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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화타 1 (6화)
1장 의원(醫)(6)
서로 공감할 수 있는 화제로 두 사람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승연은 홀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정체 모를 흑의인들. 만년한빙석이란 귀물을 맡기고 간, 아마도 북해빙궁의 인물로 예상되는 자들. 소미의 병. 진유를 따르는 려라는 이름의 여인도, 이런저런 고민들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이 되어, 상념 아닌 고민에 잠겨가던 것이다.
그러다가 두 사람의 대화가 어느 정도 잦아들 때 즈음, 승연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소미에게 말을 걸었다.
“헌데 아가씨…… 정말 통증이 가신 것입니까? 혹, 그 건방진 녀석을 감싸시려고 그런 것이라면 당장에라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승연이었지만 소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정말로 고통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데, 아직 눈치채지 못하셨나요? 화연이 너도?”
뜬금없이 무엇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일까, 생각하던 화연과 승연은 이어지는 소미의 말을 듣고서야 그녀가 말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도 이렇게나 오랜 시간 동안 고통없이 편하게 말해 본 적이 없어서 조금 생소한 느낌이긴 하지만…….”
“아…… 그러고 보니 아가씨, 이마에 땀이 없으시네요?!”
유독 땀이 나면 이마에서부터 땀이 먼저 난다는 것을 오랜 시간 지켜봐왔기에 알 수 있었던 화연이 기쁨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승연의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그대로였다.
“잠깐 동안 고통을 잊게 한 실력의 의원 정도는 가문에도 몇이나 있지 않았습니까? 완치될 수 있을는지는 아직…… 앗! 이, 이런……!”
말을 하고 나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백호검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이 자신을 걱정해서, 그리고 그동안의 여러가지 경험으로 인한 것임을 아는 소미는 담담한 표정으로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일 수 있었다.
그래도 승연이 죽을 죄를 지었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자, 슬며시 눈을 감은 소미는 손에 쥔 빙석의 감촉을 느끼며 천천히 말했다.
“아저씨의 직감이 뛰어난 것도, 또 말씀하신 바에 일리가 있다는 것도 소녀 역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이, 그런 확신이 드네요. 반드시 의원님, 아니 진유 님께서 제 병을 치료해 주실 거란 그런…… 후훗,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저 자신도 스스로가 신기하게 느껴지지만요. 그런데 연아?”
“네, 아가씨?”
“아까 굉장히 몸을 떨고 있던데,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니?”
걱정 어린 소미의 말에 당치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은 화연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아픈 곳이라뇨, 제가 그런 게 있겠어요? 걱정 마시고 아가씨 몸을 돌보셔요.”
“그래.”
다행이라는 듯이 미소로 답한 소미는 거기까지 말하고, 천천히 눈을 돌려 진유가 나간 방문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문 앞에서 귀찮다는 듯이 찡그린 표정이 잘 어울리는 남자가 아른거리는 듯했다.
“얼마 나왔냐?”
절그럭―
“이만큼.”
“흐음…… 약재값은 되겠군. 창고에 넣어두고 와.”
“…….”
“아침 내내 안고 있었으면서 부족하냐?”
“부족해.”
“나참…….”
마루에 앉아 있던 진유는 등뒤에서 자신을 껴안고 있는 려의 모습에 혀를 차면서도 그 손을 거부하지 않았고 려는 서늘함이 감도는 자신의 팔을 그의 가슴 언저리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려가 말을 걸어왔다.
“그 여자, 병은?”
“어차피 정신 상태가 안드로메다 간 인간들 뺨치는 무가의 헛짓거리겠지.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고 했으면 최측근이 아닌 이상 외부인이 그걸 아기 입속에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로 천하제일가가 호락호락한 곳은 아닐 테니까. 그러고보면 나도 말실수를 했군. 선천적이 아니라 후천적인 건데 말이지.”
거기까지 말하고, 살짝 한숨을 내쉰 진유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자연히 려의 몸도 일으켜졌지만 진유는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말을 이었다.
“얼마나 있디?”
“산 전체, 20명.”
“결국 끝까지 들어 처먹을 생각을 않는군. 이래서 무인들이란, 쓸모도 없고 말귀도 못 알아먹고. 써먹을 구석이 없어요.”
“잡아?”
“아니, 됐어. 그렇게 물러갔으니 당장 덤벼들진 않을 테고 분명 대가릴 데려오겠지. 매―번 그래 왔잖냐.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의원으로서 명성을 날리고 싶은 생각이 진유에게는 없었다.
다만 누군가를 치료해 주면서 필요나 이유에 의해 가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게 다른 삼자에게 악인이 되었든 선인이 되었든 간에, 다만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았던 자신의 할아버지처럼.
그나마 이 마을에 정착해 산골짜기에 틀어박혀 있던 것이 무림과 얽히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할아버지의 사후 직후, 이상하리만치 무인하고 얽히는 일이 많았다. 사실은 그때부터 어떤 의미에서 포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집을 이사한다거나 이름을 바꾼다는 선택지만큼은 고르지 않았다.
그 어떤 이유보다도, 신주에서 가장 높은 산이면서 과거 대붕이란 이름의 전설의 새가 날아들었다고 하는 붕우산(鵬遇山).
그곳의 정상에 진유에게 있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이 잠들어 있다.
‘그리 길지만은 않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줘요, 할아버지.’
오랜만에 떠오른 할아버지 생각에 잠시간, 그렇게 눈을 감고 추억을 떠올리던 진유는 문득, 오늘이 한 주의 처음이자 마지막 휴일임을 상기해 내곤 바삐 걸음을 움직여 산을 내려가려다가 옷깃을 붙잡는 려의 손길을 제지했다.
“넌 집에 있어. 안 그럼, 쟤들 죽어.”
방 안을 가리키며 태연하게 무서운 말을 읊는 진유를 향해 려는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진유가 품속에서 작은 방울 하나를 꺼냈는데 신기하게도 꺼내면서 몇 번이나 흔들렸음에도 아무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모습에 겨우 려가 진유를 붙잡으려고 내뻗던 손을 되돌렸다.
“됐어?”
“응. 다녀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진유는 그녀가 그 나름대로 불만을 표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 해주는 말은 없이, 빠르게 집을 벗어나며 뒤로 간단히 손만 흔들 뿐이었다.
언제나처럼.
* * *
“격조……하셨군요.”
연주가 끝난 금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청아한 목소리에 묻어나는 단정함이 명가의 여식을 마주하는 것만 같다.
절로 고개를 돌릴 만도 하건만 어떠한 장식도 없는 살풍경한 방 안에 덩그러니 놓인 사내의 눈은 이제 막 동이 트기 시작한 언덕 너머에만 머물러 있었다.
손에 든 푸른 호리병을 연신 들이키는 그의 모습이 안타까워서일까. 대답없이 독주하는 그를 대신해, 여인이 안쓰러운 어조로 재차 말을 잇는다.
“몸에 해로우십니다. 하다못해 안주라도…….”
“아니 됐어. 이것만 마시고 끝낼 거니까. 꿀꺽꿀꺽! 캬아― 맛 좋다. 너도 마실래?”
“주신다면…….”
여인은 그렇게 말하곤 자신에게 드리워진 어둠을 헤치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차분함이 묻어나는 분위기에 어울리는 가느다란 눈매. 살짝 닫혀 있는 분을 바른 입술이 묘하게 매혹적인 것은 그녀의 직업이 기녀라서만은 아닐 것이다.
사내는 벽으로 된 창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백의에 수놓아진 백합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여인의 모습에, 사내가 질문했다.
“옷 샀냐?”
“아니요. 변변치 않은 실력이오나 직접 만들어 본 옷입니다만…… 이상합니까?”
“아니. 잘 어울려서. 역시 넌 그런 쪽에 재주가 있어. 그래 포목점을 해보는 건 어때?”
대수롭지 않은 저 한마디가 많은 기녀들의 꿈을 이뤄주었다. 본인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할 일들.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봐왔기에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더욱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했다. 자신이 여전히 기녀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남자 때문이기에.
여인은 대답 대신 고요함이 묻어나는 미소만을 입가에 띄우며 천천히 술잔을 내밀었고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는 이윽고 천천히 잔에 술을 따랐다. 곧 그가 보는 앞에서 천천히 남기지 않고 들이킨다. 원래대로라면 무례한 년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일이지만 그는 반대였다.
고개를 돌리고 받는 것을 되레 싫어했던 것이다.
“싫으면 말로 해라 말로. 괜히 억지로 술 마시지 말고.”
퉁명스레 건네오는 말에도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는 지워질 생각을 않는다.
“진유 님이 따라주시는 술이라면 얼마든지 기쁘게 마실 수 있습니다만?”
“하여간 말이나 못하면.”
그렇게 말하곤 다시 고개를 돌려, 창문으로 된 벽 저 너머의 언덕에 다시 시선을 고정시키는 그.
그런 그의 옆모습을 응시하며 여인은 조금씩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낙양에서 화려한 외모로 세간에 이름을 알리고 있는 그 화화공자처럼 잘생긴 외모도 아니었다. 간혹 알 수 없는 말들을 쓰곤 하나 딱히 여인과 어울리기에 특출난 화법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반해 버렸다. 일평생을 같이 보내도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만을 자각하게 만드는 남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진유 님.”
“왜?”
“안아주세요.”
몇 번이고 거절당하더라도 고백하게 되었다.
백접(白蝶)이란 허명에 자만하지 않게 될 수 있었다.
기녀로서 몸을 팔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도록, 얼마나 절망적이라도 꿈을 향한 희망을 버리지 않도록 만들어 준 이 남자가, 진유란 이름의 그가 그저 좋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한결같았다.
“즐.”
“……저, 진유 님. 대체 그것이 무슨 뜻인…….”
“즐겁게 살라고. 나 간다.”
휘휘 손을 내저으며 스치듯이 그녀를 지나친 진유는 문을 나서기 전 짤막한 전음을 덧붙였다.
―쎄고 쌘 게 남자란 인종이다. 하늘의 별처럼 말이지.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려 보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품고 있던 한마디를 그가 나간 후에야 힘겹게 내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 당신은 단 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한숨을 토해내며, 무거운 공기를 애써 이겨내려 한다.
고요하기 만한 이 밤이 그녀에겐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