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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문사의 말에 사내는 웃음을 참아 가며 말했다.
“에이, 장난 좀 친 걸 가지고 아직도 꽁해 있는 거야?”
“덕분에 한 달간이나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거든요?”
“하하하! 그나저나 그놈, 아니, 그년이 우리도 노릴까?”
“지금까지 한 걸 보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삼십여 년간이나 조용히 있던 연화상회가 갑자기 활발하게 움직이며 사업을 확장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내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어느새 장난기는 사라지고 대신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럼 곤란한데, 어떻게 할까?”
사내가 고민스럽다는 듯 말했지만 얼굴엔 다시금 작은 미소가 슬슬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걸 본 문사는 그 표정을 지은 후 저지른 일의 종류가 머릿속에 마구 떠올랐고, 곧바로 정색하며 말했다.
“장주님, 전 그 의견 반대입니다.”
“나 아직 아무런 의견도 말하지 않았는데.”
“안 들어 봐도 압니다. 무조건 반대입니다.”
“어이 어이. 이런 식이면 곤란하지. 일단 들어 보고 가부 간의 결정을 해야지 합리적인 거잖아. 안 그래?”
장주라 불린 사내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하지만 문사는 요지부동이었다.
“들으나마나라니까요. 장주님이 지금 무슨 표정 짓고 있는 줄 아십니까?”
“내가 뭐?”
“왼쪽 눈끝이 살짝 실룩거리고 코끝을 검지로 긁으면서 오른쪽 입꼬리가 약 반 치가량 말려 올라갔습니다.”
“그게 어쨌다는거야?”
장주가 어이없다는 듯 묻자 문사의 미간이 급격히 좁아지며 내천(川)자가 만들어졌다.
“장주님 말대로 하면 참신한 방식이고, 일반인들의 말로는 나쁜 짓할 때 짓는 표정입니다. 그 표정 뒤에 제 인생이 얼마나 꼬인 줄 아십니까?”
“그랬냐? 표정 관리해야겠구만. 어쨌든 나도 모르는 걸 넌 알고 있다니, 역시 너랑 함께 오길 정말 잘했다니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하하하!”
장주가 시원스럽게 웃자 문사는 온몸으로 부정하며 말했다.
“아니요. 저는 싫습니다. 절대로! 무조건!”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깨끗한 백의를 차려입은 주변이 환해지는 듯한 꽃미남 청년이 들어섰다.
“뭐가 그리 좋아서 그리 웃어대십니까? 혹시 저 빼고 좋은 곳이라도 갈 계획 짜시는 겁니까?”
청년의 말에 사내는 웃음을 줄여가며 말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막둥아! 우리 놀러 가자!”
“오호! 어디로요?”
청년이 눈을 반짝거리며 다가오자 사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목을 휘감으며 말했다.
“그냥 따라와. 이 형이 정말 좋은 곳에 데려가 줄 테니까.”
“정말이요? 안 그래도 요즘 분위기가 흉흉해서 아가씨들이 다 어디론가 사라져 작업을 못하고 있었는데 잘됐네.”
“그랬냐? 그럼 딱 맞을 거다.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말이야.”
“좋아! 하하하!”
꽃미남 청년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좋아라 하느라 뒤이어 작게 말한 장주의 말을 제대로 듣질 못했다.
“아마도 말이지. 후후후.”
그날 자시가 되고 반 정도가 지났을 무렵 꽃미남 청년과 사내, 그리고 문사가 야행복에 복면을 한 채 호표원 옆 건물 지붕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둘째 형님, 좋은 곳에서 제대로 작업할 수 있게 해 준다면서요. 이건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은데요”
꽃미남 청년이 못미더운 표정으로 말하자 사내는 씨익 웃으며 답했다.
“막둥아, 어릴적부터 이 형님이 여인네들 꼬시는 것 중에 최후의 방법이 뭐라 했었지?”
“월담 후 보쌈이요.”
“그렇지. 잘 기억하네.”
“설마 진짜 보쌈하시려구요? 그건 범죄잖아요. 그리고 굳이 그렇게 안 해도 제 꽃미모면 충분히 꼬실 수 있는데 말이죠.”
“쯧쯧쯧. 네가 아직도 보쌈의 즐거움을 모르는구나. 그냥 꼬시는 것하고 보쌈을 한 후 꼬시는 것하고는 긴장감이 다르잖아. 그냥 꼬시는 건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보쌈은 아무나 못하잖아. 일종의 일탈 행동에서 오는 긴장감과 즐거움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지.”
사내의 말에 꽃미남 청년과 문사는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둘째 형님이 그러니까 변태 소리를 들으시는 거라구요.”
“어허! 변태라니. 그건 네가 변태의 진정한 의미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변태는 말이다, 사람으로서 하기 힘든 요상한 짓거리를 하며 느끼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형님은 그냥 남들과 약간 다른 걸 즐기는 것뿐이다.”
“그게 그 말이잖아요. 변태도 남들과 다른 걸 즐기는 거라구요.”
“어허! 그래도 이 녀석이. 변태가 보쌈을 하는 건 잡아와서 여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육체적 접촉하기 위함이고, 이 형님은 그냥은 보기도 힘들고 작업도 걸기 힘드니 조용히 모셔 와서 정신적 교감을 통해 마음을 얻기 위함이다. 뭐, 정신적 교감이 이루어지기까지 일정 구역 이내에서 구속 생활을 해야 한다는 단점은 있지만, 어쨌든 마음을 얻으면 이 모든 잘못은 더 이상 잘못이 아닌 애정으로 변하는 거지. 일명 보쌈 범죄 극복!이란 거다. 알겠냐?”
그 말에 문사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말했다.
“지금 하는 말을 궤변이라고 하는 겁니다. 바로 뻘짓을 안 한다고 해도 분명 최악의 범죄란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에헤이, 너까지 왜 그러냐. 넌 나와 운명 공동체잖아. 한 몸이나 마찬가지란 말이다. 당연히 넌 무조건 내 편을 들어야지.”
“그건 장주님 생각이고요. 전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언제고 반드시! 무조건! 기회가 오면 본가로 돌아갈 겁니다. 그러니까 절 자꾸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헉, 정말 이러기냐? 우리 사이가 그런 사이였어? 어려서부터 형제처럼 컸고, 커서는 한 침상도 수없이 같이 쓴 사이 아니냐.”
그 말에 문사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만약 남의 집 지붕 위만 아니었으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기세였다.
“표현을 정확하게 하세요. 그냥 순수하게 잠만 잔 거잖아요. 어디서 저까지 변태로 생각할 만한 말을 하십니까? 어려서는 뭘 몰라서 그런 거고 커서는 억지로 장주님이 술 먹여서 결국 뻗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거잖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장주님과 계속 갈 생각 없습니다. 전 야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저 제가 재수가 없어서 장주님하고 같이 엮여 가지고 여기까지 쫓겨 왔을 뿐입니다. 그런 제가 미쳤다고 장주님하고 계속 함께하겠습니까? 전 장주님과 여기에서 평생 있을 생각은 이만큼도, 이만큼도! 없습니다.”
문사는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거의 닿을 만큼 내보이며 말하자 사내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야멸찬 녀석!”
“인생에 이만큼도, 이마안……큼도 도움이 안 되는 주군!”
사내와 문사의 모습에 꽃미남 청년은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사내와 문사는 모두 세가의 다음 세대를 이어갈 이들로 어려서부터 주목받았었다.
둘 모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주군과 보좌로서 살아가야 하는 만큼 신뢰가 필요했는데 알아서 절친으로서 서로를 자극하고 보완하는 관계로 성장했다.
청년이 되자 명성을 함께 얻고 드높여 세가 어른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사고를 치기 시작하더니 막판엔 세가와 아버지이자 현 가주의 명예에 똥칠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일로 결국 두 사람은 공식적인 강호 활동 금지와 함께 세가 내의 모든 지위 박탈이란 제재를 받고 이곳 소주의 분가로 쫓겨나게 되었다.
소주 분가에는 세가의 몇 가지 사업체가 있었는데 이건 거의 위장이고 실제로는 소주 뒷세계 일부를 조정해 비밀 자금 확보 및 세탁을 주업무로 하는 곳이었다.
사실 서로 간에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정파 계열의 대문파에선 필요에 의해 이런 일을 하는 곳이 한두 곳이 있게 마련이었는데, 일 자체가 협의와는 동떨어져 있어 천하에 이름을 얻고자 하는 이들로선 절대 맡지 말아야 하는 곳이자 경험도 하지 말아야 하는 곳이었다.
이곳을 거쳤다 나중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 강호에서 매장이다. 따라서 이곳을 거치면 절대 중요 위치로는 오르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결국 일의 중요도는 제법 되지만, 장래를 위한 경력 관리 차원에선 절대 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네가 나 없이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너 이미 경력에 흠집 났거든?”
“흠집이야 메꾸면 되거든요? 그리고 그게 누구 때문인데?”
“나 때문이라고? 너도 좋다고 했었잖아. 그리고 너 말이 짧다. 내가 나이도 한 살 많고 주군이란 거 잊었냐?”
“주군이 주군다워야 주군이지. 오늘도 그래…….”
두 사람의 유치한 다툼이 길어지려 하자 꽃미남 청년이 중재에 나섰다.
“그만들 하세요. 이러다 여기서 밤 새겠습니다.”
그제야 말을 멈춘 두 사람은 고개를 획 돌려 외면하는 걸로 일을 끝마쳤다.
“둘째 형님, 그런데 누구기에 무려 보쌈씩이나 하시려는 겁니까?”
“그건 말이다. 그러니까…… 그렇지. 너 방 현령 알지?”
“알죠. 공사의 구분이 명확하고, 원리원칙주의자인 이곳 소주의 현령이잖아요. 색골이란 게 좀 웃기기는 하지만.”
“그 방 현령이 보장한 미인이 여기에 산다.”
“오호, 그래요? 그럼 대단한 미인이란 소리고 그런 미인이 소문이 안 났을 리가 없는데 왜 전 몰랐죠?”
“이놈아, 그만큼 스스로의 단속을 잘하니까 안 알려졌지. 네 녀석이 알 정도면 내가 그냥 있었겠냐? 진즉에 작업 들어갔지. 그리고 당연히 오늘 야밤에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고.”
“아…….”
꽃미남 청년은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고 그 모습에 문사는 헛웃음을 삼켜야만 했다.
‘확실히 형제 맞네, 맞어.’
“두 분 뜻이 맞은 것 같으니 전 이쯤에서 빠지도록 하겠습니다.”
“왜? 여기까지 왔으면 끝까지 함께 가야지.”
“다른 건 몰라도 이번 건은 안 됩니다. 이건 엄연히 범죄라구요. 그것도 국법상으로나 관습법상으로나 최악에 속하는!”
문사의 말에 꽃미남 청년도 거들고 나섰다.
“그래요. 둘째 형님. 아무리 대단한 미인이라도 보쌈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돌아가고 나중에 날 밝으면 당당하게 대문으로 밀고 들어가죠. 뭐, 왜 왔냐고 하면 대충 거리를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건 형님이나 저나 필수 전공이었잖아요.”
“너희 둘 다 정말 이러기냐?”
장주가 둘을 번갈아 가며 봤지만 두 사람 다 내켜하지 않았다.
“휴……. 녀석들. 알았다 알았어. 실은 애초에 보쌈 같은 건 생각도 안 했다. 야, 내가 보쌈을 좋아했으면 아마 골백 번도 넘게 해 봤을 거다. 너! 내가 보쌈하는 거나 했다는 소리 들어 봤어?”
문사를 가르키며 말하자 그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당연히 보거나 들은 적도 없죠. 하지만 장주의 성격과 지금까지의 품행으로 볼 때 몰래 해 봤을 가능성은…….”
문사는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아무리 격이 없이 지낸다 해도 주군이다 보니 뒷말을 하기가 좀 그랬던 것이다.
“헉, 야 너 정말 나를 그렇게 생각한 거냐? 그런 거야? 아, 인생 헛살았구나. 제일 믿었던 수하란 녀석이 그리 생각하다니. 흑흑흑…….”
장주가 과장스럽게 눈물 훔치는 동작을 취했지만 문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됐고요. 어쩌실 겁니까? 돌아가실 겁니까 아니면 저만 빠질까요?”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놈.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서야 되겠냐? 대장부가 칼을 뽑았으면 호박이라도 썰어야지.”
“둘째 형님, 비유는 적절한데 상황상 좋질 않은 것 같은데요.”
“그렇기도 하다 응. 어쨌든 내가 여기 온 건 보쌈하려고 온 게 아니다. 그냥은 보기도 힘들고 만나는 건 더 힘드니 이렇게라도 면담하려고 온 거다. 실체도 확인하고 사업 얘기도 좀 하고 재수 좋으면 작업도 걸 수 있고. 얼마나 좋냐. 안 그래?”
장주의 말에 문사는 솔깃했다. 그런 의도라면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정체를 숨기고 있는 상대로 이런 방법은 은밀히 자주 통용되는 방식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그 방법을 쓰겠다고 하는 사람이 여자 문제에 있어선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 말,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이놈이 속고만 살았나…….”
“장주님이 제 입장이면 그냥 아 그렇습니까하고 믿으시겠습니까?.”
문사의 말에 장주는 잠시 그를 노려보다 표정을 풀며 말했다.
“인정. 절대로 보쌈 혹은 무단 침입 이외의 범법 행위를 먼저 하지는 않겠다.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 됐지?”
장주가 한 손을 들고 맹세를 했지만 문사는 시큰둥했다.
“가문의 명예를 중하게 여기지도 않으면서 무슨…….”
“에헤이, 맹세까지 했는데 넘어가라 쫌…….”
일단 보쌈이 아닌 사업상의 면담을 위해 들어간다고 하니 꽃미남 청년은 마음의 부담을 털어 내고 눈을 반짝거렸다.
색골은 보통 얼굴은 잘 안 보는데 방 현령 이 인간은 얼굴과 몸매에 확고부동한 기준을 세우고 이에 맞춰 가려 보는 별종이었다.
그리고 그 기준이 굉장히 높아서 그가 괜찮다는 여인네들은 대단한 미인들이었다.
“막둥이도 갈 거지?”
“당연하죠. 사업상 면담하는 건데요.”
꽃미남 청년의 씨익 웃으며 말하자 장주가 마주 보며 비슷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얘들아! 가자.”
“잠깐만요. 전 같이 간다고 안…….”
문사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사내가 몸을 날렸다. 괜히 더 들어 봤자 또 시간만 흐를게 뻔했다. 왜냐, 늘 그래 왔었으니까.
“그럼 그렇지. 에휴, 내 팔자에 무슨.”
사내의 행동에 문사가 한숨을 내쉬며 뒤를 따랐다.
“우후, 사뭇 기대되는데. 기왕이면 삼봉의 소저들과 비견되면 좋겠는데.”
꽃미남 청년도 호표원을 향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