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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화타 1 (7화)
1장 의원(醫)(7)


“어딜 가시는 건가요?”
“어, 잠깐 마을에 좀 들를 생각이거든. 왜?”
“아,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요.”
진유는 괜히 말을 얼버무리는 소미를 바라보다가, 옆에서 혼자 조마조마해하는 화연을 보며 피식 웃으며 제안했다.
“같이 갈래?”
“네?”
“장 보러, 같이 갈 거냐고.”
뜻밖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오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 같은데, 화연을 바라보니 어서 승낙하라는 듯이 벌써 화색이 돌고 있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장을 보러 가는 건 실례가 되지 않지만, 고작 장 보러 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이유는 없겠지.”
괜히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움찔 한 화연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고 소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곧 방 안에서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빙정을 가진 덕에 활동에 그럭저럭 자유로움이 생긴 그녀로서는 오히려 이런 남장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입어도 출중한 미모가 가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화연으로서는 조금이라도 더 꾸미지 못하고 나서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렇게나 어여쁘신데 진유 님은…….’
“가자, 늦었다.”
언제나와 다를 바가 없다. 한숨을 쉬는 자신의 곁에서 은은한 미소를 흘리는 소미를 보며 또다시 한숨이 흘러나오는 화연이었다.
“오오― 진유 아니냐? 이번엔 꽤 오랜만에 왔구나. 두 달 만 아니냐?”
“매번 만나면서 무슨 그런 말을.”
손사래를 치는 진유의 말보다도, 두 달이라는 말에 소미와 화연은 세삼 진유라는 남자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산에서 사는 사람치고 사람이 그립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저 치들이야 여기서 나를 보는 게 오래간만이겠지만 난 저 집에서 매일매일 본단다. 아주 지긋지긋하지.”
중얼거림에 가까운 대화에 소미는 웃음을 참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참한 색시감이구먼. 이래서 우리 딸내미한테는 시선 한 번 안 준 겨? 허기야 이만하면 그럴 만도 허겄지.”
넉살좋은 여인의 말에 소미가 화답하기 전, 진유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제 색시 걱정보다 곽 아주머니 남편부터 잡아두시죠.”
“엉? 뭐여…… 설마 그 인간 또 뱀술 사갔냐?!”
대답도 듣지 않고, 아마도 먼지를 쓸어내던 비를 거꾸로 움켜쥔 그녀의 기세가 흉흉했다.
“이 웬수를 그냥!!”
그리곤 어딘가로 황급히 떠나가는 여인. 허탈한 시선으로 그 뒷모습을 쫓던 화연과 소미는 재촉하는 진유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그 뒤를 따랐다.
“뭔가…… 굉장히 번잡하네요.”
“다들 가난해서 그래. 쉴 틈 없이 바쁘니까. 노는 것도, 일하는 것도…….”
진유는 소미들과 대화를 하면서도 꾸준하게, 주변에서 걸어오는 한마디 한마디에 대답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다소 건방진 태도에 익숙한 듯이 걸쭉한 욕설을 하면서도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런 진유의 손에는 어느덧 한 보따리에 가까운 짐이 들려 있었다.
“아― 저거 맛있는데……!”
무심코 내뱉은 화연의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리로 향했다. 빙당 따위의 과자를 파는 상인이 거기에 서 있었다. 묘한 신음을 흘리던 진유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화연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바꿔 먹어.”
“네? 이건……?!”
반사적으로 받아 든 물건을 알아본 화연의 얼굴이 굳어가는 것을 보고 소미 역시 뭔가 싶어서 쳐다봤다가 그와 비슷한 얼굴이 되어 진유에게 물었다.
“진유 님 이건…….”
“엿…… 아니, 빙당 바꿔 먹으라고. 아마 어지간해선 거의 다 줄걸.”
세상에, 암기를 엿바꿔 먹으라고 주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기가 막힌 노릇이었지만, 그걸 발견한 행상인의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이야아― 이것 참 좋은 물건을 가지고 계시군요 아가씨! 어떠십니까, 여기 있는 빙당들과 조금 바꾸시는 게?!”
“네…… 어…… 저, 그게…….”
망설이는 그녀에게 찡긋 웃어 보인 행상인은 먹으라는 듯이 빙과 하나를 건네주며, 다른 하나를 곁에 서 있던 소미에게도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든 소미와 화연은 자신들도 모르게 진유를 쳐다봤지만 이미 진유는……
우물우물.
“단맛이 좀 덜한데.”
“너무 달면 뒷맛이 안 좋은 법입죠.”
이미 먹고 있는 중이었다.
분위기에 휘말린 것일까, 거리의 음식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무심코 한 입 베어문 달달한 과자의 맛이란 분명 여태껏 맛본 적 없는 굉장한(?) 것이었다.
화연 역시 그립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무척이나 맛있어 하는 눈치였다.
“어떠십니까요, 지금이라면 가져가실 만큼 가져가실 수 있습죠!”
“하지만 이건 진유 님이…….”
“그니까 바꿔 먹으라고. 난 써먹을 수도 없는 거니까.”
돌려주려는 화연의 손을 휘휘 내저으며 거절하는 진유는 이미 다른 가게로 향하고 있었다.
소미는 자신에게 허락을 구하는 화연의 시선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화색이 되어 즐거운 표정으로 과자를 고르는 화연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진유를 뒤따르며 대신 감사의 말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지 마.”
퉁명스런 것은 둘째치고 내용이 사람의 귀를 의심케 했다. 그나마 경험이 없었다면 농담처럼 웃어넘기는 것은 어려웠을지도 모를 만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람 된 도리로서 은혜를 어찌 잊을 수가…….”
“그런 생각이 들면 된 거지. 굳이 꼭 갚겠다느니 어쩌느니 하지 마. 괜히 보답받고 싶어서 그러는 것 같으니까.”
“제가, 실례를 한 것일까요?”
진유라는 유형은 분명히 말해서 소미가 처음 겪어보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
무인 중에서 이런 사람은 결코 많지 않았다.
얼핏 문사 같으면서도 과격한 파락호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그래서 오히려 문중의 어르신들을 대할 때보다도 언행에 한결 조심스러워지는 그녀였다.
그 심중을 짐작한 진유는 한숨을 내쉬며,
“이런 걸로 실례라고 말하지는 않아.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라고. 심플이즈베스트. 아, 이건 모르겠구나. 그러니까…… 그래, 있는 그대로. 아까 그건 그냥 팔아먹을까 했는데 여기서 팔긴 어려울 것 같았거든.”
“그런가요?”
세공 상태도 무척이나 좋아 보이는 단검이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소미는 어쩐지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마주 끄덕이는 진유의 얼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과 동일한 듯싶었다.
“그래, 팔 곳이 없지. 뭐 그런 무거운 거 들고 다녀봐야 나만 힘들고, 단 건 별로 안 좋아해서.”
“후훗. 그러시군요.”
저도 모르게 베어나온 웃음이 혹 결례가 되지는 않을까 싶으면서도, 진유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긴장감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의 조심스러움도 이런 식으로 금세 풀어지는 게 아닐까.
“진유 님, 감사드려요! 정말 잘 먹을게요!”
“그래 잘 먹으면 된 거지.”
유쾌하게 웃으며 길을 나서는 그를 따라 몇 개의 가게에 들른 두 여자는 오래간만에 느끼는 자유다운 자유에 몸을 맡기며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포목점에서 옷을 사는 것도 처음인 소미로서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게만 느껴졌다. 결국 장이 파할 때까지 마을에서 시간을 보낸 뒤엔 땅거미가 질 무렵이 되어 있었다.
“오늘…… 정말 재미있었어요.”
지쳐 있는 와중에도 웃는 얼굴을 잃지 않는 화연만큼이나 화사하게 핀 웃음꽃이 소미에게서도 가시지 않았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것일까.
집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것들이 세상 속에는 이렇게나 많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경험했다는 것이 안타까울 만큼 기뻤다.
“그런데, 이 많은 짐들은 다 어떻게 하죠?”
진유는 대답 대신 소매에서 작은 방울을 하나 꺼내 한 차례 흔들었다. 떨림이 보일 정도로 강하게 흔들렸건만,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질 즈음 그녀들의 뒤에서 못 보던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불렀어?”
“꺅!”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화연의 뒤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려가 서 있었다. 진유는 대답 대신 짐을 가리켰고, 짐과 진유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던 려는,
“한 시진.”
“미쳤냐? 일다경이면 충분하지.”
“짐, 많아. 게다가 오늘은 아무것도 없었고.”
어딘가 시무룩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지만 그걸 아는 건 진유뿐이었다.
“한 식경으로 하자. 인간적으로 시진은 아니지.”
미묘하게 불만스런 듯했으나―소미가 보기엔―곧 짐들을 너무나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앞장서는 려를 보며 화연은 차마 하지 못할 말을 조심스럽게 소미에게 건넸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려 아가씨는 무인이겠죠 역시?”
“그, 글쎄…….”
소미로서도 확실한 대답을 주기는 어려웠다.
애당초 무공을 익히지 못한 몸이었으니, 무인에게 저만한 짐이 어렵지는 않겠지만 그 날 습격에서 보여준 려의 모습은 이제껏 보아온 무의 기준을 산산히 부숴 버릴 만큼 대단해서 소미는 감히 자신이 그녀를 판단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단지……
‘이런 게 호승심인 것일까? 무가의 피를 이어서 어쩔 수 없는 무인인 걸까.’
어딘가 모르는 불만감에, 괜한 기우라 여긴 소미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애써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렇게 이런저런 고민을 들고 돌아온 그의 집이지만, 그 고민들을 더 고찰할 여유는 없었다.
어느새 줄을 지어 선 환자들은 마당을 넘어서 아예 산자락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것이다.
“그럼 시작해 볼까.”
담담하게 토해내는 그의 말에 묻어나는 익숙함만이 이 광경을, 아마도 그는 질리도록 보아왔던 것이리라 조심스럽게 짐작해 볼 따름이었다.
폭풍과도 같던 한 차례의 진료가 지나가고 난 후의 자리에서 소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매번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시나 보죠?”
곁에서 사람들의 대화를 들어준 것만으로도 지친 기색이 역력한 소미의 목소리에 진유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뭐 그렇지…… 오늘은 꽤 일찍 끝난 거야. 그래 봤자 오후 되면 또 우르르 몰려오겠지만…….”
“오, 오후요?”
막 물을 가져다주던 화연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오전만 하더라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 것은 둘째치고, 소미에게 달려드는 이들을 저지하느라 심신이 지친 건 화연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오후도 그런 수준이라면, 가볍게 안색이 핼쑥해지는 두 여인을 보며 진유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길래 자리를 잘 잡았어야지.”
“…….”
어색하게 웃으면서 새삼스럽게 자신이 누운 자리를 돌아보게 되는 소미였다.
진유와 멀지 않은 곳이라면 괜찮을 거라 여겼는데, 그게 하필 문하고도 가까운 곳이었다.
왔다 갔다 하며 소미의 얼굴을 훔쳐보느라 바쁜 이들에 다가오는 사람들까지. 지치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요?’
갑작스런 귓속말에, 소미는 의아해하면서도 뭐가? 되물었다.
‘그렇잖아요. 오늘 손님 중에 절반은 거의 여자들이었는데 한결같이 미모가 굉장했어요. 물론 소미 아가씨보다는 떨어지지만,’
‘얘, 얘는……!’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는 소미였지만, 확실히 이상하리만치 손님 중에 여자들이 많았다. 그것도 무척이나 젊은 축에 속하는 여자들이.
직업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게다가 그 여자들…… 이상하게 아가씨를 노려보고 가더라구요. 대체 왜 그러는 건지…….’
그건 확실히 소미도 느낀 바가 있었다.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따라가보면 어김없이 언짢은 듯한 표정의 여성들이 바라보고 있었기에.
영문을 몰라서 의아했지만, 그저 진유와 자신의 관계를 괜히 오해하진 않을까. 소미는 자신의 화보다도 그런 것이 더 걱정이었다.
“역시 물은 지하수지.”
한편 화연은 물끄러미 진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새삼 다시 보는 중이었다.
작은 방― 넓은 마루의 의미가 이러한 것인 줄은 결코 짐작하지 못했다.
마루마다 번호가 쓰여 있던 이유도 모두 환자들의 순번을 지키기 위한 것임을.
겨우 동이 트고 얼마 지나지 않은 이른 아침에도 이렇게나 사람들로 붐벼 있다.
그리고 모두가 한결같이 조용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그녀가 살던 곳을 떠올리면 그건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모두가 자신의 병세를 먼저 봐주기를 원하므로.
특히 소미와 같이 인근에 구호 활동을 하러 갈 때면 더욱 극성이었다. 그에 비해 이런 질서 정연한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