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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물론 오누이 같은 관계로 발전하려 한다는 걸 중간에 알아차리고 방향을 바꾸려 노력했었다.
하지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이 멍청한 단연경이 이에 제대로 반응을 안 했다는 것이었다.
정말 환장하겠는 게 단연경은 모든 면에서 발군의 감각과 기량을 보이면서도 이상하게 남녀 간의 애정 부분에선 바보 중에서도 상바보라는 점이었다.
이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해 주고 싶기도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언니인 예사란도 단연경에게 자신 못지않게 마음을 주고 있다는 점과 단연경 역시 예사란에게 은근히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예사란은 어려서부터 사려 깊고, 정숙했으며(집안 어른들 사이에선 애교도 상당히 부렸다), 현명한 데다 아름답기까지 해 최고의 신붓감이란 소리를 달고 살았다.
할아버지의 명에 따라 자매 모두 얼굴을 드러내 놓고 다니지 않았음에도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애정을 보였었다.
물론 자신도 봉인을 한 후 비슷한 경험이 많았지만 어쨌든 남자들이 원하는 최고의 여인이 언니였다.
그런 언니가 관심을 두는 있는 상황에 그가 남녀 관계에 눈을 뜬다면?
장담컨대 무조건 언니와 연결될 가능성이 높았다.
단연경을 남편감으로 점찍었지 절대 형부감으로 점찍은 게 아니었다.
‘멍충이, 문어대가리, 닭대가리, 붕어대가리…….’
예수란은 세상에 멍청하다고 알려진 모든 것들을 속으로 읊었다.
몇 가지 준비를 마친 단연경과 예사란 자매는 밖으로 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미리 예약한 배에 오른 그들은 한가로운 한때를 보냈다.
예사란과 예수란 모두 면사를 하고 있어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눈을 보니 금화장을 떠난 이후 가장 따스한 빛을 띠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이런 시간을 갖는 것 같군요.”
“예. 한동안 정리할 게 많았으니까요.”
찰랑거리는 물소리와 살랑거리는 봄바람은 심신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한동안 물길을 따라 움직이며 세 사람은 말없이 봄을 즐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단연경은 챙겨 왔던 물건 중 하나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건 바로 한 달 반 정도 전부터 배우기 시작한 금이었다.
“설마 그걸 지금 하려는 건 아니지? 어지간하면 참지.”
예수란의 말에 단연경은 움찔거리며 예사란의 표정을 살폈다. 별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그녀도 예수란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재다능한 협객을 위해 그는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과정 중에 하나가 요리의 깊은 맛을 배우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선 요리를 제대로 할 줄 알아야만 했다.
그래서 운향정에서 요리를 본격적으로 배웠고, 근래에 들어서는 꽤 높은 경지를 이루고 있었다.(사실 이건 일거리 중 하나로 매상과 연동해 급여를 지급받는다. 다만, 돈에 너무 구속되는 것처럼 보이면 모양 빠진다고하여 스스로 배운다는 개념으로 세뇌를 시킨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배우기 시작한 게 금이었다. 요리를 통해 얻은 자신감으로 금도 빨리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금이란 게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초보자 치고는 제법하는 편이어서 흥이 올라 한 곡 해 보려 했는데 예수란의 말에 멈칫거린 것이다.
예수란이나 예사란 모두 그가 연습하는 소리를 들어 이렇게 밖에서 그것도 남들이 많은 장소에서 연주하기엔 창피한 수준이라 말린 것이다.
이미 금은 꺼내 들었는데 그녀들의 반응에 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그냥 넣기도 그런 애매함에 단연경은 어정쩡한 자세로 있었다.
“이리 줘 보세요. 제가 한 곡 타 보죠.”
그의 난처함은 예사란의 말로 극복되었다.
“그래. 오랜만에 언니 소리 들어 보자.”
예수란이 한껏 기대하는 눈으로 말하자 예사란은 금을 두어 번 튕겨 보더니 천천히 곡을 타기 시작했다.
띵! 띠딩!
무림에 있는 음공의 대가들은 내공을 조절해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지만 예사란은 순수한 실력으로 마음을 움직였다.
느리면서도 부드러운 금음은 마치 따스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 같았다.
눈을 감고 듣던 단연경은 분위기에 취해 조용히 시를 읊었다.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별천지일세, 인간 세상 아니네.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금음과 시조가 어우러지자 그야말로 별천지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금음이나 시조를 잘 모르는 사공마저 이에 취해 잠시 노 젓는 걸 잊고 물 흐름에 맞춰 움직였다.
금음이 멈추고도 여운에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자연의 소리 이외에 주변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짝짝짝.
여운이 감도는 가운데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주변에서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단연경은 풍류에 취해 주변 소리가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도 주변이 조용해져 있었던 것이다.
사공이 노를 젓지 않아 배가 아주 천천히 움직였고, 그 안에 들려오는 아름다운 금 소리와 시조에 모두 빠져들어 버렸던 것이다.
단연경과 예사란 자매의 시선이 박수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그들이 지나고 있던 곳은 바로 취선루 옆이었고, 박수 소리가 들려온 곳은 가장 비싼 좌석 쪽이었다.
박수의 주인공은 섭선을 들고 흰색 장포를 걸친 영웅건을 한 관옥 같은 얼굴의 이십대 중반가량의 준수한 공자였다.
‘헛, 소설 속에 나온 모습이다.’
단연경의 귀공자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소주는 봄에 와야 제대로 풍류를 즐길 수 있다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봅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소생이 술을 한잔 대접하고 싶습니다만.”
귀공자의 말에 단연경은 예사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흥이 동하여 몇 마디 한 것인데 귀 공의 풍류를 깬 것 같아 죄송합니다. 하여 벌주로서 한 잔 받겠습니다.”
겸양의 말을 하며 흔쾌히 받아들이자 귀공자는 기분 좋게 웃으며 자신의 술잔에 술을 채운 후 살짝 던졌다.
그러자 술잔이 느릿하게 날아 단연경 쪽으로 향했고, 이를 본 사람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단연경이 술잔을 받았을 때 술은 단 한 방울도 흘러내리지 않았는데 이는 나이에 비하여 실로 높은 경지의 기술이었다.
“감사하오이다.”
단숨에 쭉 들이킨 단연경은 귀공자를 향해 말했다.
“이렇게 대접을 받았으나 소생은 귀 공에게 대접할 게 없으니 어찌해야 될지…….”
“하하하! 그냥 술 한잔이면 족합니다. 그리고 술은 제가 가져다 드리지요.”
그렇게 말한 귀공자는 술병을 집어들더니 훌쩍 몸을 날려 배 쪽으로 뛰어내렸다. 서너 명이 타는 작은 나룻배이다 보니 이렇게 움직이면 배가 뒤집힐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귀공자의 돌연한 행동에 예수란이 깜짝 놀라 단연경을 바라봤다. 이러쿵저러쿵해도 단연경에게 많이 의지하는 예수란이었다.
“괜찮다.”
단순한 전음 한마디였지만 예수란은 순간적으로 안정을 되찾았고, 예사란은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있었다.
단연경의 말대로 귀공자가 내려섰음에도 배는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귀공자는 자신이 돌발적으로 뛰어내렸음에도 흔들림 없는 자세를 유지하자 이채를 보였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일반인이 작은 배에서 일어나기엔 무리가 있었기에 귀공자는 한쪽에 앉으며 술병을 단연경에게 내밀었다.
“하하하! 좀 놀라긴 했습니다. 실제로 무림의 고수를 보는 건 처음인지라…….”
단연경은 술병을 받아 술잔을 건넨 후 잔을 채워 주자 귀공자는 주저없이 이를 들이켰다.
“언젠가 다시 뵙게 된다면 오늘의 술 한잔은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좋지요. 그리고 두 분 소저들과도 꼭 다시 뵙는 행운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단연경과 술잔을 주거니받거니 했지만 예사란과 예수란 쪽을 보며 날린 미소야말로 귀공자의 진짜 목적이었다.
미소를 짓는 귀공자의 얼굴은 정말 잘생겼다. 날카로운 턱선과 날렵한 콧날, 검날 같은 눈썹에 서글서글한 눈, 깨끗한 피부까지 뭐하나 빠지지 않는 사내였다.
귀공자도 자신의 외모가 어떻다는 걸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미소가 주는 효과가 얼마나 대단한지도 알고 있었다. 지금껏 이 마력의 미소에 안 넘어온 여인들이 없었다.
‘어라?’
예사란은 시종일관 담담했고, 예수란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일종의 무덤덤한 눈빛이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반응들이었다. 여태껏 마력의 미소 앞에 놓인 여인들은 얼굴을 붉히거나 시선을 회피한 후 힐끗거리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뭐야, 이 반응들은……. 혹시 이 녀석 때문인가?’
귀공자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단연경에게 돌렸다.
확실히 눈에 띄는 훤칠한 외모였다. 하지만 아주 대단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마디로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외모라는 것이었다.
‘이유를 모르겠네.’
귀공자는 이런 생각을 하며 마지막 말을 했다. 좀 이상한 반응에 당황은 했지만 다년간 해 온 행동인만큼 지금은 물러날 시간임을 알고 있었다.
떡밥 던지는데 시간을 오래 끌면 아니 던지니만 못하니까 말이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고 꼭 다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럼…….”
퉁!
가볍게 구르자 배가 살짝 흔들렸고 귀공자의 신형은 붕 떠서 취선루의 자신의 자리로 올라섰다.
내려올 때만큼이나 깔끔한 한 수였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예사란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인사를 하자 귀공자도 웃으며 고개를 움직였다.
귀공자와의 짧은 만남 이후 세 사람은 거의 반 시진가량 더 뱃놀이를 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
해가 진 후 단연경과 예사란 자매는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친 후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 시간을 보냈다.
신시가 가까워질 무렵 단연경은 그간 익혀 두었던 역용을 하고 흑색 경장으로 갈아입은 후 밖으로 나왔다.
작은 장원이었지만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어, 처소가 있는 뒤뜰에는 작은 연못과 정자도 있었다.
정자에 서서 연못에 비단잉어 먹이를 주던 예사란이 입을 열었다.
“오늘인가요?”
“예.”
“비록 호표원의 대원들과 차이가 있는 악질들이기는 하지만 너무 심하게 하지 마시고 손속에 사정을 두세요. 저는 자칫 총사가 죄업을 쌓을까 걱정됩니다.”
“알겠습니다. 회주의 말씀 새겨 두도록 하겠습니다. 아직까지 밤바람이 찹니다. 너무 오래 계시지 마시고 들어가 쉬십시오.”
“그래요.”
예사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난 몇 달간 늘 보던 미소였지만 단연경의 심장을 미친 듯이 달리게 하는 능력은 변함이 없었다.
단연경이 장원 밖으로 나오자 주변에서 서성거리던 세 명의 사내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 사내들은 바로 후인동, 판태발, 계도식이었다.
“어? 총사 자네 맞나?”
후인동이 단연경의 얼굴을 보고 짐짓 몰라보겠다는 듯 말하자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쓸 만합니까?”
“훌륭하네. 얼굴도 전혀 다른 사람 같고 역용의 흔적도 잘 안 보이네. 물론 밤이라서 그렇지만 말이야. 하하하!”
“그거면 오늘은 충분하겠죠.”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녀석들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포이원(抱怡園) 안쪽 본거지에 전 조직원이 살기등등하게 모여 있네.”
“그래요? 대충파가 어떻게 당했는지 알면 그렇게 못 있을 텐데…….”
단연경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리자 계도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듣기로는 모르는 게 아니고 믿질 못한다고 하더라고. 사실 나 같아도 못 믿을 거네. 한 명이 그것도 맨손으로 칠십 명이 넘는 주먹깨나 쓴다는 패거리를 이각여 만에 묵사발을 내놨다고 하면 믿겠나?”
“저라면 당연히 믿죠. 형님들 아무나 가도 그 정도는 가능할 걸요.”
단연경의 말에 판태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큰형님이면 모를까 우리는 무리야. 안 그러냐?”
“쩝. 솔직히 맞는 소리지.”
계도식이 입맛을 다시며 말하자 후인동도 거들었다.
“나도 자신 없네. 검을 쓴다 해도 쉽진 않아. 뒷골목 잡배들이지만 실전을 통해 익힌 무공은 절대 무시하지 못하거든. 특히 소주의 뒷골목 패거리들은 강호에서 꽤 먹어 준다네.”
“그런가요?”
“그렇지. 이 년 전인가? 청성파 출신의 나름 이름 있는 녀석이 우연히 시비가 붙어 한판한 적이 있었는데, 신나게 얻어맞고 기절한 적이 있었네. 물론 그 때문에 청성파에서 고수들을 파견해 잡으려고 해서 한동안 도망쳤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실전 무공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지.”
“오호.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단연경은 그렇게 말하더니 그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저 올 때까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신호탄은 가지고들 계시죠?”
“당연하지.”
“반 각입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반 각만 버티세요.”
“걱정 말게. 호표원 애들이 생각보다 쓸 만하거든.”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후인동 등이 안으로 들어가자 단연경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오후에 예수란의 화풀이 대상이 되었던 사내들은 이곳 호표원이란 위사 사업장의 위사들이었다. 하지만 불과 다섯 달 전까지만 해도 이 근처의 뒷세계를 지배하던 폭력배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이렇게 위사가 된 이유는 그냥 단연경의 무력에 굴복해서였다.
애초에 뒷세계에 손을 댈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운향정을 검토하던 중에 꽤 귀찮은 존재로 부각이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