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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화타 1 (8화)
1장 의원(醫)(8)


“뭐…… 처음에야 여기도 똑같았지.”
“그럼……?”
“귀찮아서 한마디만 했어. ‘진료 안 해’.”
“풋!”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려는 것을 막는 화연에게 진유는 물을 한 모금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지들이 어쩔 거야. 의원이 귀찮다는데. 아니, 진짜 성가셔진다니까. 여기저기서 달라붙고 그러면 진찰하고 싶은 마음도 싹 사라져. 까놓고 말해서 내가 아픈 것도 아니니까.”
“소, 솔직하시네요.”
“그럴 수밖에 없어. 순서가 엉망이면 쓸데없는 시간이 더 잡아먹히거든. 나 하나 욕 먹고 한 명이라도 더 진찰받는 게 현명한 선택이지. 그게 편해. 지금은 그러지 않아도 돼서 더 편하고. 좀 더 편해지기 위해, 그래…… 난 이제 좀 쉬어야겠는데…….”
말꼬리를 흐리던 진유의 시선이 화연이 들고 온 쟁반으로 옮겨간다.
“그건?”
“아― 죄송합니다. 고단하실 것 같아서 멋대로 부엌에 들어갔는데 그게…… 죄, 죄송합니다. 값은 반드시 치를 테니…….”
어색한 미소를 짓다가, 이내 허둥지둥 밖으로 나서려는 화연의 팔목을 붙잡은 진유는 나지막히 한숨을 흘리며,
“이거 내가 만든 거야.”
“아…… 그, 그러신가요?”
“뭐…… 향도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고, 잘 끓였네. 고맙다.”
금세 쟁반을 옮겨들고 후륵― 하고 차를 들이키는 진유를 보며 화연은 내심 안도하는 한편 백호검과 소미에게도 각각 한 잔씩을 내주었다.
중원에서 파는 차들과 많이 다른 향에 백호검이 의아해할 무렵 소미는 한 모금 들이킨 차 맛에 언젠가 읽어본 서적의 내용을 떠올렸다.
은은하다기보다는 달콤함이 느껴지는 특이한 향. 분명 이제껏 마셔본 적이 없는 차였다. 노란 빛을 띄는 열매. 새콤하면서도 그윽함이 묻어나는 독특한 향기를 지닌 그 이름은……
“유자…….”
“어? 알아?”
드물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살짝 크게 뜨는 진유의 모습에 되레 놀란 표정을 지은 것은 소미와 화연이었다. 화내는 모습이나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두 사람의 머릿속에 동시에 든 생각이었다.
“차(茶)로 차(車)도 살 수 있는 땡중들만큼은 아니지만 그런데로 차는 즐기는 편이지. 여기 차는 영― 입맛에 안 맞아서 구하는 데 애먹었지만. 근데.”
“에……?”
“누구 온 거 아니었어? 후륵.”
“그걸 어떻게……?”
놀라운 표정을 짓는 화연에게 진유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그냥 감. 찍은거야.”
진유의 말에 조금 얼이 빠진 표정의 소미와는 달리, 화연은 여전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잊고 있던 만큼, 찾아온 사람의 신분이 자신과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었다는 것을 떠올린 탓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벽력 같은 외침이 밖에서부터 세 사람이 있는 방 안에까지 울려 퍼졌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인가 매제!!”
처음엔 그 심후한 내력이 담긴 소리에 놀란 두 여인은, 이어지는 한 단어에 또 한번 놀라고야 말았다.
매제라니…… 설마하니 진유가 이미 누군가와 결혼을 했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는데 괜시리 가슴속의 두근거림이 커져 가는 가운데 두 여인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진유는 잊고 있던, 그러나 분명히 있을 ‘성가신 두 예약 손님’을 떠올리곤 고개를 설래설래 내저었다.
“거기냐?”
“팽가.”



2장 손님(客)(1)


하북의 패자, 팽가.
사천땅에 당가가 있다면 하북에는 팽가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림에 팽가가 미치는 영향력은 컸다.
이름 그대로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천하제일가나 제왕가라 일컬어지는 남궁세가에 비하면 손색이 없지는 않지만 도에 대한 자부심과 실력은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실력 있는 무가(武家)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무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
당가의 경우 아집과 지독한 정신력이 바탕을 이룬다면 그들은 자존심과 도를 믿는 자신감이 무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 중요한 손님을 두고 진유는,
“가, 갑자기 어디를……?”
“저 인간들이 굳이 여기까지 오는 이유는 별로 없지. 제길, 오늘은 사서 먹으려고 그랬는데. 려! 닭 한 마리 잡아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목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닭 한 마리를 들고 나타난 려의 모습에 소미와 화연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서, 설마 그걸로…….”
“난 요리사의 자식이거든.”
툴툴거리며 부엌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소미와 화연의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도통 알 수 없는 사내로군.”
백호검의 중얼거림에 두 여인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것참, 선객이 와 있는 줄은 몰랐구만! 흐하하하!! 반갑네! 나 팽무성일세!”
찾아온 팽가의 손님 중 한 사람은, 감히 자신들과 연배를 견줄 수 없는 사내였다.
현 팽가주의 친동생이자 수신호위의 한 사람, 철혈도제(鐵血刀帝) 팽무성(彭武成).
거의 천하제일가의 가주와 그 연배가 비슷한 사내이면서, 사파의 십마왕(十魔王)의 일인과 겨뤄 무승부를 이뤘던 전적은 이미 전설에 가까울 정도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천하제일가의 천소미라고 합니다.”
“오오― 그래그래. 자네가 바로 그 무림이화 중 한 명인 난화로구먼. 몸이 안 좋다고 하더니, 그래서 매제를 찾아온 것인가?! 탁월한 선택이지 아암! 그럼 자네가 이 아이의 호위무사인가?”
“백호검이란 허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스런 하대에 백호검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담아 인사하자 팽무성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하하하하― 그렇구만, 같은 호위끼리 정진하세나!”
“아, 예에…….”
호탕한 팽무성의 웃음소리에 어색한 미소로 마주보던 소미는 남아 있는 다른 한 명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팽무성의 경우엔 전형적인 무인다운 성격인지라 대하는 것에 크게 거리낌은 없었지만 문제는……
“팽무린(彭武麟).”
그런 짤막한 소갯말을 남긴 그녀는 다름 아닌 현 팽가주의 외동딸이었다.
하지만 이름을 말하고 난 뒤로는 진유가 들고 온 식기에 담긴 음식을 먹는 데에 열중하는 것인지 전혀 관심조차 없는 얼굴이었다.
대부분의 팽가의 사람들이 비무행을 나가 자신의 실력을 검증받는 것으로서 가문의 인정을 받는 데에 비해 팽무린은 달랐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그리고 별호를 모르는 이는 없다.
무림십대기보 중 하나인 혈영도(血影刀).
그림자를 베고 난 자리에 선혈이 흐른다.
그녀가 그 도를 들고 나서 베어 버린 무인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도 않았고 치명상이 있을지언정 죽은 사람 또한 없었지만 그중 누구 하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인 역시 없었다.
그 당시 팽무린의 나이 불과 15세.
그녀를 지켜보던 현 무림맹의 맹주는 물론이고 각 세가의 가주들 또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사건이 그녀를 일약 정파 후기지수 최상위의 반열에 올린 것이다.
이후 특별한 비무행이 없이 호사가들은 그녀에게 가장 어린 기보의 주인이라 말하며 그녀를 혈영도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것이 지금에 와서 그녀의 별호가 된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런 많은 점들을 제하고서라도 지금 소미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사실 다른 점에 있었다.
‘매제…… 진유 님을 매제로 부를 정도라면 분명 굉장한 관계일 텐데…… 혹시?’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생각을 내가 대신 말해볼까?”
“네?”
“대체 하북의 도쟁이들이랑 한낱 의원나부랭이인 내가 어떻게 아는 사이일 수 있는 것일까? 그것도 매제니 어쩌니 말이지.”
“앗! 그, 그게…….”
“뭘 그리 당황하고 그러냐.”
“그게…… 진유 님께 실례되는 생각을 한 것 같아서요.”
소미의 말에 진유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별게 다 실례구만. 신경 안 써도 돼. 뭐…… 팽가하고는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져 온 인연이라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하하하하!! 매제는 매제지! 식은 언제쯤이면 좋겠는가?!”
“시끄러워!! 오해 발언 좀 그만하고!! 금의위한테 찔러주기라도 바라는 겁니까 이 빌어먹을 양반아?!”
“하하하하하!!! 부끄러워하지 말게 매제!!”
아무래도, 팽가의 손님은 진유의 말투에 이미 익숙한 사람인 듯싶었다. 저 정도 말에 웃음을 터뜨리다니…….
그렇게 진유와 팽무성이 투닥거릴 무렵, 소미는 그 와중에도 말없이 식사에 전념하고 있는 팽무린에게로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팽가의 사람답게 늘씬한 키와 고급스런 붉은 천으로 질끈 묶은 머리카락은 곧게 빗은 자신의 머리카락과 다르게 바람의 흐름에 따라 자유분방히 나부끼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성숙한 몸매와 붉은색 입술이 확실히 자신과는 차이가 있었다.
치켜뜬 봉목이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사람이었지만 묘하게 자신을 가시처럼 여기는 시선. 하지만 곧 그녀와 비슷한 사람을 머릿속에서 떠올릴 수 있었다.
가깝지만 멀게만 느껴지는 사람을.
아니, 그 사람은 자신을 가시처럼이나 여기는 것일까?
‘언니…….’
“뭐야, 천하제일가의 인간이면 팽가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건가?”
“앗! 죄송합니다 저는…….”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분명, 팽무성에게는 자신을 소개했지만 팽무린과는 따로 통성명을 나누지 않았던 것. 서둘러 자신을 소개하려고 했지만 되레 손사래를 치는 무린의 모습에 그럴 수도 없었다.
“알고 있어, 됐으니까 앉아. 그냥 시비 한 번 걸어보려고 한 거야.”
“네……?”
그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반문을 하든 말든 무린은 흡사 라유(고추기름)를 쏟아넣은 듯한 밥을 먹는 데에 집중했다. 여전히 얼이 빠진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소미에게 무성이 웃으면서 대신 사과했다.
“아, 이 녀석은 원래 성격이 이래서 말이지. 자네가 이해해 줬으면 하네.”
“아, 아뇨, 괜찮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대인 관계에 익숙했던 그녀였기에 어색하지 않게 미소를 지을 수 있었지만, 먹는 중간중간 날카로운 눈매로 쏘아보는 무린의 시선은 확실히 견디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