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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화타 1 (12화)
3장 무림맹(盟)(3)
터벅터벅 걸어가던 중, 떠오르는 생각에 백호검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자네의 무례한 행동 따윈 얼마든지 참아줄 수 있네만.”
다소 진지해진 목소리로,
“부디 소미 아가씨께만은 예를 갖춰주게.”
“가문의 명예 때문인가?”
“존중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일세.”
“…….”
멈칫― 일순 제자리에 멈춰선 진유는, 금세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걸으며 말했다.
“글쎄…… 기본적으로 난 그리 착한 놈이 아니거든.”
“이보게!!”
“그렇다고 일부러 그런 짓을 할 정도로 얼간이는 아니야. 다만 그 녀석이 나보다 어릴 뿐이고, 난 그에 합당한 어투를 사용할 뿐이지.”
“……그 말, 믿어봄세.”
“그러시던지.”
짤막하게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지면을 밟는 소리만이 스산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번에 입을 연 건 의외로 진유 쪽에서였다.
“그건 그렇다치고.”
“음?”
“그쪽 집안은 역시 사정이 별로 좋지 않나 보지?”
“무슨 의미인가.”
“귀주에서 광서까지 오는 길이 쉬운 건 아니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하고 있지만 받아들이는 백호검의 입장에선 많은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는 말이었다.
잠시간 입을 다물던 백호검은 답변을 기다리는 사람의 얼굴이 아닌 듯한 진유의 얼굴에 고민했다.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은 첫 만남에서부터 짐작하고 있었지만, 신분의 고저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저런 태도를 보일 인물이라면 어쩌면 이야기해도 괜찮을지 모른다.
거기에 그 사람이 현재 유일하게 그녀의 병마를 알고 또 고쳐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최고가 아닐까 하고―, 다만 그 성격이 자신과는 도통 맞지 않는 것은 별개의 일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자네만 알고 있었으면 하네만.”
“이런, 속깊은 이야기라면 사양하고 싶은데.”
한 발 내빼는 그에게 한 발 다가서는 백호검.
“먼저 물어본 건 자네일 텐데. 그리고 피해가 가는 이야기는 아닐세. 이 또한 치료에 보탬이 되지 않겠나?”
“…….”
진유는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고 그 뜻을 긍정이라 받아들인 백호검은 마음속으로 예를 표하곤,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자네 말대로 그리 순탄한 길은 아니었네.”
새삼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들도 많이 있었다. 다만 저번처럼 대놓고 습격을 한 경우는 처음이었지만…… 굳이 진유의 집이 아니더라도 외진 곳은 많았을 텐데 어째서 그때였던 것일까.
잠시간 뒤를 돌아보며 상념에 잠겼던 그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태어난 이래로 많은 의원들이 가문에 드나들었지. 지금에 와선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때는 비밀을 엄수하란 엄명 때문에 여러모로 큰일이었고, 그때마다 아가씨는 눈총을 받아야 했지…….”
소미의 탄생은 천하제일가에 있어 두 가지의 불운이었는데 그 첫째로는 소희에 이은 여아의 재출산이었고 둘째로는 온전하지 못한 그녀의 신체에 있었다.
타고난 연약함에 원인 모를 병을 가진 몸. 연약함 뿐이면 모를까 후자의 것을 외부에 숨기는 것만으로도 천하제일가는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시기를 보냈어야 했다.
결코 좋은 일로서 그러하지 못했으므로 그녀의 성장기를 지켜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하물며 모친조차도 아들을 낳지 못한 자괴감에 쇠약해져 몸져누운 뒤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외가는커녕 친가에서조차 변변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자라난 소미는 그나마 타고난 외모와 더불어 고운 심성으로 사람들에게 그 인간미를 알렸을 뿐이었다.
어떤 무가에서든지 무술을 배우지 못하는 몸으로 태어나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불행한 일일 것이다. 하물며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천하제일가의 태생이 무를 배울 수 없는 몸이라는 건, 그리고 대를 잇지 못할 성별을 타고 났다는 건 그녀에게 더불어 불운의 연속. 그 이상이 될 수 없던 것이다.
“흐음…… 뭐 시간 때우기는 될지 몰라도 그 녀석의 치료엔 별 도움이 되진 않겠는데.”
“그런가? 그렇지만 별수 없군. 난 ‘의원’이 아니라서 말이지.”
“…….”
“무엇이 어떻게 아가씨의 병에 ‘도움’이 되는지 잘 모르겠거든. 그러니까 멋대로 이야기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줌이 어떻겠나?”
“약았군, 당신.”
“그건 자네에게 듣는 첫 칭찬 같군. 고맙게 받지.”
그 말을 끝으로 더 대답이 없는 진유에게 백호검의 말이 이어졌다.
“……계속하겠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씨께선 조금도 변치 않은 채 언제나 미소로 주위를 안심시키셨지. 그것도 병석에 앉아 있을 때를 제외하고지만, 하늘은 끝내 아가씨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네. 누구보다도…….”
거기서 잠시, 머뭇거리던 백호검은 이내 말문을 열었다.
“소희 아가씨께선, 소미 아가씨에 대한 것이 그리…… 탐탁지 않으셨던 모양이야.”
―너를 내 동생이라 여긴 기억은 없다.
그것이 소미가 그녀의 친언니인 소희로부터 태어나 처음 들은 말이자 마지막 말이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몇 번이고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소미의 말을 옆에서 지켜보는 게 무안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무시했다.
소미와는 다르게 천부적으로 무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소희는 기이한 능력까지 가지고 태어나 소미와는 대조적으로 가문의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단순하지만 큰 수준의 차이가 서로의 거리를 벌려 놓았고 그건 더 이상 소미로부터도 손을 뻗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되어갔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는 그녀로서는 차라리 자신의 몸 속에 깃든 병마가 자신을 집어삼켜 주길 바랄 뿐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죽어 버렸으면, 수없이 마음먹고도 자살만큼은 할 수 없었다. 힘이 되어주는 이들에게 자신은 힘이 되어줄 수 없다. 그것이 그녀의 가슴을 찢어놓았다.
소희의 허리춤에 매인 검이 뽑힐 때마다 소중한 사람들이 상처입고 때로는 죽기까지 했을 때에도, 그럼에도 그들의 얼굴에 걸린 흐린 미소가, 그 면면들이 그녀의 영혼을 찢어발겼다.
어째서 태어난 것만으로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누군가를 저주하는 것도 할 수 없고,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자신의 마음을 도리어 그녀는 저주했다.
한심하고 나약하고 그저 살아가는 것에 발버둥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아…….”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들이 머리속에 영겨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그래서 도로 눈을 닫고, 애써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막고, 생각을 정돈한다.
악몽은 끝났어도 그와 비슷한 현실이 그녀에게 남아 있다. 그것만으로 괴로워할 수 있는 요건은 충분히 갖춰져 있다. 누구 하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없고, 누구 하나 사랑해 주는 사람 없이, 이렇게나 괴로워하는 것밖에는 도리가…….
“아……?”
무심코 옆으로 돌린 시선에 익숙한 사내의 등이 들어왔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와는 달리 어깨는 누구보다도 넓어 보였다.
“의원이 잡을 수 있는 건 병마(病魔)지 심마(心魔)가 아니야.”
“진유 님…….”
“마음까지 어떻게 해줄 거란 생각은 버려.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면 죽을 뿐이지.”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하듯이, 냉랭하기 짝이 없는 그의 말에 마음 한켠이 서늘해졌다.
“어리광을 피울 생각은 없습니다. 심려하시는 바를 짐작하고 있으니 걱정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조용조용한 목소리에 들려오는 대답은 없이 고요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소미가 무어라 말을 걸려고 하려던 순간 진유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됐고. 괜히 오밤중에 돌아다니다 걸리지 마라. 난 환자가 설치고 다니는 게 제일 싫은 인간이니까.”
“어디에……?”
“잠이나 자.”
피식 웃으며 진유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빈사 지경이 되어 이곳으로 온 사내가 머무는 방이었다.
“보기보다 팔팔한데그래?”
들어서기 무섭게 건네는 말에 누워 있던 중년인이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가? 실력 있는 의원 덕인가보군. 나는 노윤이라고 하지. 아내에게서 대강의 이야기는 들었네. 정말 고맙군.”
“고마울 것까지야, 이 정도로 비싼 물건은 흔치 않거든.”
어느 틈엔가 소매에서 옥색의 비녀를 꺼내든 진유가 한 차례 빙글 돌리며 말했다. 노윤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준다니 다행이야. 그래…… 나는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겠는가?”
진유의 눈에 일순간이지만 이채가 서렸다.
“……알고 있었나?”
“알고 있고 자시고…… 이런 상태면 누구라도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 정돈 알 걸세.”
얼마 전 내장이 쏟아질 뻔한 복부를 잘도 꾹꾹 눌러대는 노윤을 내려다보는 진유의 시선이 차가웠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희망이란 썩은 동아줄을 붙잡는 게 인간이라서 말이지.”
“하하…… 의원치고 신랄한 말투로군.”
“장사치만 하겠어?”
“하하하하…… 그도 그렇…… 쿨럭쿨럭!”
기침에 섞인 피가 공중에 흩뿌려진다.
몇 방울이 진유의 얼굴을 적셨지만 진유는 닦을 생각도 않고 그저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다가 툭― 던지듯이 말했다.
“보름. 잘하면 보름 더 살겠지.”
“그……런가. 쿨럭…… 으음, 자네의 아끼는 약들을 곧 죽을 사람이 탐내서는 안 되겠지.”
그리곤 산뜻한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죽여주게.”
“…….”
“아내와의 작별 인사라면 자네와 이렇게 이야기하기 전에 미리 해두었네.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 이상 바라는 것은 욕심이지.”
“미안하지만 안락사엔 취미 없어. 죽으려면 멋대로 나가 죽으라고.”
“물론 그냥 해 달라고 하진 않았네.”
“…….”
나가려던 진유의 발목을 붙잡은 건 사내의 말이었다.
“장씨의 보고(寶庫), 그 희대의 대도가 남긴 보물들이 있는 곳을 내가 알고 있네.”
“내가 돈에 궁색할 거라고…….”
“남해(南海).”
“어이!”
일그러지는 진유의 얼굴을 노상 웃는 얼굴로 마주하는 노윤의 얼굴은 이미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평온함이 감돌고 있었다.
“가도 좋고, 가지 않아도 좋네.”
“처음부터 남의 속 뒤집어놓을 의도였으면 당신은 잘한 거야.”
“이래 봬도 장사치의 아들이거든. 은원을 제대로 풀지 않으면 죽어서도 한이 남을 걸세.”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에 진유가 눈가를 찌푸리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 죽을 필요는 없겠지.”
“아니, 그렇지 않네. 자네 정도의 사내라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금 진지해진다.
막 방문을 나서려던 진유의 귓가에 그의 말이 이어졌다.
“나와 아내가 이곳에 머문다는 건, 그건 즉…….”
“꺄아아악?! 다, 당신들은……?!”
비명 소리.
그걸로 충분했다.
“자네들 또한 동등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일 테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