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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화타 1 (9화)
2장 손님(客)(2)
두 사람의 그런 미묘한 공기를 진작에 눈치채고 있던 진유는 한숨을 내쉬며 정확히 두 사람의 시야에 끼어들어 갔다.
두 사람은 물론이고,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주먹을 말아올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팽무린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결코 작지 않은 소리가 울려 퍼지고, 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거기에 툭― 하고 내던지는 진유의 목소리.
“너 맞을래?”
“내, 내가 뭘!”
소미와 화연은, 진유가 무린을 때리려는 폼을 잡는 순간부터 혹시나 싶은 심정으로 조마조마한 시선을 두 사람에게 보내다가, 이윽고 벌어진 상상 외의 사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일반인이라고 하기에 진유는 대단한(?) 남자였다.
누가 감히 혈영도의 머리를 때릴 수 있을지…… 더 놀라운 건 그녀의 반응이었는데 흡사 자신의 윗손을 대하는 그 모습이 특히 그랬다.
“남한테 시비 거는 게 그렇게 당당한 일이냐?”
“그, 그냥 장난이잖아!”
“‘아∼ 아아?’”
“……요.”
조그맣게 요,를 덧붙이는 팽무린의 모습이 진정으로 그 혈영도의 주인일까.
누가 봐도 의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었지만 한편으론 그녀를 대하는 진유의 태도가 극히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였다.
엄격한 오빠가 여동생을 훈육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해야 할지……
“후우. 너 지금 생각하는 거 대충 예상이 가는데,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꺼라 좀. 사춘기도 아니고.”
한숨 섞인 진유의 목소리에, 잔뜩 찌푸리고 있던 인상을 조금씩 펴기 시작한 무린이 조금 나아진 듯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정말……로?”
“내가 언제 계집애한테 관심 준 적 있었냐. 그리고 린이 넌 어차피 그 빌어먹을 도 때문에 온 거 아냐.”
“으…… 으응…….”
“그럼 내 방에나 가 있어. 난 이 아저씨랑 마저 이야기 좀 하고 들어갈 테니까.”
말을 마치곤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젓는 진유의 모습에도 그녀는 처음 왔을 때의 불만 어린 표정과는 확연히 달라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방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지는 계집애 아닌 줄 알지.”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것을 빠르게 변하는 상황 속에서 적응하지 못한 소미와 화연에게는 들을 정신이 없었다. 진유는 짤막하게 한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저 상황이면 사과해도 제대로 된 사과가 나올 리도 없을 것 같아서 일부러 그냥 보냈어. 기분 나쁘면 뭐, 나중에 팽가 가서 깽판이라도 치던가.”
팽가의 사람 앞에서 깽판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그녀들이 대신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느긋하게 광경을 지켜보던 팽무성의 태연한 말에 더 어이가 없어졌다.
“애들이야 다 싸우면서 크는 게지. 딱히 이렇다 할 친구가 없는 아이니 자네가 잘 지내줬으면 좋겠네.”
“저는 괜찮습니다, 팽 대협. 헌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진유 님과는 어떻게…….”
아시게 된 건가요,라고 끝까지 말을 잇기도 전에 팽무성은 대소를 터뜨렸다.
당황한 그녀에게, 옆에서 지그시 눈을 감고 설래설래 고개를 내젓던 진유가 대신 설명했다.
“어떻게고 뭐고, 할아버지 생전에 자주 찾아오던 아저씨가 저 아저씨니까. 자주 오셨지. 오늘처럼 가끔씩 무린이도 데리고.”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진유의 말에서 생각보다 두 사람의 관계가 깊다는 것을 짐작한 소미였지만 뒤를 잇는 팽무성의 말에 긴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사실 팽가와 진유의 할아버지하곤 여러가지로 연이 있었거든. 그때 우리 린이와 유 이 녀석들의 약혼식도 했고 말일세. 하하하하하!!”
“뒤에 덧붙인 말은 개소리다. 잊어.”
불쾌하다는 듯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이는 진유의 말에 소미는 어색한 미소를 짓는 한편, 자신의 생각했던 관계가 아님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어째서 스스로가 안도했는지 의구심이 생겨났다.
‘어째서 내가…….’
“그, 그럼 팽가의 분들은 이미 이곳에 사자환선님이 있으시다는 걸 아시고……?”
소미가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잠자코 있던 화연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을 열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팽무성의 모습이었다.
“음? 사자환선? 그게 무슨 소린가?”
“……아직도 포기 못했냐. 그런 사람 여기 없다고 몇 번이나 말해.”
“네에?!”
“사자환선의 거처가 아니라구요?!”
진심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만 팽무성 정도 되는 무인이 거짓을 고할 리도 없었다. 화연에 이어, 상념에서 벗어난 소미 역시 놀란 눈으로 진유를 쳐다보았지만 진유는 이미 그 화제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들이 혼란스러운 와중, 조금 전 이상으로 충격적인 화제가 팽무성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 이건 원래 매제에게만 말하려고 온 건데…… 뭐 자네들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제일가의 사람들이라니 들어도 별 상관은 없겠지.”
“중요한 겁니까?”
건성인 진유의 질문에 팽무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교의 잔당이 나타났다고 하더군.”
조금 전과는 격이 다른 이야기였다.
혈교(血敎).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잊어가는 이름이고 잊으려고 노력하는 그 이름은, 원래는 마교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한다. 정작 그 주체인 마교에서 굳이 해명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정과 사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그들은 무림의 법도를 바꾼다는 명목하에 터무니없는 일들을 벌여왔다.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혈사대란.
그것도 두 번에 걸친 혈란은 그야말로 중원에 피바람을 몰고 왔다.
중원의 물이여,
그 물이 더러우면 이 발을 씻으리로다.
중원의 바람이여,
그 바람이 더러우면 이 손으로 바꿀 것이다.
혈교의 교주가 남긴 이 말은 그대로 그들의 바람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교주의 명에 의해 중원에 나타난 혈교는 이제껏 본 적 없는 강함으로 중원을 위협했다. 당시에 정파와 사파가 힘을 규합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중원이 없다고 말해질 정도로.
일개 교가 가질 수 있는 힘이 결코 아니라고 말할 정도로 그들의 힘은 강력했다.
그런 그들이, 지금 다시 나타났다고 팽무성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백호검이나 소미, 화연 모두가 놀란 표정이었지만 진유는― 어딘가 굉장히 성가셔 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래서, 나 보고 그 미친 전쟁 지역에 가서 의원 노릇이라도 하란 말은 설마 아니시겠지.”
“그거야 매제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나는 그저 알려주려고 왔을 뿐이네. 어차피 맹에서 회의가 끝나면 일반인들에게도 전해질 테지만, 사실 원래 하려던 이야기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볼을 긁적이는 무성의 모습에 소미와 화연이 의아한 듯 쳐다봤지만 진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었던 모양이었다.
손을 휘휘 내젓더니,
“뭐 별수 없었던 거 아닙니까. 어차피 뒷이야기가 뻔할 뻔 자지.”
“그렇게 말해준다니 고맙네만…… 아 그리고 린이와의 혼…….”
“닥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지?”
기껏 기대하고 기다렸더니 들어와서 하는 일이 빤히 쳐다보고만 있다니, 그것도 한 식경이 되갈 무렵이 되어선 긴장이고 뭐고 없는 것이다.
무린은 이런 자신을 앞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진유는 무심한 어조로 진료를 계속할 뿐이었다.
“오른손.”
척!
“왼손.”
척!
“평소에도 이렇게 말 좀 잘 들으면 좀 좋아?”
“내가 개야?”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은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 걸린 옅은 미소는 지워지지 않는다.
무림에선 그녀에게 혈영도란 별호를 주었지만 살벌한 별호와는 달리 살가운 표정이 어울리는 여자였다.
“고만 쳐다봐라. 얼굴 뚫어진다.”
“칫! 고깝게 굴기는.”
“뭐 인마?”
이런 사소한 대화에서조차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쿡쿡거리는 그녀는 다시 자신의 진료에 들어가는 진유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찡그린 표정이 유독 잘 어울리는 특이한 얼굴에 5척(1척=약33.3cm)하고 반 척이 조금 못되는 키도 6척을 넘는 사람들이 많은 팽가의 사람들에 비하면 큰 것도 아니지만 그런 모습들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네 오라버니 같은 사람이란다.]
처음에는 무시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당시에는 아마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라는 것도 있었지만 오라버니 같은 사람이라니, 그런 어설픈 게 또 있을까.
안 그래도 세가 내에 자신의 오빠뻘 되는 사람들은 넘쳐 났다. 다만 그 관계가 평범한 집의 형제자매와는 많이 달랐을 뿐.
다른 여타의 무가들이 그러하듯 팽가는 특히 더 힘의 우위를 중시한다.
그렇기에 적당히 위아래를 가르쳐 주려 했건만,
[일단 좀 맞자.]
그는 조금, 아니, 많이 특이한 사람이었다.
팽가란 배경은 물론이고 자신의 무공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이 바르지 않게 행동하면 시도 때도 없이 혼을 냈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버지인 팽가의 가주가 있는 자리에서조차 그는 자신의 말투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자기는 뒤틀릴 대로 뒤틀렸으면서, 볼멘소리로 대꾸하자 그가 한다는 말이,
[난 이미 진작에 뒤틀렸고, 넌 아직 덜 뒤틀렸잖아?]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고 했지만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지나치게 높은 공부로 다른 사람을 벌레 이하 취급하던 자신의 사고방식이 달리지기 시작한 것도, 진유에 대해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것도.
“일단, 특별히 달라진 건 없네. 계속 먹던 걸로 충분할 것 같고…….”
“어…… 어…….”
“뭘 넋 놓고 있냐 너는?”
“아, 아무것도 아니야.”
고개를 휘휘 내젓는 무린을 보며 알 수 없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던 진유는 한쪽에 두터운 천으로 빙빙 둘러진 기다란 물건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굳이 이걸 들어야겠냐?”
돌연 진지해진 목소리에 덩달아 마음이 가라앉은 무린은 이내 조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게 아니면 안돼.”
그게, 당신과 날 이어주었으니까.
전할 수 없는 말은 오직 그녀의 마음속에서만 울려퍼졌다.
한편 들고 있던 도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던 진유는 가볍게 혀를 차곤 팽무린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알았다. 자, 네 치료는 끝났으니까 이제 가봐.”
“벌써?”
“준 약 꼬박꼬박 잘 먹고, 정해준 시간 이상으로 그도 휘두르지만 않으면 돼. 그리고 슬슬 다른 예약 환자들 올 때가 되가는 데 이 이상 기다리게 할 수는…….”
―의원니이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진유는 아까부터 파고 있던 귓구멍에서 손을 떼더니 툴툴거리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저러니 귀가 안 가려워? 빌어먹을. 나 간다.”
“자, 잠깐만! 정말로 뭔가 달리 해줄 말이라던가 없어?”
다급하게 붙잡긴 했지만 달리 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괜시리 허둥지둥하는 팽무린에게 진유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다가 마침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그녀의 등에 매인 긴 물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 연습할 때는 물론이지만 비무할 때도 어지간하면 쓰지 마라. 기보고 나발이고 내 눈엔 그저 마물(魔物)로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리곤 빠르게 방을 나서는 진유를 보며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질세라 그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따라오든 말든 방문을 활짝 열고 마당에 발을 디딘 진유를 반긴 것은 한눈에 보아도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 남성이었다.
“제…… 지아비되는…… 사람입니다.”
이미 반은 죽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사내의 옆에서 스스로를 그의 아내라 지칭한 여인의 눈빛은 말 그대로 독했다. 오면서 나뭇가지에 긁힌 것인지 잔 상처가 수도 없이 나 있었고 몸은 흙먼지로 지저분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살아서 진유에게 그녀 자신의 감정을 전해주고 있었다.
“살려……주십시오.”
한눈에 보아도 이 여인이 상당한 거리를 달려왔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숨을 억누른 채, 목소리의 힘은 작았지만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똑바로 이야기하고 있음을 진유는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