이유는 누군가 악의적 소문을 지속적으로 퍼뜨린다는 점입니다. 그로 인해 앞서 말한 일들이 계속 벌어지는 것이죠. 그렇지 않다면 제가 혈무추노라 불릴 정도로 독하게 움직이는데도 여전히 도발해 오진 않을 겁니다. 그게 이 바닥 생리라고 하더군요.”
“맞네. 제대로 알고 있구먼.”
고개를 끄덕인 예광기는 암울한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흘흘거리며 웃어 보였다.
“할아버지.”
예수란은 예광기의 행동에 불안함을 느낀 듯 그를 불렀다. 하지만 예광기는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들어 보이고는 말했다.
“그래서 노부는 금화장을 포기할 생각이네.”
예광기의 말에 예사란 등은 조용히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단연경은 달랐다. 그럼에도 그는 흔들림 없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술수를 부리는 자들이 원하는 건 금화장의 몰락인 듯싶습니다. 무림맹에 물건이 넘어간 이상 그걸 입수하긴 대단히 어려울 겁니다. 그럼 물건이 지도란 소문이 나 있으니 적어도 그를 필사본을 남겼거나 최소한 어느 정도 외우기라도 했을 거라 생각할 겁니다. 당연히 금화장을 노릴 게 뻔하지요. 작금의 사태가 그런 상황일 테구요.”
“자네 말대로라면 왜 본 장의 사업체들을 공격한단 말인가? 그냥 쉽게 본 장을 공격하면 되지.”
예광기의 질문에 단연경은 지체없이 대답했다.
“꽤 강한 무리를 한 차례 막았습니다. 물론 무림맹의 도움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막아 낸 셈이지요. 그러니 다시 공격하기엔 부담스럽기도 하고, 지난번 사태 때는 관에서 흐지부지 넘어갔지만 또다시 문제가 생기면 분명 개입이 이루어지겠지요. 한마디로 이 금화장은 술수를 부리는 자들에게 있어서 꽤나 귀찮고 강력한 방패란 것입니다. 그러니 금화장을 포기하는 것은 곧 그들이 뚫지 못한 방패를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저는 이 방패를 어떻게든 지키는 길이 곧 장주님과 두 소장주님들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흘흘흘.”
예광기가 다시 웃으며 예사란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엔 아쉬움과 안도감, 기쁨 등이 뒤섞여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가 오기 직전에 정말 걱정이 많았다네. 쓸데없는 물건이 흘러들어 온 것과 그로 인해 문제가 생긴 것 때문에 말이야. 여차하면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것 같더군. 그래서 포기하려 했지만 역시 임시방편일 뿐 지금과 같은 문제가 찾아올 것임을 알았지. 살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었지만 늘 고민 끝에 해결의 길이 보였었네. 하지만 시간은 어떻게든 벌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전혀 보이지가 않더군. 그런 차에 자네가 왔어.”
“…….”
단연경과 예광기의 눈이 허공에 얽혀 들었다.
“해서 자네에게 이 두 아이를 맡기고 싶네.”
“할아버지!”
예사란은 살짝 얼굴을 붉혔고, 예수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맡긴다는 말, 그 의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방면으로는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단연경은 의미를 아주 간단히 받아들였다.
“저보고 부양하라는 것입니까?”
“허허허. 이런이런…….”
예광기는 실소를 흘렸다. 후인동에게 들은 바가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 자네를 보면 참 재미있단 말이지. 자네가 일을 처리하는 걸 보면 기재 중에 기재로 보이는데 이럴 때 보면 어리숙하단 말이야.”
“……?”
단연경은 자신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있나 싶어 자신의 말을 되집어 봤다.
“부양하란 게 아니네. 금화장을 포기해도 자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재산은 준비되어 있네. 이 두 아이들이 평생 호의호식할 정도로 말이야. 그저 이 두 아이가 자리잡고 당금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만 옆에 있어 달란 것이네.”
그제야 단연경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그렇게 말씀하셔야죠. 전 또 부양하라는 줄 알고.”
“미안하네, 미안해.”
“그런데 말이죠. 여기 두 소장주님들이야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쳐도 저는 빚 갚는 게 요원해지지 않나요? 보표만 가지고는 평생이 걸려도 어렵지 싶은데 말이죠. 역시 돈벌이가 있어야 저도 빨리 빚을 갚고 제 삶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노부가 젊은 자네를 평생 이곳에 붙잡아 둘 만큼 그리 독한 사람으로 보였는가? 그건 걱정하지 말게. 금화장이 멀쩡할 때 벌 수 있는 만큼 충분한 일거리를 제공할 수 있으니 말이야. 우리 금화장이 그리 만만할 곳이 아닐세.”
예광기의 자신 있는 말에 단연경은 날카롭게 쳐다보다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하긴 교토삼굴(狡兎三窟)이라 했으니 말이죠.”
“삼 굴 정도가 아니지. 한 백 굴은 될 걸세. 어떤가, 새로운 계약을 받아들이겠는가?”
허허롭게 웃던 예광기가 급정색을 하며 말하자 단연경도 급정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계약서 새로 쓰시죠.”
“역시 시원시원해서 좋구먼.”
두 사람은 동시에 표정을 풀며 마주 보고 웃었다.
계약의 주체가 금화장에서 예사란과 예수란으로 변경된 것 이외에는 계약 내용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특약 사항으로 일거리가 많지 않을 경우 협의에 의해 일거리를 찾아 떠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었다.
“자, 계약은 완료되었네. 앞으로 잘 부탁하네.”
“물론입니다. 그런데 왜 두 분 소장주님으로 계약의 주체를 바꾸신 거죠? 장주님도 포함되야 되는 거 아닌가요?”
“그 이유는 지금 설명해 줄 터이니 잘 들으시게.”

다음 날 일찍 예광기는 최기원과 함께 금화장을 나섰다. 그들의 목적지는 개봉에 있는 무림맹으로 지난번에 넘긴 물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이 할애비 걱정은 하지 말고 잘들 지내야 한다. 수란이 넌 그 성격 좀 죽이고 언니 말 잘 듣고. 그리고 봉인은 어지간하면 풀지 말고.”
“예.”
“할아버지…….”
마음을 삭이며 인사를 하는 예사란과 달리 예수란은 눈물을 흘리며 예광기의 품에 안겼다.
“허허허. 다 큰 녀석이 이래서야 되겠느냐? 남들이 흉본다 이 녀석아.”
“흉 좀 보면 어때요.”
잠시 그렇게 예수란을 토닥여 준 예광기는 그녀를 떼어 낸 후 단연경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부탁하네.”
“한번 한 약속은 죽는 한이 있어도 지킵니다. 걱정 마십시오.”
“그래.”
강하게 힘을 줬던 손을 푼 예광기가 말에 오르자 최기원도 말에 올랐다.
“그 약속 꼭 지키길 바라네. 만약 두 질녀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단 소리가 들리면 내 친히 와 네 녀석의 온몸 관절을 꺽어 놓을 것이다. 물론 화살도 장식으로 몸에 달아 주고 말이야.”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단연경이 자신 있게 말하자 최기원은 눈을 돌려 예사란과 예수란을 바라본 후 말을 출발시켰다.
그들의 모습이 산허리를 돌아 보이지 않자 예사란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자, 우리도 움직이자. 단 공자께서도 가시죠.”
“예.”

금화장의 상태는 계속 나빠졌다. 전장의 경우, 예금 인출은 멈추지 않았고, 표국은 더 이상 표물이 들어오지 않았다.
상단도 거래 연장이 이루지지 않았고, 기일을 맞추지 못해 대금 회수가 지연되거나 아예 회수하지 못하기도 했다.
결국 금화장은 표국을 사해표국에 양도하면서 사업을 포기했고, 상단도 상행을 중단하고 남은 상품은 헐값에 매도했다.
그간 함께했던 인원에게 충분한 위로금을 줘 내보냈다.
전장의 경우 그래도 소수의 고객과 또한 만기가 도래하지 않은 전표가 있어 주요 성내 큰 도시에 있는 주요 지점 다섯 곳 이외에는 모두 문을 닫게 했다.
천하 오대 부호 중 하나였던 금화장은 불과 반년 만에 껍데기만 남고 완전히 무너져 버린 셈이 되었다.
그렇게 사업을 정리하고 나니 그 넓은 금화장은 썰렁해져 갔다. 일부 인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반년치 삯을 추가로 쳐서 준 후 내보냈기 때문이다.
중추절이 지나 금화장 주변의 산이 울긋불긋하게 변해 갈 무렵 비보(悲報)가 날아들었다.
금화장의 제육대 장주인 예광기가 정체불명의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두 손녀는 크게 상심해 쓰러졌고, 남아 있던 식솔들도 하나둘 떠나갔다.
금화장을 버티게 했던 다섯 개 남았던 전장 중 네 곳이 결국 예광기의 사망으로 인한 추가 인출로 문을 닫아 버렸다.
오직 금화장이 있을 수 있게 했던 낙양의 본점만 명맥을 유지했는데 더 이상 세상에 미련이 없어진 예광기의 두 손녀는 약간의 재화만을 챙긴 채 총관에게 금화전장을 양도하고 떠나 버렸다.
물론 금화장도 매도했으며 그 값의 대부분은 금화전장의 운영 경비를 위해 총관에게 증여했다.
금화장의 완벽한 몰락과 예씨 집안의 은거로 인해 중원 상계는 크게 요동쳤고, 서열이 재정립되는 시기가 도래했다.
또한 무림에는 그간 금화장에서 가지고 있을 것이란 지도의 필사본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갔다.
바로 금화장이 무림맹에 넘긴 것은 지도가 아닌 지도를 해석할 수 있도록 만든 장비였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혹시나 하여 예광기의 손녀들을 몰래 뒤쫓던 무리들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으며 그렇게 그들은 강호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8. 연화상회



예광기가 죽고 금화장이 무너졌으며 그의 두 손녀가 행방이 묘연해진 후 한 해가 흘러갔다.
그 사이 강호에서는 진시황릉을 찾는 세 가지 중 두 가지를 찾기 위한 소동이 일어났다.
어디에서 열쇠가 나타났다, 혹은 지도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 때문에 꽤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저것도 다 헛소문이란 게 알려졌고, 그런 일이 수십 차례 반복되자 봄이 찾아왔을 때 즈음엔 진시황릉에 대한 관심은 뚝 떨어져 있었다.
꽃 피는 봄이 오자 소주(蘇州)는 한층 활기를 찾아갔다. 하늘거리는 버들잎과 크고 작은 운하에서 봄이 옴을 알리는 싱그러운 물내음이 수많은 이들은 불러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소주의 주변에는 풍광이 좋은 명소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여행을 처음하면 무조건 소주는 들러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소주가 이토록 유명한 이유는 도시 전체에 운하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어 중원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집과 나무, 아름답게 만들어진 수많은 객잔, 운하로 이어지는 작은 길, 운하를 건너는 멋들어진 다리 등등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오묘한 조화는 소주에 매년 어마어마한 여행객들이 찾아오게 만들고 있었다.
이런 아름다운 소주에 오면 반드시 해야 되는 게 두 가지가 있었다.
운하의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객잔에서 음식과 술을 즐기는 것이 하나이고 운하에 작은 배를 타고 도는 게 둘이었다.
이 두 가지의 차이는 소주를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것으로 객잔에서는 정적인 아름다움을, 배에서는 동적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은 두 가지 모두 세상만사 복잡함을 떨치고 신선의 풍류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소주에는 시인 등의 문객들이 특히나 많이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