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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화타 1 (10화)
2장 손님(客)(3)
“틀렸어, 죽을 거야. 이 남자.”
막 진유의 옆에 도착한 무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단정적인 어조로 결론을 냈지만 그 자리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중인들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바닥에 흘러내린 피가 가히 바가지로 퍼낸 물을 흘린 것 만하며, 허리춤에 벌어진 상처에선 내장마저 흘러나올 기세였다.
대라신선이 와도 살릴 수 있을까 말까 한 상태의 남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진유는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은 여성과 눈높이를 마추며 말했다.
“얼마일까.”
일순 장내에 침묵이 감돈다.
지금 여기서 값을 매긴다는 것은 단 한 가지뿐.
“……지아비의 목숨값 말입니까?”
눈에 어린 현기를 보고, 그녀가 평범한 여인이 아님을 알았지만 진유는 거기에 대해선 그리 깊게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빠르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여인은 품속에서 옥으로 된 비녀를 꺼냈다.
살짝 보아도 어디 하나 흠을 잡을 수 없는 그 비녀는 그 값의 높고 낮음을 떠나 분명 여인에게 있어서 보물이나 다름없었을 터.
그러나 비녀를 쥔 오른손은 흔들림 없이 진유의 앞에 내밀어졌고 눈동자는 한 치의 미동도 없이 똑바로 진유를 응시한다.
이윽고, 차분해진 여인의 목소리가 진유의 귓가를 울렸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지아비의 목숨을 구하는 것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드리겠습니다.”
진유는 말없이 그 비녀를 받아들고는, 마치 장터에서 파는 물건을 바라보듯 무심하게 둘러보더니 툭 내뱉듯이 말했다.
“비녀 하나에 사람 생명 하나라…… 싸구려로군.”
“진유……!”
팽무린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매서운 기세로 진유를 쏘아본다. 뒤늦게 방에서 나온 소미들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사태에 의아해하는 한편, 진유를 향해 살의를 드러내는 무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투기와 살의가 피부에 와 닿는 듯한 그 느낌은, 소미가 이제껏 만나보았던 정파의 후기지수들에게도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문득,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진유의 집에 온 뒤로부터 놀라운 일의 연속들뿐이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로운 생각을 접어야 할 때였다.
서둘러 두 사람 사이에 소미가 다가들려던 차, 진유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비녀를 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커져 가는 여인의 눈망울을 뒤로한 채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딱 그 정도가 적당해.”
“네……?”
“그 정도로 싸구려인 게 좋다고. ‘우리’는.”
우리,라고 표현하였다. 그 말을 들은 여인은 물론이고 모여 있던 중인들 역시도, 점차 굳어 있던 표정을 환하게 바꾸어갔다.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팽무린은 가볍게 혀를 차며 기운을 갈무리했다.
“뭐― 일이 이렇게 됐으니 별수 없지. 일단 의견은 구해봐야 하는 거니까…….”
귀찮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인 진유는 의아해지는 여인의 시선을 무시하고 자신을 찾아온 환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됐는데, 내가 처음보는 사람이 예약을 했을 리도 만무하고.”
“…….”
“환자는 죽어가고 있고.”
“…….”
“근데 진료비는 받았으니 진료는 할 수밖에. 불만 있는 사람은 그냥 가시면 되고. 심심하면 가면서 욕이라도 열심히 해주시던가. 욕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더만.”
숨을 죽이고 진유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지켜보고 있던 중인들은 물론이고 소미들과 무린 역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그럴 거면 그런 말들은 왜 한 것인지, 하여간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인 사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태도로 일관하던 려에게, 진유가 죽어가는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안에 들여보내.”
“…….”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인 려의 모습이 흐릿해진 순간 장내에서 그녀와 사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무인들이 보기에도 놀라 자빠질 일이었지만 이미 신주에선, 특히 진유를 자주 찾아오는 단골객들에겐 익숙해진 풍경일 뿐이었다.
허탈한 침묵 속에서 등을 돌린 진유에게, 익숙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개놈새끼! 그럴 거면 뭐하러 그런 장황한 말을 늘어놓느냐!”
나이가 지긋한 남성의 욕지기에 어떻게든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소미와 화연이 서둘러 나서려 들었지만, 정작 화가 났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뒤에는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웃고…… 있어?’
불쾌해지다 못해 싸움이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친 욕설을 내뱉고 있지만, 사내의 얼굴은 분명 웃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유 이놈아!! 오늘은 닭 없는 줄 알아라!”
“우리 진료비는 그 사람 완치니까 말이다!”
“반드시 살려내라 이 썩을 놈아!!”
귀찮다는 듯 말 대신 등 뒤로 휘휘 손을 내저으며 막 마루에 오른 진유가 방 안으로 들어서려 할 때, 불안함이 어린 눈빛으로 화연이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살아나실 수 있는 거겠죠? 그분…….”
“화연아…….”
화연의 말에 새삼 남자의 용태를 기억해 낸 소미 역시 얼굴이 어두워졌다.
분위기상 앞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전후를 파악할 수 있었기에, 진유의 책임감이 어떤지 짐작하는 두 여인은 쉽사리 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떤 말을 해주더라도 결국 모든 부담은 치료를 하는 진유가 떠맡게 되는 것. 이런 분위기 속에서 혹시라도 그 남자가 죽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차암― 생각 읽기 쉬운 여자애다 너도.”
“그게 무슨……?”
“안에 들어간 남자가 죽든 말든 사실상 너희하곤 별 관계도 없잖아?”
“그, 그렇지만……!”
“있어요……!”
소미가 머뭇거리는 사이 먼저 입을 연 화연이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진유 님이 곤란해지시면…… 부, 분명 저희도…… 그…….”
“너 지금 나 꼬시냐?”
그 말에 화연이 귀까지 붉어진 얼굴을 붕붕 내저었지만 말로 할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의 말에 일리성을 찾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를 잠시 내려다보던 진유는 곧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방 문을 닫기 전 소미에게 말했다.
“나한테 신경 끄고, 걱정도 하지 마. 그런 건 네 몸이 낫는 걸로 충분하니까. 아― 그리고 이건 그 백호검인지 뭐시긴지한테만 말했던 건데.”
부드럽게, 무언가 중요한 것을 거절당한 듯한 기분 속에서 소미의 귀에 예의 묘한 자신감이 느껴지는 진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내 손님을 놓칠 생각 없어. 과거에도 그래 왔고 지금은 물론이며 앞으로는 당연히지.”
“그러……시군요.”
힘없는 소미의 목소리를 진유는 듣지 못했다. 자신의 말만 끝마친 채 문을 닫으며 방 안으로 들어선 진유가 방 밖으로 다시 나올 때엔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오늘이 예약이었던 환자들은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 없이 모두 웃으면서 떠들썩하게 돌아갔다.
다만, 홀로 마루에서 하늘에 떠오른 만월을 바라보는 소미의 눈은 어딘가 처연해 보였다.
그런 한 여인의 복잡한 감정과는 달리 이날 있었던 기적 같은 일은 호사가들에 의해 처음엔 광서의 이름 없는 마을 신주에서 시작되어 전(全) 무림에 진유의 이름을 퍼뜨린 계기가 되었다.
3장 무림맹(盟)(1)
언제나 부드러웠을 회의장의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고, 다만 경직된 군상들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들이 둘러싸고 있었을 원탁은 그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되어, 일부에선 가루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미타불…… 조금 진정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당가주…….”
결국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가라앉히고자 불호를 읊으며 항마후를 담은 목소리로 다독이듯이 말을 건네는 스님이지만, 되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였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소?! 모두 그렇게 몰아가고 있으니 화가 나는 것 아니오!”
벽력같이 소리를 내지르는 사내는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물론 인정하오. 당가의 해독 능력이 당시 사자환선의 공부에 훨씬 뒤쳐져 있었다는 것 정도는. 하지만 그 후인인지도 의심되는 자 따윌 굳이 찾으려 하는 이유가 지금 당가를 뒷전으로 둔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소?!”
상석에 위치한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은 애써 웃는 얼굴로 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말이 크게 다른 것도 아니어서 내심은 씁쓸했다.
“흥분을 가라앉히시지요. 혹여 모를 일에 대비하고 싶은 마음에 제 노파심이 앞선 모양입니다.”
“…….”
당가주가 묵묵부답인 채로 있자 맞은편에서 가느다란 눈길로 쳐다보던, 소매가 무척이나 짧은 의상의 노인이 툭― 내뱉듯이 말했다.
“뭐…… 맹주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기껏해야 잔당이지 않나? 녹림이 멍청하긴 해도 채주인 반도(半刀)까지 뇌근육인 놈은 아니지.”
“걸개 어르신…… 허나…….”
“맹주!! 정 그러하다면 이번 일은 당가의 힘으로 반드시 해결하겠소!! 그 다음에 다시 한 번 이야기하십시다!”
노려보며 그렇게 말한 당가주는 마치 두고 보자는 듯이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기이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개방의 방주― 주걸개가 혀 차는 소리로 말했다.
“쯧…… 젊은 놈이 저렇게 혈기왕성해서야 원…… 뭐, 맹주도 너무 걱정은 말게. 자네 말대로 자네 노파심일지 모르지. 혈란 이후 봉문까지 불사한 당가 아닌가? 믿어보게. 그럼 나도 한잔하러 가보실까!”
가볍게 내딛은 한 걸음은 어느새 밖으로 향하는 대문 앞을 딛고 있었다. 말릴 틈도 없이 또 한 명이 회의가 파하기도 전에 나가는 것을 본 맹주는 다만 속으로 한숨을 삭일 뿐이었다.
뒤로 점창, 화산을 이어 대부분의 문주들이 나간 회의장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어쩌자고 제가 맹주가 된 걸까요 신니.”
“헛헛. 자책하지 마시지요. 본디 감투는 감투일 뿐, 맹주의 노력을 저분들 또한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정말 그럴려나요.”
이제 갓 불혹을 넘어선 나이인 자신은 정말이지 맞는 자리가 아니라고, 제갈영현은 취임식 때도 사실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내려놓고 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너무나도 긴장감이 없는 것이다. 혈란이 어떠했는지 알면서도.
“애초에 저는 칠왕(七王) 어르신들을 모실 생각으로 이번 회의를 마련한 것인데…… 후우, 제가 너무 지나쳤던 것입니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현 소림의 방주를 대신해 나온 사대금강의 한 사람, 혜광(惠光)의 말에 신니와 맹주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미타불…… 혹, 신니께서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이 자리에 오신 이유가 그때문인 줄로 생각하고 온 것입니다만…….”
아리송한 말에 탄식을 내뱉은 건 신니 한 사람뿐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던 맹주는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고, 이어서 신니가 탄성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제가 본 것이 우연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길 바랬건만…….”
“두 분께서 이렇게 걱정하시니, 저는 짐작 가는 바도 없어서 답답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파군도, 천살도 아닌 별(星)이 나타났더이다.”
“파군도 천살도 아니라면…… 설마?!”
짙은 당혹감이 그대로 공포가 되어가자 신니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떻게 그가 살아날 수 있단 말입니까?! 사자의 상, 그 저주받은 운명이 아직도 이 세상에 살아서 남아 있다니…….”
“아니 그게 아니라…… 문제는 이 별이 가리키는 방향입니다만…….”
잠시 공백을 둔 신니는 이윽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광서를 지침하고 있더군요.”
안도와 동시에 또다른 불안감이 피어오르는 말이었다.
“신니께서는, 혹 신주의 화타라 불리는 그자를 생각하십니까?”
“달리 떠오르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한 즉슨, 확인할 필요가 있겠지요. 또한…… 환선님의 후예라 불리는 것도,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전자는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후자는 사실이라면, 면목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아미타불…….”
씁쓸함이 묻어나는 불호에 신니와 맹주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럼 당초의 목적대로 칠왕분들의 소재를 파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께서도 뭔가 달리 아시게 되는 일이 있으면 곧바로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맹주의 말에 두 사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마지막으로 회의장을 나섰다.
홀로 남은 맹주는 모두가 빠져나가고 간 자리에서 쓸쓸히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나마 혈교의 교주가 살아 있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긴다고는 하지만…… 만일 그가 정말로 환선의 후인이라면,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