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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어찌 되었든 이런 풍류를 즐김에 있어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술과 음식인데 소주의 또 하나의 자랑이 바로 이것이었다.
풍광도 다시 보기 힘든 곳일진데 땅마저 비옥해 농산물이 풍부했고, 도시 전체가 운하인데다 멀지 않은 곳에 태호(太湖)와 장강이 있었고, 바다도 근접해 곡식을 이용한 술과 요리는 물론 담수어와 해수어 요리가 골고루 발달된 것이었다.
그래서 소주의 애칭 중 하나가 ‘어미지향(漁米之鄕)’일 정도로 천하 모든 종류의 요리가 모두 모인 곳이었다.
그야말로 중원에서 가장 축복받은 땅이 소주라 할 정도로 살기 좋은 곳이라 할 수 있었다.
배를 타는 건 곳곳에서 가능했다. 이를 업으로 삼는 이들도 꽤 있으니까.
하지만 객잔은 유명한 곳이 몇몇이 있었다. 객잔에서 보이는 운하의 풍광과 또 음식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 많지 않아서였다.
소주에서 가장 유명한 객잔은 취선루(醉仙樓)로 거의 육십여 년간 변함없는 명성을 자랑했다.
하지만 최근 취선루의 명성을 위협하는 곳이 등장했으니 그 이름이 운향정(雲香亭)이었다.
사실 운향정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으로 풍광은 취선루 못지않았다. 다만 요리가 취선루에 비해 많이 약해 명성이 뒤쳐졌는데 원단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숙수가 나타난 후 달라졌다.
운향정을 운영하는 이는 이곳의 대숙수인 구택동(具澤董)이었다. 십대 때 이곳에 와 삼십여 년간 일한 결과 운향정의 책임자가 된 사내였다.
운향정은 연화상회(軟貨商會) 소속이었는데 그곳에서 사람이 온 것은 지난 세월 동안 딱 두 번뿐이었다.
한 번은 어릴 때라 잘 몰랐고 두 번째에는 대충 보고는 자신을 운향정의 총책임자로 임명한다는 말만 하고 사라졌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화상회의 회주가 나타났다. 그것도 대단히 젊은 여인이었다.
회주는 하나에서 열까지 꼼꼼히 운영 상황 등을 확인하더니 구택동이 만든 요리며 일하는 이들의 행동 방침 등을 모조리 뜯어고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 긴 세월 동안 신경도 쓰지 않더니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나 운영권을 뺏어 간 건 둘째치고 구택동 자신이 평생에 걸쳐 만든 모든 운영 방침과 요리 종류까지 바꾸겠단 선언에 심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특히 요리에 대한 간섭은 경력 삼십 년의 대숙수인 그의 자존심을 심각하게 건드렸다.
하지만 정말 대단한 숙수가 온다면 좀 배울 것이 있을까 해서 봤는데 어이없게도 요리 부분을 책임질 자는 연화상회 총사(總師)를 맡고 있는 젊은 사내였다.
그래도 혹시라는 생각에 요리를 하도록 해 봤는데, 이건 말 그대로 풋내기일 뿐이었다. 칼질도 어설펐고, 요리 재료를 보는 눈도 형편없었다. 거기다 요리의 핵심인 불을 다루는 기술은 아예 없었다.
그래서 그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를 했다. 그러자 회주가 한 말은…….
“가르치세요. 금방 배울 겁니다.”
운향정에 들어와 생활한 게 삼십여 년이었다. 비록 운향정에 고용된 입장이었지만 주인과 같은 심정으로 아끼고 최선을 다해 왔었다. 운향정은 구택동 인생의 전부였다.
그런 운향정이 아무것도 모르는 새파랗게 젊은 회주의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얼토당토않은 결정에 화가 났고 아울러 절망감을 느꼈다.
이대로 가면 운향정이 망하는 건 시간문제로 보였다. 도저히 전 인생을 바쳐 온 운향정이 망하는 꼴은 볼 수 없었다.
구택동은 당장 그만두려 했다. 하지만 운향정의 주인은 그에게 금 여덟 냥이라는 엄청난 급여 인상과 운향정의 책임자란 직책을 유지한다는 내용의 새 계약을 제시했다.
물론 운영 방침과 요리에 대한 부분은 변경되는 걸로 말이다.
그동안 실질적 운영을 했다지만 매출 정산 후 이익금의 대부분은 송금해 그의 수입은 한 달에 급 다섯 냥가량이었다.
급여에 흔들리던 구택동은 그날 밤 집에 가는 길에 총사를 만난 후 바로 결정했다.
그 당시 소주의 뒷골목을 지배하는 삼대문파 중 한 곳이자 운향정이 있는 지역을 관할하는 대충파의 행동 대장을 오뉴월 개 패듯 패고 있었다.
그 행동대장은 어지간한 무림인들도 제압할 정도의 강자였고, 굉장히 무서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자를 걸레로 만들어 놓은 총사는 씨익 웃으며 말했었다.
“죄송합니다. 그냥 술이나 한잔하려고 했는데 이놈이 오늘까지 저한테 몇 가지 알려 주기로 한 걸 안 알려 주지 뭡니까? 그래서 잠시 손 좀 봐줬죠. 전 시킨 대로 안 하고 배은망덕한 자를 보면 꼭지가 돌거든요.”
그때 총사의 눈빛은 언젠가 대충파에게 보호비를 내지 않겠다고 반항했다 끌려가 그곳에서 보았던 대충파 두목의 눈빛과 똑같았었다.
어쨌든 그날 이후부터 구택동은 총사를 성심성의껏 가르쳤다.
역시 예상대로 총사는 처음 이삼 일간 버벅거렸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실력이 무섭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완벽한 불 조절과 귀신 같은 칼 솜씨로 불과 보름만에 구택동의 모든 기술을 습득하더니, 다시 보름이 지난 후에는 처음 보는 요리를 척척 만들어 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요리들은 영양과 맛은 물론이고 모양 또한 좋아 입과 눈을 모두 충족시키는 숙수가 꿈꾸는 최고의 것들이었다.
총사는 자신이 만들어 낸 요리의 핵심을 구택동에게 알려 주었고, 여러 숙수들에게 진짜 중요 요리의 핵심을 제외하고는 아낌없이 알려 주었다.
사실 요리의 세계에서도 자신의 지식을 이토록 쉽게 알려 주지 않았다. 언제 그만두고 나가 영업을 할지 알 수 없는데 쉽게 알려 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아낌없이 알려 주자 구택동은 진심으로 그에게 감복했고, 다른 숙수들도 그의 시원시원한 성격에 모두 좋아하게 되었다.
구택동을 비롯한 숙수들의 기량이 늘기 시작했고, 이때를 기점으로 운향정의 모든 요리는 모두 바뀌었다.
상향된 맛과 전혀 새롭고 뛰어난 요리가 나온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취선루의 명성을 따라잡은 것이다.
탕탕탕! 치이익!
총사는 엄청난 속도로 칼이 움직여 야채를 썰어 내더니 그대로 기름 솥에 쏟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꽃이 확 일어났다.
큰 국자로 두어 번 휘휘 저은 후 옆쪽의 녹말 가루를 살짝 첨가하고 몇 가지 향신료를 넣고 솥을 움직였다.
얼마 후 내용물이 걸쭉해지자 숙수는 능숙한 동작으로 재빨리 한쪽에 놓여 있던 큰 접시에 놓여진 노릿하게 구워진 생선 위에 이것을 부었다.
기가 막힌 향과 야채와 걸쭉한 국물, 생선의 노릿한 빛깔이 어우러지며 눈으로 보기에도 먹음직한 요리가 완성되었다.
총사는 솥을 내려놓고는 몇 가지 푸른 채소와 둥글둥글하게 잘라 물에 넣어 뒀던 두부를 조심스레 꺼내 접시에 깔고 두툼한 무 조각을 들어 칼로 깎아 냈다.
그러자 무 조각은 순식간에 작은 용으로 바뀌었다. 숙수는 이에 멈추지 않고 굵직한 당근을 들어 깎았고, 이 역시도 꿈틀거리는 용으로 변해 버렸다.
숙수는 두 마리의 무 용과 당근 용을 들어 채소와 두부 사이에 살짝 내려놓았다.
그러자 마치 두 마리 용이 구름낀 산중을 휘돌아 승천하는 듯한 형상을 이루었다.
생선과 국물, 그리고 장식이 전체적으로 어우러지자 요리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총사의 요리가 완성되자 언제나처럼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단 총사 자네의 실력은 소주 제일이라니까! 자네에게 요리와 조각을 가르친 건 내 일생일대 최고로 잘한 일일 게야. 하하하!”
객잔의 대숙수 말에 함께 일하는 숙수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칭찬의 말을 던졌다. 그러자 총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새삼스럽게 왜들 그러십니까? 제가 잘난 건 다 아는 사실인데요. 하하하! 물론 훌륭한 사부와 뛰어나신 숙수 분들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죠.”
겸양을 할 만도 했지만 젊은 숙수는 어깨를 활짝 펴고 껄껄거렸다.
하지만 어차피 장난 반 진담 반에 기분 좋게 하는 소리인지라 힘든 주방에 오랜만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하하하! 자네의 넉살은 아마 소주가 아니고 천하제일일 게야.”
“맞아, 맞아. 하하하!”
점소이가 음식을 내가고도 농담 몇 마디를 더한 총사는 구택동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저 오늘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별말을 다하는구먼. 이미 며칠 전부터 자네가 오늘은 점심만 일한다고 적어 뒀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나.”
“예. 그럼 삼 일 뒤 뵙겠습니다.”
“그래. 푹 쉬고 또 보세나.”
총사가 인사를 하고 나가자 구택동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어쩌다 한 번 쉬고 매일같이 일해 주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굳이 꼭 오 일에 한 번씩 이틀을 쉰다고 하니 아쉽단 말야. 거기다 하루 네 시진만 일하고 말이야. 이번엔 매상이 꽤 떨어지겠어. 저 친구 쉬기 직전 날 저녁 매상이 두 배로 오르는데 이번엔 반나절이나 더 쉰다고 하니 원…….”
구택동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총사는 작은 방에 들러 기름 냄새를 빼기 위해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는 밖으로 나왔다.
경장 형식의 청의를 입은 총사는 거리를 걷자 지나가는 여인들이 한 번씩 그를 쳐다봤다.
훤칠한 키에 시원시원한 얼굴, 그리고 짧은 수염이 멋지게 어울려 근처 여인들 사이에선 인기가 굉장히 좋은 그였다.
총사는 가끔 아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며 바삐 걸어 호표원(護飄院)이란 장원으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 한 인상하는 사내 둘이 핼쓱한 표정으로 있다 급히 고개를 숙였다.
“총사 오셨습니까?”
총사는 이 사내들의 얼굴을 보고 무슨 일인가 했지만 금방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일어나! 어쭈, 째려보냐? 눈알을 확 뽑아서 공 놀이하기 전에 눈깔 깔어이!!”
작은 연무장이 있는 건물 안쪽에서 앙칼지고 엽기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젊은 숙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불안한 기색의 두 사내를 보며 말했다.
“니들은 운이 좋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헤헤.”
총사는 곧바로 연무장으로 향하지 않고 이곳 호표원과 운향정, 연화상단, 그리고 연화농장을 운영하는 연화상회(軟貨商會) 회주가 머무는 처소로 갔다.
“늦었습니다.”
그가 들어서며 말하자 장부를 정리하고 있던 자색 궁장 차림의 여인이 고개를 들며 활짝 웃어 보였다.
“어서 오세요.”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는 늘 그를 구름 저 위로 날려 보내기에 충분했다.
“좀 피곤하겠지만 우선 연무장으로 가 보시겠어요? 단 총사가 늦게 온다고 대원들을 저리 괴롭히네요.”
이미 눈치채고 있었기에 총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연무장으로 갔다.
연무장 앞쪽 작은 단상에는 노란색 경장을 입은 여인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총사가 진정한 권의 힘은 어디서 나온다고 했지?”
“헉헉! 다리입니다!”
“어쭈! 목소리 봐라! 뭐라고!”
“다리입니다!!”
연무장에 땀과 흙으로 범벅을 한 오십여 명의 사내들이 악에 받쳐 소리치자 경장 여인이 외쳤다.
“좋아! 쪼그려 뛰기 백 회 실시!”
“크헉!”
여기저기서 숨 넘어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딱 봐도 이미 체력적 한계에 임박해 있었다.
“그만! 각자 돌아가 쉬도록!”
단 총사가 단상으로 오르며 말하자 막 시작하려던 사내들의 입에서 신음 소리를 내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경장 여인은 단 총사가 옆에 서자 곧바로 성질을 냈다.
“뭐야!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이제 오는 건데?”
“아직 오시(午時) 안 지났거든?”
단 총사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리자 노란 경장 차림의 여인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 씩씩거리는 게 보였다.
“웃기시네! 오시 지났거든?”
“그걸 어떻게 아는데?”
“내가 지났다고 하면 지난 거야!”
“좋다. 지났다 치자. 그럼 손님이 찾아와 해 달라는데 안 해 주고 그냥 오냐? 장사 말아먹게?”
“적당히 끊고 오면 되지 이 호랑말코 오라버니야. 오라버니가 그러고 온 게 한두 번이야?”
“그게 다 돈이거든? 내 빚 네가 대신 갚아 줄래?”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 보고 으르렁거리자 그대로 주저앉아 쉬고 있던 사내들이 눈치를 보더니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자리를 떴다.
자주 보아 온 광경이기도 했고, 이런 일 뒤에는 수련을 가장한 지옥 같은 혹사를(조금 전보다 더 과격한) 당하게 되니 그랬다.
사내들이 빠져나가든 말든 한창 유치한 말싸움을 하고 있을 때 한쪽에서 회주가 들어섰다.
“그만!”
그 소리에 두 사람은 동시에 대치를 멈추었다. 그러고는 노란 경장의 여인은 쪼로록 달려와 자색 궁장 여인의 뒤로 조잘거렸다.
“언니가 연경 오라버니한테 뭐라고 좀 해 봐. 어떻게 우리와의 약속에 이렇게 늦을 수가 있냐고. 언니는 지금까지 밥도 안 먹었잖아.”
총사와 노란색 경장의 여인, 단연경과 예수란은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꼭 이렇게 으르렁거렸고 끝은 항상 이랬기에 예사란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알았다. 알았으니 너도 그만해. 단 총사님.”
그녀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연경은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바로 포권을 취해 보였다.
“미안. 다음부터는 약속 꼭 지키도록 하지.”
“됐지?”
“피이…….”
예수란은 입을 삐쭉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금화장을 떠나 소주의 이 비밀 안가에서 지낸 게 반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배에서 있었던 오해는 풀었지만 그 관계는 예수란이 원하는 방향과는 약간 다르게 이어지고 있었다.
분명 호칭도 원하는 대로 됐고, 편하고 친해져 더없이 가까운 사이가 된 건 확실했다.
그런데 문제는 연인 관계로 발전이 안 되고 오누이 같은 관계로 발전해 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