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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단연경의 하루는 무척이나 빡빡하고 길었다.
인시 중간쯤에 일어나 씻고 반 시진 정도 명상을 한다. 묘시초부터 한 시진에 걸쳐 호표원의 대원들 수련을 시키고, 진시말까지 아침을 해결한다.
사시에는 연화상회 업무를 예사란과 함께 보고, 오시에서 미시 중간까지 운향정에서 숙수로서 일을 한다.
점심 일이 끝나면 늦은 식사를 한 후 다시 돌아와 연화상회 업무를 본다.
유시 중간쯤에 운향정으로 가 저녁 손님을 맞이해 숙수로서 또 일을 한다.
술시 말쯤에 간단한 식사 후 연화상회로 와 결제와 하루 업무 마감을 해시말까지 한다.
자시가 되면 반 시진가량 호표원 부원주인 강대충에 대한 개인 수련을 봐준다.
그렇게 자정이 되야 단연경의 공식 하루 일과는 끝이 난다. 공식 업무가 끝나면 씻고 난 후 명상과 운기를 병행하고, 축시가 되면 잠자리에 들면서 하루가 완전히 종료된다.
그밖에도 별도의 업무도 중간중간 처리하니 그의 하루하루는 거의 살인적인 것이었다.
아마 보통 사람이었으면 쌍코피를 폭포처럼 흘리며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초인의 경지에 든 단연경인지라 체력적 문제는 아예 없었고, 정신적 피로도 심법을 통해 해소해 일과를 무리없이 소화하고 있었다.
계약상 오 일에 이틀씩 쉰다고 되어 있었고, 그의 모든 일은 동일한 날짜에 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쉬는 것은 운향정 일에 한해서였고, 나머지는 계속 근무였다. 체력적, 정신적 문제가 없는데 굳이 쉴 이유도 없었고, 또 쉬는 날 일하는 게 훨씬 경제적 이득이 높았다.
무엇보다 연화상회의 업무는 거의 예사란과 같이 처리를 하니 마음마저 가벼울 정도였다.
강대충의 개인 수련을 조금 일찍 마친 단연경은 처소로 돌아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오랜만에 뜨끈한 물에 들어오자 몸이 노곤해지는 단연경이었다.
“아, 좋다.”
기분 좋은 노곤함을 즐기며 눈을 감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인상을 찌푸리며 목욕통에서 벌떡 일어섰다.
“에잇, 진짜. 오랜만에 좀 편히 있을라고 했더니 도움을 안 주네.”
단연경은 대충 물을 닦고 옷을 입은 후 검을 챙겨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처마 밑 그림자 속을 통해 움직인 단연경은 기척의 위치를 파악한 후 그들이 예사란 자매의 처소와는 반대로 움직이자 일단 강대충을 찾아가 몇 가지 명을 내렸다.
명을 내린 단연경이 그들의 뒤를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강대충도 슬며시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다.
“이번엔 맞아요?”
“이런 일을 하면서 즉흥적으로 오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느 정도 조사는 하고 들어와야 할 것 아닙니까!”
꽃미남 청년과 문사가 불신과 짜증 섞인 전음을 보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경비가 생각 이상으로 촘촘해 움직이기도 불편했는데 목표 지점조차 몰라 별로 넓지도 않은 장원에서 무려 이각이 넘도록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이런 일은 잘 모르고 와야 제 맛이야. 그리고 좀 헤매고 해야 재미있잖아. 궁금증이 높아질수록 더 짜릿하고, 들킬지도 모른다는 긴장감도 있고.”
“이게 좀 헤맨 겁니까?”
문사의 전음을 무시한 장주는 복면은 살짝 내리고 코를 벌름거렸다.
“캬아, 이 향긋한 지분 냄새. 야, 이번엔 맞는 것 같다.”
복면을 다시 올린 장주는 한쪽 창문을 살짝 열고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조용히 그리고 부드럽게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뒤이어 꽃미남 청년과 문사가 들어서자 사내는 침상 쪽을 가르키며 전음으로 말했다.
“보이냐?”
침상에는 등을 지고 누운 채 여인 둘이 마주 보는 자세로 고른 숨을 내쉬며 자고 있었다.
옆으로 누워 있어서 잘록한 허리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고 안쪽에 누워 자는 여인의 얼굴이 조금 보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한쪽 눈매와 뺨에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만으로도 최고의 미모란 걸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오! 완전 좋은데요.”
“그지? 후후후!”
문사는 못마땅한 듯 팔짱을 끼고 다른 곳을 보는 것 같았지만 그 역시 힐끔거리고 있었다.
“자, 시작해 볼까나.”
사내는 손을 비비더니 한쪽에 있는 의자를 침상 앞에 반대로 놓고 등받이에 양팔을 올리고 앉았다.
그러더니 무엇인가 못마땅한 듯 뒤통수를 긁은 후 약간 자세를 바꿨다. 그랬다가 이내 의자를 바로하고 한쪽 다리를 올려 그 위에 팔을 걸친 자세로 하는 등 수차례에 걸쳐 앉아 있는 자세를 바꿔댔다.
‘이 자세가 제일 좋겠구먼. 우후후.’
마침내 자신이 생각해도 멋질 것 같은 자세를 잡은 장주는 내력으로 주변에 막을 쳐 소리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했다. 소리 지르면 바로 아혈을 제압하면 되겠지만, 조금의 소리라도 새 나가면 곤란했다.
그래서 내력 소모가 꽤 컸고 범위도 그리 넓지는 않음에도 이런 수고를 한 것이다.
모든 사전 준비가 끝나자 장주가 말했다.
“야, 깨워.”
“…….”
문사나 꽃미남 청년에게서 반응이 없자 재차 전음을 보냈다.
“뭐해, 빨리 깨워. 방음막 치고 유지하는 게 얼마나 힘든 건 줄 알어?”
“저기 둘째 형님…….”
“부르지 말고 빨리 깨우라니까.”
“아니, 저, 그게, 잠깐 좀 보시죠.”
꽃미남 청년의 전음이 뭔가 이상하자 고개를 돌린 사내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꽃미남 청년의 목에 서늘한 예기를 뿜어내는 검을 목젖 부근에 가져다 대고는 목욕을 하다 말고 나온 듯 머리에서 물기가 뚝뚝 흐르는 단연경이 대충 옷을 입은 채 서 있었다.
‘언제……?’
사내의 눈빛을 알아본 듯 꽃미남 청년은 늘어뜨린 손을 살짝 움직였고 문사도 비슷한 자세를 해 보였다.
“미안.”
“죄송.”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전음을 보내자 사내는 한 방 먹었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 상황 파악 끝났으면 밖으로 나가. 허튼수작하면 알지?”
단연경의 전음에 고개를 끄덕인 후 사내가 먼저 나갔고, 그 뒤를 이어 문사가 나갔다.
두 명이 나가자 단연경은 꽃미남 청년의 혈을 제압해 옆구리에 끼고 움직였다.
단연경은 밖으로 나온 후 그들을 호표원 내부의 지하 밀실로 데려왔다.
지금은 쓰지 않는 물품들은 넣어 두는 창고처럼 사용하고 있었지만 원래는 배신자나 침입한 적 등을 잡아 가두고 심문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 곳이었다.
이런 특별한 장소가 호표원이 비밀 안가 개념이라서 있는 것은 아니었고, 원래 큰 상가나 무가 혹은 대가에는 거의 대부분 필요에 의해 이런 곳이 다 있다.
어쨌든 이런 류의 밀실에선 꽤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비밀스런 대화들이 오고 가는 만큼 외부와의 격리를 최우선으로 설계되어 있다.
즉, 출입도 어려울 뿐더러 이곳에선 무슨 일이 벌어져도 어지간해선 밖에서 알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방음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을 이곳으로 데려오자 강대충은 단연경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경계 위치와 시간은 조정했고, 이곳 정리도 다 끝내 두었습니다.”
“수고했네. 그럼 가서 쉬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강대충이 나가 버리자 단연경은 한쪽에서 의자를 끌어와 다리를 꼰 채 앉고 사내와 문사는 앞에 반듯하게 서 있도록 했다.
그러고는 꽃미남 청년을 옆에 내려놓고 또다시 검을 목에 들이댄 후 입을 열었다.
“자, 우리 인사나 해 볼까? 너부터.”
단연경이 턱짓으로 사내를 가르키자 그는 눈을 슬슬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에……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뜸을 들이며 사내가 말하려 하자 단연경이 말을 잘랐다.
“그런 시커먼 걸 뒤집어쓰고 소개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음…….”
사내가 잠시 망설이자 단연경은 꽃미남 청년의 목에 대고 있던 검을 살짝 움직여 그의 턱을 톡톡 쳤다.
“결정하기 힘들면 내가 좀 도와줄 수도 있는데. 어떻게 결정하기 편하게 이 녀석 몸뚱이에 칼침 좀 놔줄까?”
“아, 벗도록 하지. 대신 부탁이 좀 있는데 말이야.”
단연경은 사내의 말에 머리를 긁적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분명 침입자다. 그것도 높은 수준으로 무공을 익힌 자들이었다.
모든 침입자는 단순하게 나누면 두 가지 부류다. 좋은 의도로 돕기 위해 온 자, 아니면, 나쁜 의도로 일을 벌이기 위해 온 자.
현재 그녀들이 도움을 받을 일은 없었기에 이자들은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었다.
후자에 속한 자들은 천하에서 가장 최악으로 인정되는 죄악을 저지르는 만큼 말보다는 손발로 먼저 만져 주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단연경이 지금까지 특별히 손을 쓰지 않고 있는 이유는 그들의 행동 때문에 확신을 하지 못해서였다.
그가 아는 한 후자에 속한 침입자들은 최대한 조용히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 침투와 동시에 곧바로 약을 쓰고 아혈을 제압하는 등의 행위를 한다.
그러나 이자들은 들어서고 나서 저희들끼리 뭐라 말하며 통상적인 행동과는 다른 요상한 짓거리를 했다.
물론 이런 것도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나 혹은 변태적 취향일 수도 있는 것이니 이만한 것으로 확신을 못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자들은 그 다음 행동도 일반적이질 않았다.
이런 류의 이들은 들키거나 잡힐 경우 온갖 악담을 하거나 곧바로 탈출 기회를 잡으려 한다. 그도 아니면 자신들의 뒤를 잡히지 않기 위해 목숨을 끊거나 뭐 그와 유사한 행위를 하려 노력을 하게 마련이었다.
헌데 이들의 반응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하다못해 전자에 속하는 자들의 일반적 행동과도 달랐다.
자신에게 잡힌 인질 녀석과 이들의 대장쯤 되는 듯한 사내는 난감한 빛을 띄우고 있었고, 나머지 한 녀석은 못마땅한 빛과 살짝 낙담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좀 독특하네라고 생각하며 넘어갈 수도 있는 반응들이었지만, 그렇지 못하는 이유는 이들에게서는 긴장감이나 위기감, 비장감 등 나쁜 짓을 하다 잡힌 자들이 반드시 보여할 반응들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건 나름 위협적인 장소인 밀실에 와서도 비슷했다.
가끔은 아주 대단한 실력자인 경우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그런다고는 하는데 그건 아닌 것으로 보였다.
‘뭐야, 이것들은. 반응이 꼭…….’
느낌상 떠오르는 게 있었지만 딱 어울리는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이 표현을 생각하느라 단연경의 미간이 더욱 좁혀지다 한순간 확 벌어졌다.
‘아하, 그래. 어른들이 하지 말란 짓 하다 걸린 애들 같구만. 둘은 주동자고 하나는 하기 싫은데 억지로 끌려온 모습. 딱이네. 그럼 고민이고 뭐고 필요없지.’
어울리는 표현이 떠오르며 이들의 행동이 이해되자 고민할 가치도 없는 걸로 고민한 자신에게 허탈해 피식 웃고 말았다.
단연경은 꽃미남 청년의 목에 대고 있던 검을 천천히 치우며 다른 손으로 가벼운 손짓을 했다.
단연경이 실소를 보이며 검을 치우려 하자 사내는 전음으로 도망칠 작전을 전했다. 자신이 공격을 가해 시간을 벌 테니 그 사이 문사가 꽃미남 청년을 데리고 도망치는 것이었다.
꽃미남 청년도 사내의 전음을 듣고 몸만 움직이면 바로 뛰어 도망치겠단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단연경의 손짓을 따라 미풍이 풀더니 갑자기 막힌 혈이 풀리며 몸이 움직이자 앞으로 몸이 쭉 쏠렸다.
뛰쳐나가려는 생각이 몸이 풀리며 자동으로 실행된 것이었다.
어쨌든 그 탓에 아직 다 치우지 못한 검날에 목을 들이대고 달려드는 꼴이었다. 예기가 줄기줄기 흐르는 검날에 이대로 돌진하면 연약한 목에 깊은 상처가 날 게 뻔했고 자칫 목숨도 날릴 수 있었다.
꽃미남 청년은 태어나 가장 격하게 혼비백산해 온 천근추를 사용해 앞으로 쏠리 중심을 잡고 관성에 의해 앞쪽으로 계속 진행되는 상체를 멈추기 위해 허리에 온 힘을 쏟아부어 뒤로 당겼다.
그러고도 모자라 목을 뒤로 빼기 위해 턱을 힘껏 당겼다.
하지만 워낙 창졸간에 벌어진 일인지라 검날 앞에서 도저히 멈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 아직 세상엔 미인들이 많은데……. 지난번 배에서 보았던 그녀들을 다시 한 번 봐야 되는데……. 이렇게 죽으면 창피한데……. 아, 어머니…….’
후회와 안타까움 등의 감정이 폭발하고 짧은 인생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고, 곧 이제 죽는구나란 생각을 하며 꽃미남 청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사내와 문사는 이 어이없는 사태를 막기 위해 동시에 움직였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사내와 문사는 차마 꽃미남 청년의 어이없는 죽음을 볼 수 없어 눈을 감아버렸다.
눈 한 번 깜빡할 정도로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정적이 찾아왔다.
꽃미남 청년은 당연히 있어야 할 고통이 없자 왼쪽부터 실눈을 떴다.
목을 가를 것이라 생각했던 검은 안 보였기에 다른 눈도 마저 뜨며 손으로 천천히 목젖 부근을 만져 보았다.
통증도 없고 피도 없었다. 꽃미남 청년은 두 눈을 치뜨며 다른 손까지 이용해 목 전체를 빠르게 더듬거리다 앞쪽에서 달려나오며 손을 쭉 뻗은 자세로 두 눈을 꼭 감고 굳어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둘째 형님……. 양 사형…….”
꽃미남 청년의 목소리에 감고 있던 두 눈을 뜬 사내와 문사는 그의 무사를 확인하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괜찮은 게냐?”
“예. 형님.”
“으허헝!”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둥켜안으며 감동의 해후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