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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화타 1 (13화)
3장 무림맹(盟)(4)


문지방을 나선 진유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시야에 담긴 것들은 그야말로 좋지 않은 것들 투성이. 무엇보다도 그의 눈을 거슬리는 건 쓰러진 노유림의 등에 척 보기에도 중상에 가까운 검상이 나 있다는 것.
어떻게든 팽무린이 전면에 나서서 상황을 조율하는 듯싶었지만, 진유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한 걸음 두 걸음,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살의를 깔끔히 무시한 채 느릿하게 걸어가던 진유의 걸음이 멈춰선 곳은 팽무린의 바로 옆에서였다.
“린. 저 여자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있어.”
장난기가 씻겨져 나간 진지한 목소리에 어렸을 적 자신을 압도한 위압감을 새삼스레 느낀 팽무린은 살짝 주위를 응시하곤 빠르게 노유림을 들쳐 업고 근처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화연과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남은 건 진유와 살의를 품은 자객들.
“뭐…… 댁들이 누구냐는 시덥잖은 질문은 하지 않을게. 재미가 없거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색의 물체가 육안으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날아든다. 가만히 그것을 응시하는 진유의 앞을 가리듯이 나타난 려는 치마를 펄럭이며 잡아채었다.
암기의 하나인 그것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되돌려 던졌을 때 비명조차 없이 무언가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숲속을 울렸다.
“그러니 거기서 뒈지든 여기서 뒈지든 결정하시지.”
순간 숲이 일렁거리는 듯한 착시와 함께 진유의 시야에 십 수 명의 흑의를 걸친 인물들과 유일하게 평범한 갈색 무복 차림의 노인이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어린 계집이 제법이로군. 뇌결(雷結)의 수인가.”
중후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의 그는, 이내 진유에게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자네에게 용무는 없었네만…….”
“거 다 아는 거 귀찮게 이야기하지 말자고. 려.”
느릿하게 부른 목소리에, 소리조차 없이 당도한 려는 거기에 있었다.
하얗게 물든 손바닥은 정면을 향한 채로, 짧은 거리라고는 하지만 누구 하나 알아차리는 이가 없었다.
고작 1장의 거리.
하지만 손바닥에 품은 기운은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정연함과 더불어 순수함이 느껴지는 기운.
노인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건……!”
“쓸어버려.”
나지막한 목소리가 흐른 뒤에 폭사된 기운은, 마치 커다란 손바닥의 형상을 띠며 정면으로 쏘아졌다.
이미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절기의 출현도 출현이었지만 그 터무니없는 찰나의 속도를 피한 건 고작 절반이 다였다.
“여래신장(如來神掌)이라니, 대체…… 음……?!”
경악의 순간이 채 가시기도 전에 흑의인들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그리고 그 이채가 다시 조금 전의 감정이 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마, 말도 안돼……. 어찌…… 어찌하여 그 무공까지……?!”
대답 대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선 려는 양손에 머금은 붉은 기운을 한데 모으곤 손끝을 좌악 편 상태로 전면을 향해 내지르며 중얼거렸다.
“파천오극지(破天五克指).”
소리조차 없었다.
다섯 개의 홍광이 쏘아져 나가, 각각의 심장을 꿰뚫고 그 혈관을 모조리 파해 버린다.
호신강기를 꿰뚫고, 오공은 물론이고 몸속의 가는 실핏줄이 모조리 터져 버린 흑의인들의 몸은 그야말로 혈인이 되어 있었다.
잠시 뒤를 돌아본 노인은 그야말로 허탈함을 넘어서 망연자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체 저년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이냐? 어찌 극마(極魔)에 가까운 무공과 극정(極正)에 가까운 무공을 동시에 익힐 수 있지?”
“그냥 쪽팔리다고 말해. 너희들보다 한참은 어린 여자한테 깨진 게 무진장 한심하지? 응?”
“보아하니 노부를 살려둔 까닭을 알 것 같으나…… 네 의도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이곳에서 길동무를 삼는다면 모를까!”
노인의 기세가 폴발적으로 증가한다.
주변의 대기가 일그러지는 모습은 결코 착시가 아니었다. 막대한 기가 대기를 누르는 것이다. 터무니없는 압박 속에서도 진유와 려는 태연했다.
“무뚝뚝하고 혼자 있기 좋아하는 고할배는 언제나 잔소리 많은 녹할매에게 얻어맞고 지낸다던가?”
“……!!”
백이십성상을 살면서 이만큼 놀란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월은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고작 약관조차 넘기지 않았을 꼬마가 그런 사정을 알고 있단 말인가?
무인이 되어 이 정도로 크게 감정이 흔들린 일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고월은 혼란해 있었다. 출수마저 망설여질 정도로.
“저 부부한테 손 떼. 어차피 곧 죽을 사람들이야.”
“…….”
잠시 침묵하던 고월이 돌아서며 말했다.
“모든 게 자네 뜻대로만 되지는 않을 걸세. 오늘 날 살려둔 것을 후회할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그건 더 이상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지. 재미도 없고. 아, 그리고.”
―너한테 한 말 아니다. 늬들 대가리한테 똑바로 전해라.
‘……?!’
짤막한 전음성에 놀라 뒤를 돌아보자 어디서 들고왔는지 모를 키에서 무언가를 한 움큼 뿌려대고 있는 진유가 거기에 있었다. 각진 새하얀 알갱이들. 소금이었다.
“…….”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던 고월은 이내 어둠 속으로 스며들 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사이 려가 뒷정리를 하는 동안, 노유림의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상처가 난 즉시 응급치료라도 해뒀다면 살 수야 있었겠지만 내장은 물론이고 척추가 부서져 살아난다손 치더라도 제대로 된 생활은 이미 불가능할 몸이었다.
다만 몇 시간 정도, 그녀의 생명을 이승에 붙드는 정도밖에는…….
“……마지막까지, 당신의 신세를 지게 되는군요.”
“…….”
“어쩌면 벌일지도 모릅니다. 아무 관련도 없는 당신을 끌어들인 죄일지도…….”
노윤의 곁에서 그의 손을 잡아주고 있던 노유림이 말없이 눈을 감았다. 그런 아내의 모습에 노윤이 그녀의 머리를 쓸어 내려준다.
정답기 그지없는, 마지막을 앞둔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진유는 피식―웃으며 말했다.
“하여간,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당신네들이 딱 그 짝이로군.”
“그렇지 않으면 결혼도 안 했겠지. 평생을 함께해야 할 반려니까 말일세.”
“잘도 말하는군. 그 몸으로.”
노윤은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곤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말없이 그가 하는 걸 지켜보던 진유는 살짝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도인가?”
“일종의 수수께끼라고 해두지. 나로선 도저히 풀 만한 문제들이 아니었어.”
“그야…….”
건네든 두루마리를 받아들고 펼쳐본 진유는 내용을 쓸어보곤 한숨을 흘렸다.
‘이걸 당신들이 풀 수 있다면 이 세계도 갈 때까지 간 거겠지.’
한 차례 쓸어본 후 곧바로 종이에 불을 붙인 진유는 마당에 던져 버렸다. 조그마한 양피지 조각이 전부 불타오르는 데 걸린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노윤은 작게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그 짧은 시간에 그걸 전부 외운 건가?”
“아니 불길한 건 빨리빨리 없애자는 주의라서.”
“하…… 하하…… 하하하하…….”
허탈하게 몇 번 웃던 노윤의 입에서― 이내 광소가 터져 나온다.
“크하하하하하! 자네 정말 멋지군, 아무리 돈에 관심이 없다고는 하나 자네만 한 자는 ‘검후’ 이후로 처음이야. 큭큭.”
“별로, 돈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그냥 손에 쥐고 내키지 않는 건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가? 하지만 말이지…….”
슬그머니 고개를 떨구며 다시금 아내에게로 시선을 돌린 노윤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세상에 거슬리지 않는 돈 따윈 없네. 돌고 도는 점을 뒤지다 보면 가끔은 토악질이 나오기도 하는 법이거든.”
“냄새는 그쪽이 더 낫겠어.”
“크훗. 뭐, 그나저나 이제 어쩔 텐가.”
“이렇게 되게 만든 사람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하하하! 뭐 그건 어쩔 수 없군. 죽은 뒤엔, 태우든 묻든 어디 길바닥에 버리든 상관은 없네만.”
“…….”
“이왕이면, 아내와 같이 있게 해줬으면 좋겠네. 이런저런 핑계로 살아 있으면서 이 사람과 같이 한 시간을 손으로 꼽을 수 있다는 게 돌이켜보니 부끄럽기 그지없군. 앞으로는 계속 함께해야 하지 않겠는가.”
진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노윤에게 “산 자의 시간을 망자가 뺏는 건 할 만한 짓이 못되거든.” 노윤은 한바탕 웃고는 문지방을 넘어서는 그를 잠시 불러세웠다.
“또 뭐야?”
“사는 곳에 너무 애착을 두지 말게. 정작 중요한 게 보이지 않을 수가 있어.”
“글쎄…….”
“그리고 언제든 상관은 없네만 남해에는 한 번쯤 들러줬으면 좋겠네.”
“직접 가라고. 원한다면 강시로 만들어줄까?”
“자네 눈빛이 진지해서 무섭네만.”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린 노윤을 무시하고 나가려던 진유의 귓가에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울려 퍼졌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 아이를 보겠나…….”



4장 출도(出)(1)


노윤은 죽었다. 그의 아내인 노유림 역시 며칠 뒤 그의 뒤를 따랐고, 진유는 두 사람을 할아버지의 시신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묻어주었다.
커다란 봉분 옆에 작은 봉분이 두 곳.
진유는 오른쪽의 봉분에 비녀를 얹어두곤 털썩 주저앉았다.
“나참, 제멋대로인 녀석들 투성이라니까.”
“네가 그걸 말할 처지야?”
기가 찬다는 듯한 팽무린의 목소리에 슬쩍 뒤를 돌아본 진유는 도로 고개를 되돌리며,
“돌아가.”
“갑자기 무슨 소리…….”
“무 아저씨 갔을 때 너도 갔어야 했어. 집으로 돌아가. 팽가에도 올지 모른다. 집을 지켜.”
“너 때문에 온 놈들이 아니잖…….”
“그걸 이해해 줄 정도로 착해 빠진 게 무림이라면 난 그리 싫어하지 않았을 거야. 무인도, 너도.”
“…….”
침묵을 지키며, 주먹을 움켜쥐는 무린의 손에서 피가 배어 나온다.
분했다. 눈앞에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도 무력하다는 사실이, 어제부터 어깨 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않는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납득하기에는,
“부탁이다.”
처음으로 들어보는 부탁이, 부탁이라는 건 이런 게 아닐 텐데. 조금 더 기뻐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는 이 상황이 더 화가 난다.
고개를 숙인 팽무린은 억울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치사한 자식.”
“치사해도 어쩔 수 없어.”
천천히 일어서서 몸을 돌린 그의 눈은, 석양을 등지고 그림자가 드리운 진유의 얼굴에선 여태껏 본 적 없는 쓸쓸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널 방패로 삼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말은 좀 끝까지 들어. 하여간 누가 팽가 아니랄까 봐 그 승질머리하고는.”
흥분해서 반박하려던 린을 다시금 진정시키고, 약간의 한숨 섞인 진유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부려먹어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만큼 강해져서 오면 돼.”
“비겁한 자식.”
“치사에 비겁에, 이제 또 뭐가 남았을려나.”
“그치만, 비겁하잖아.”
“남자란 게 다 그런 거야.”
“오……빠는 달랐으면 했다구…….”
어색한 호칭으로 부르며 애써 고개를 피하지만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분명 지금의 자신이 그의 옆에 있다는 건 그리 대단한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자신은 어리고, 진유 역시 어리다. 앞으로 몇 년, 다른 사람이 손조차 뻗지 못할 정도로 강해진다면, 감히 전 무림에서 손꼽을 만한 실력자로 발돋움한다면…….
“좋아.”
“…….”
“절대로 강해져서 돌아올 테니까.”
“……그래.”
“이 검도, 당신에게 치료받을 필요가 없어질 정도로 마구 휘둘러도 아무렇지도 않게 될 정도로 완벽하게 써먹도록 할 테니까. 그때는, 그때는……!”
“왜 또 잘나가다가 울고 그러냐 이 울보야.”
“흑!”
어깨를 들썩거리며 치밀어오르는 눈물을 끝내 참지 못한 린이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리자 진유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처럼 멋지게 보이나 싶었더니만, 하여간 너란 녀석은…….”
“흐끅! 그래!! 나 원래 울보야 울보라고!!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잖아!”
“하여간.”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린의 몸을 안아준 진유의 귓가에 울먹임이 남아 있는 목소리로 린이 중얼거렸다.
“옛날 생각 나.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
“그때 진유가 아니었으면 나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린.”
“응?”
“쓸데없는 건 생각하지 마.”
“진유……?”
“넌 지금 살아 있어. 그러니 두 번 다시 ‘녀석’에게 먹히지 마라.”
“그럴 거야.”
마주 안고 있는 손에 힘을 더한다.
약간의 서늘함이 감도는 그의 몸이 오늘은 무척이나 따스하게 느껴진다.
멀리서 떠오르는 석양을 바라보며, 무린은 슬며시 눈을 감고 좋은 기분에 몸을 내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