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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화타 1 (14화)
4장 출도(出)(2)
“몸은 좀 어때?”
“아, 진유 님…….”
불쑥 들어오는 진유의 모습에도 이제는 당황하지 않게 된 소미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괜찮아요. 빙정 덕분인지 평소에는 고통도 많이 사그라들었고…….”
“그래? 그럼 다행이고.”
고개를 끄덕인 진유는 손을 뻗어 잠시 진맥을 살피더니, 이내 등을 벽에 기대며 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만간 격통이 한 번 찾아올 거야.”
“그 말씀인즉……?”
“모든 생명은 죽음을 거부하지. 네 몸속에 든 녀석도 마찬가지야. 단지…… 이걸 두고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려나…… 뭐 어쨌든.”
“……?”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진유의 제안은 그야말로 뜻밖의 것이었다.
“너, 무공을 배우고 싶은 마음. 있냐?”
“네?”
동떨어졌다고나 할까, 여태껏 포기하며 살아왔던 것에 대한 망각일까. 어찌 되었든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소미는 얼떨떨함에 제대로 된 대답도 못하고 그저 진유의 해명을 기다렸다.
“네 몸에 든 그 녀석은 질이 나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잘만 써먹으면 반대로 네게 도움이 될 만한 녀석이 될 수도 있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진유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손에 쥔 빙정을 반듯하게 가로로 들면서 말했다.
“애초에 인간의 몸은 음과 양의 기운이 조화롭게 양립하는 것으로 유지가 되지. 네 경우 음으로서 필요한 수치를 모조리 빼앗기고 있으니까 균형이 맞지 않아. 그러니 괴로울 수밖에.”
“그래서 빙정으로 빼앗기는 만큼…… 보충하는 것이군요?”
“그래, 놈은 필요 이상의 음기를 빼앗지는 않지만 그 양이면 충분히 사람은 죽을 수 있지.”
“그렇군요…….”
“그래서, 여기서 재밌는 일이 한 가지 생기는데.”
들고 있던 빙정을 빙글―하고 한 바퀴 돌리며, 진유가 말을 이었다.
“애초에 인체의 근원을 이루는 음양의 기운은, 무인으로 따지면 진원진기와 그 성질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어. 어찌 되었든 양쪽 다 사람에겐 필요한 것이니까.”
“네에…….”
“이 녀석의 경우, 네게서 빼앗은 음기의 양이 많아지면 그걸 네 신체 내부에 그대로 흘려 버린다. 배가 부른 만큼, 배설을 하는 거지. 이때 나오는 기운은 이 녀석의 몸에서 변화된, 즉, 양의 기운으로 나오게 되.”
“아― 그래서 제 몸이 이따금, 뜨거워지거나 하는 이유가 거기에서 나온 것이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다는 표정을 짓던 소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말하려던 의도를 깨닫고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혹― 진유 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그래.”
잠시 말을 멈추곤, 빙정을 가리킨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 치료에 관건은 이 녀석이 네 신체에 버리는 양의 기운을 네가 제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거지. 즉, 이 녀석만 있으면, 넌 진원진기와 같은 수준의 질 좋은 양기를 그 녀석에게서 언제 어디서든, 네가 원하는 대로 뽑아서 쓸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다. 하지만 굳이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이 녀석을 적출해 낸다는 방법도 있어.”
“……무공을 배우고 싶냐는 말씀은, 그런 뜻이었군요.”
“뭐 바로 대답하지는 않아도…….”
“그렇게 해주세요.”
“그래.”
“…….”
“왜, 내가 궁금해 해주길 바라?”
“조금은……요?”
“실없는 자식.”
살풋 웃음을 터뜨리는 소미에게 진유는 마주 웃는 얼굴로 말했다.
“싫은데?”
“…….”
“굳이 풀이하자면, 내가 널 치료하는 데 네 사정까지 알 필요는 없지. 난 다만 알려줄 뿐이야. 이런 길이 있다는 것도, 그걸 선택하는 건 네 자신이고. 그래도 아직 내가 물어봐주길 바라냐?”
“네.”
“착해 보이는 얼굴치고 고집은 있구만.”
“후훗.”
“뭐 굳이 원한다면 못해줄 말들도 아니지. 네 순해 빠진 성격에 어디 가서 복수한답시고 설치고 다니려고 양기를 손에 얻으려는 건 아닐 테고, 차라리 가까운 사람들 지키겠다고 해두는 편이 타당성이 더 있겠지.”
순간 움찔하던 소미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뭐든 다 아시네요, 진유 님은.”
“글쎄…… 추측일 뿐이지. 실제로 네 마음이 어떤지 내가 알 수 있을까. 생각이란 건 순간순간마다 변하는 거야. 그래서 나는 지금, 다시 한 번 물어볼 거다.”
“…….”
“정말 배우고 싶냐? 무공을.”
소미는 지그시 눈을 감고는 이내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제 마음에 변화는 없는 것 같네요.”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으니까요.
“아악!”
밤마다 내지르는 주인의 비명에 백호검은 손이 으스러져라 검을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뭐가 백호검이고, 뭐가 호위란 말인가. 정작 주인이 고통스러울 때 자신의 검은 그녀를 지켜줄 수가 없다. 하다못해 지난번의 습격 때만을 떠올리더라도 자신은 너무나도 무기력했다.
처음이었다.
무공을 익히고 나서 이토록이나 무력함을 느낀 것은.
“며칠 정도 더 지속될 거야.”
손은 물론이고 옷자락이 온통 피로 물든 진유가 문을 열고 나오자, 백호검은 “그런가…….”하고 작게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미 몇 번이고 말했네만…….”
“그럼 말하지 마. 귀에 딱지가 생길 지경이니까.”
“…….”
“아― 그래, 나도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고. 하지만 어쩌겠어. 쟤가 하다못해 토납술이라도 익혔으면 저 정도로 아프지는 않아. 신체가 완전히 일반인인데, 당신도 잘 알잖아?”
“그래서 더 분한가 보이.”
씁쓸한 듯 중얼거리는 그에게 진유는 들고 있던 호리병을 던져 주며 말했다.
“그거라도 마시고, 잠이라도 자둬. 호위란 인간이 며칠이나 밤을 새고, 누가 오면 제대로 지킬 수나 있겠어?”
“……하지만.”
“하지만이고 그치만이고 없어. 연이 너도, 그만 좀 졸고 안에 들어가서 한숨 자.”
“에……!”
마루의 기둥에 깜빡 기대어 졸던 화연이 황급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고개를 붕붕 내저으며 말했다.
“아, 아가씨께서 저토록이나 고통스러우신데, 저만 편하게 있을 수는…… 꺄?!”
“진의 말, 들어야 해.”
그 말을 끝으로, 비어 있는 방에 연을 거의 집어넣다시피 한 려는 잘했냐는 듯이 진유를 한 차례 쳐다보았고 진유는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주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백호검이 이전과는 다른 허탈한 심정으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 처자…… 무인인가?”
“너스 겸 보디가드지. 뭐 봐서 알겠지만 무공을 쓸 줄 아니까 무인이라고 해도 무방하군.”
“……내가 그녀의 무공에 대해 물어본다면, 대답해 줄 건가?”
“당신에게 대답해 줄 필요가 있는 건 소미의 치료에 관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지. 왜, 남의 가족사에 관심이 가나?”
“없다고는 못하겠군. 그렇지만 호기심은 접지.”
“좋은 판단이야. 그나저나…….”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진유를 올려다보는 백호검.
그의 눈동자에 비춰진 진유의 얼굴은, 어딘가 성가신 기색이 역력히 드러났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잠깐 외출 좀 하려고.”
그렇게 말한 진유는 휘적휘적 집을 나섰다.
얼마간 걸었을까. 돌연 그 자리에 우뚝 선 진유는 딱히 어딘가를 향하지도 않은 채 툭 내뱉듯이 말했다.
“진료비 내러 오셨습니까, 손님?”
“여전히 재수없는 낯짝이로군요.”
신랄하기 짝이 없는 어조에 냉랭함이 감도는 분위기.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은 것은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다. 희끄무레한 안개를 동반하고 나타난 여인은 중원인이라기보다 색목인에 가까운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런 점을 제외하고 서라도 충분히 미녀라고 불릴 만한 여인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너야말로, 여전히 버르장머리가 없군.”
“당신에게 들을 만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기가 막히다는 듯한 목소리도 잠시, 여인은 팔짱을 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빙정을 돌려받으러 왔습니다.”
당연한 요구일 것이다. 진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싫은데.”
거절했다. 마치 그럴 거라는 것을 알았다는 듯이 여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유를 들어보도록 하죠.”
이유라― 가볍게 혀를 찬 진유는 겨우 어깨를 웃돌 법한 그녀의 머리통을 코웃음을 쳤다.
“이미 다 알고 온 주제에 굳이 빙빙 돌리는 이유가 뭐야? 넌 그런 성격이 아니었을 텐데.”
“당신이 괴로워하는 걸 보는 게 즐거우니까.”
“…….”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진담인 건지 모를 말을 무표정한 얼굴로 말한 그녀는, 이내 짤막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담보물’을 그런 식으로 취급해서야, 돌려받는 제 입장으로선 중고를 받게 되는 거로군요.”
“그래서, 이자라도 쳐서 받겠다는 거냐?”
“당신이 좋아하는 말이 떠오르는군요.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던.”
“호오― 그럼 제대로 치료비도 지불하지 않고 담보 하나 덜렁 던져 주고 간 무뢰배들에게 나는 손해 배상을 청구해야겠네. 덕분에 나는 필요한 시기에 너희들한테 사용한 약초들을 사용하지 못했거든.”
“그런 거 당신 집에 얼마든지 굴러다니면서…….”
여인은 말을 하다가 이내 입을 닫았다. 서로 억지를 부리는 건 피차일반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는 건 변명밖에 되질 않는다.
“논지가 어긋났군요. 이야기를 되돌리도록 하죠.”
“네 장단에 맞춰주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시큰둥한 진유의 목소리에 여인은 순간 출수하려던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괜히 그때 그 시절을 비춰주는 거울처럼, 쓸데없는 과거의 일만 떠오르는 것 같은 그녀로서는 이 대면조차 그리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그니까 원하는 거 말하고 가라고.”
말은 그렇게 하는 진유였지만,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짜증이 솟구치는 중이었다.
애당초 빙정이라면 썩어 굴러다닐 정도로 있는 곳이 북해.
그곳의 소공주인 이 녀석이 당장 빙정 따위가 필요할 이유 따위 있을 리가 없다.
설혹 필요하다 치더라도 그게 이곳까지 올 이유는 절대 되지 않는다는 게 진유의 전적인 판단이었다.
그렇다는 건 결국, 현재의 자신― 즉 진유에게 빙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원래의 대가를 지불한 뒤 가져가려는 셈이겠지.
정확히는, 그 필요성에 의해 다른 ‘무언가’를 요구하려는 더러운 수작이 틀림없다.
적어도 자신이 환자를 버려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녀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