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신주화타 1 (11화)
3장 무림맹(盟)(2)
[밤늦게, 결례인 줄은 압니다만…….]
조용히 찾아온 백호검의 말에, 한껏 즐거움에 젖어 있던 소미의 기분은 착 가라앉았다.
말을 건네는 내내 백호검은 후회가 들었지만 그런 자신을 도리어 위로하는 소미를 보며, 더더욱 자괴감이 밀려온 그였다.
“하아…….”
허공에서 흩어지는 한숨에도 무거움은 실리지 않는다는 듯이,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는 조금도 덜어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처연함이 묻어나는 눈동자는 새파란 하늘을 한참 동안 담고 있다가 이내 지면으로 떨어졌다.
어재서 잊고 있던 것일까,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그저 자신이 기쁘고 즐겁다는 이유로 망각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괴로움 속으로 집어넣었다.
마치 그간의 행복에 대한 대가를 치르라는 듯이.
“……그래서 그런 죽을상을 하고 계십니까?”
“네……. 네? 지, 지, 지, 진유 님?!”
깜짝 놀란 그녀가 걸터앉은 마루에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것을 붙잡아준 진유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곁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연이가 너 죽을상이라고 걱정이던데, 그래 가지고 어디 죽겠냐?”
“그…… 그런 게 아니오라…….”
“그런 게 아니면, 아― 그 깜장 수퍼맨들? 말했잖아. 신경 꺼도 돼. 계집애 하나 못 때려잡는 것들이 설쳐 대봤자 얼마나 더 설치겠어.”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의 말투가 오히려 더 소미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이 괴롭지 않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소미의 경우에는……
“…….”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지는 침묵이 무거운 나머지 치맛자락을 강하게 움켜쥔 채 땅을 바라보는 소미. 그런 소미와는 정반대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진유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의원이라는 건 말이지.”
“……?”
그녀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을 때도 진유의 눈은 여전히 하늘에 있었다.
“기본적으로 귀찮아. 성가시거든. 간혹 무인이란 것들이 어디서 칼침이라도 맞고, 꼴같지도 않게 골골대면서 ‘곧 죽어도 당신의 신세를 질 수는 없소!’라고 지껄이면 웃기지도 않아. 그래 놓고 치료해 놓으면 대뜸 보따리부터 찾는 것들이거든. ‘그런데 내 검은 어디 있소?’라면서 말이지.”
순간적으로 웃음이 튀어나올 뻔한 순간을 간신히 참는 그녀의 귓가로, 진유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근데, 그런 건 의외로 익숙해지면 별로 귀찮지 않아. 하다못해 동물을 치료한다고 해도, 가끔 맹수에게 쫓기던 녀석들은 그대로 맹수들을 끌어들이거든.”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나한텐 별로 다르지 않아. 그러니까 니가 처한 환경, 상황을 휘말리게 해서 네가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내가 치료한다고 하는 건 원래 그런 의미거든.”
“…….”
어떤 말을 하면 좋을까. 사과와 고마움 사이에서 망설이는 사이 누군가가 어둠을 헤치고 나타났다.
“밤중에 돌아다니지 마. 위험하게.”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것을 발견한 무린의 눈이 불쾌함으로 물들었다가, 이내 화색이 돌았지만 잠시뿐이었다.
“또 괜히 곰이나 호랑이 보고 화풀이 하면 불쌍하잖아.”
“내가 뭐, 동물학대자야?!”
“무 아저씨가 가져온 저 곰가죽, 저거 우리 동네에서 잡은 거 아냐?”
순간 뜨끔한 표정의 팽무린을 진유는 놓치지 않았다.
“제발 부탁이니까 그만 좀 잡아대. 아주 씨가 마르겠다 씨가.”
“…….”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결국 꾹 입을 닫은 채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린 무린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진유의 옆에 털썩 앉아 어깨에 머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피곤하다. 피곤해서 더 움직이기도 싫다.”
“맞고 싶냐?”
어이가 없어진 진유였지만, 이내 새근거리는 숨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후기지수란 것들, 죄다 이러냐? 아님 얘만 이러는 거냐?”
“그, 글쎄요…….”
대답을 회피한 소미였지만, 내심은 그녀가 부러웠다. 때로는 질투하고, 때로는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을. 틀에 박힌 생활에 앞서 언제나 여자로서의 정갈함과 침착함을 강압 받아왔던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할 모습이기에.
“하여간 철이 안 든다니까…… 그러니까 댁은 들어가서 잠이나 도로 자라고.”
느닷없는 뒷말에 소미가 깜짝 놀라는 사이, 뒤편에서 조용히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이 좋으시군요. 무술을 익힌 몸은 아닌 듯한데…….”
“대신 의술을 익혔지. 환자하고 말장난 안 하니까 들어가서 자쇼.”
“저도 환자로 봐주시는 건가요? 드릴 것이 없는 저로서는 이 몸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만…….”
농담이 아닌 듯한 목소리에 소미가 뒤를 돌아보자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과연 들려왔다. 말리려는 그녀의 말에 앞서 진유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한다고 당신 남편이 멀쩡하게 살아나는 건 아니지. 난 신이 아니거든.”
단정 짓는 듯한 그 말에, 다시 한 번 놀란 소미는 진유를 돌아보았다. 치료는 제대로 되었던 게 아니었단 말인가?
“알고 있습니다.”
담담히 대답하고 난 후,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만한 상처로 지금까지 이승에서 숨 쉬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란 것을 압니다. 그럴진데 이깟 몸이 무어라고 아끼겠습니까. 지아비를 구해주신 은혜, 어떠한 것으로도 갚을 도리가 없어 생각 없이 실례를 범했습니다.”
“…….”
진유가 아무 말이 없자, 다시금 말을 잇는 그녀.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 결례를 무릅섭니다. 괜찮다면, 들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정신을 차리고 나누는 대화지만, 그녀에게서 묘한 기품을 느낀 소미는 그녀의 정체가 어쩌면 단순히 동네 아낙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진유는 진유였다.
“무릅쓰지도 말고, 결례인 줄 알면 말하지 마. 참고로 댁의 남편분은 보름 정도 뒤면 깨어날 거고. 집에서 사람을 데려오던지 그때 되면 알아서 하라고. 난 악양의 잘나가는 대모(大母)님이든 그 남편이든 이 이상 연관되기 싫으니까.”
손을 휘―휘― 내저으며 어딘가로 향하는 진유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무린과 소미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악양의 대모― 노유림. 여인의 몸으로 상인들의 틈바구니에 끼어들어, 가히 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거부라 불리우는 여인이 눈앞에 있다.
사실상 악양은 물론, 그 일대에서 이뤄지는 대부분의 교역이나 거래들이 모두 그녀의 손아래에 놓여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고 있는 것은 소미 역시 세가 내에서 들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의원님이 그렇게 편애를 하시다니, 그래도 되는 건가요?”
가볍게 농담 삼아 건넨 말에, 진유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난 유부녀한테 흥미 없거든.”
“그럼 이제부터라도 관심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거절한다고 했잖아. 재고는 없어. 악양― 아니, 중원에서 손꼽히는 상계가 고작 수 일만에 망해 버렸다는 이야기를 조사하라던지, 도와달라던지 하는 이야기는 의협심 넘치는 무인들에게나 하라고. 나는 사람을 치료하는 의원이지 때려잡는 무인이 아니야.”
“자, 잠깐만, 도저히 갈피가 안 잡혀. 무슨 말이야 그게?”
노유림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부터 이미 정신을 차리고 있던 무린이 진유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의미를 모르겠다는 무린과는 달리, 굳어 있는 소미의 얼굴은 희미하게나마 잡히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진유는 그런 두 사람을 말없이 쳐다보다가 한숨과 함께 토해내듯이 말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저 아줌마 집이 망했어. 아주 쫄딱 망했지. 그 와중에 어디서 칼 좀 쓰는 놈들이 와서 칼부림 좀 하다가 부하들 몸으로 땜빵 치우고 어떻게든 여기까지 와서 목숨만은 연명했다는 이야기지.”
“전혀 모르겠어. 아니 그보다, 그 정도의 대상인이 망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한순간에…….”
“표현 좋네. 그 ‘한순간’에 무너진 거야. 도움을 요청할 ‘동맹’도 ‘원군’도, 혹은 아군마저도.”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이야기였다.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을 간다는 말이 있다. 하물며 눈앞의 여인은 다른 이도 아닌 그 악양의 대모라 불리는 대상인. 그런 대상인의 ‘인맥’은 물론이고 그 내부마저 헤집어 놓을 정도의 ‘힘’을 가졌다고 한다면 그건 이미 보통 문제가 아닌 것이다.
“듣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신 분이군요.”
말없이 듣고만 있던 노유림의 말에 진유가 코웃음을 쳤다.
“헹― 알았으면 남편이나 데리고 가주시지요. 이 집에서 시체 치우고 싶지는 않아. 두 번 다시 말이지.”
당장의 목숨을 붙드는 것은 가능했지만, 아무리 그라도 이전과 같이 정상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린이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고 상체를 일으키자 진유는 일어서면서 말했다.
“난 사람이야. 하늘에서 내려온 대라신선도, 죽은 자를 되살린다는 사자환선도 아니라서. 그런 허깨비들이나 할 수 있는 환상 같은 일은 불가능해. 단지…….”
등을 돌려, 산으로 향한다.
그 와중에 우물로 뜬 물에 머리를 적시곤, 떨어지는 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그의 의복을 적시는 것도 모르고, 다만 그렇게 말했다.
“작별 인사 정도는 하고 싶을 테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지만, ‘신뢰’는 있었다.
수없이 많은 어중이떠중이들을 겪으면서 사람을 보는 눈에 기본적으로 의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중에 진유는, 유독 특이한 유형에 속했다.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하면서도 부러 그것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몇 번의 환자들을 대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심중의 확신은 굳어졌다.
그것이 지금 백호검인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였다.
“음……? 자네가 왜 여기에…….”
“당신도 사람 참, 착실하구만.”
“뭐, 뭐가 말인가!”
산을 내려오다가 우연치 않게 만난 백호검은 나무를 잔뜩 짊어진 채 얼굴을 붉히며 성을 냈다.
이유는 진유의 집에 머무르게 되며 생기는 식대나 기타 숙식비가 그 원인이었다.
애당초 도망치듯 세가를 나온 탓에 수중에 많은 돈을 가지고 오지도 못했고 다시 세가와 연락을 취하려 해도 역시 돈이 필요했다.
거기서 나온 진유의 제안은 잡일꾼.
요는 몸으로 지불하라는 것이 그것이고, 지금은 거기에 충실하게 따라 나무를 해 온 것이다.
진유는 치밀어오르는 웃음을 참느라 큭큭거렸고, 백호검은 애써 참을 인을 떠올리며 인내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옷이 흠뻑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약간 언짢은 듯한 말투로 물었다.
“그런데…… 그 옷은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인가? 가다가 도랑에라도 빠진 건가?”
“아, 이거? 뭐 비슷한 거지.”
장난 삼아 건넨 말인데 진담으로 돌아오니 되려 무안해진 백호검은 잠시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