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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화타 1 (15화)
4장 출도(出)(3)


“그렇군요…… 뭐 그건 일단 차지하고.”
“누구 마음대로 차지하겠다는.”
“북해로 오시죠.”
순간적으로 눈썹을 꿈틀거린 진유가 다소 진지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영감탱이 또 꼴까닥 하는 중이냐?”
“의술에 대한 자부심이 그새 줄어든 겁니까? 앞으로 반백 년은 멀쩡하게 살 것 같습니다만.”
“난 쓸데없는 데에 부심 같은 거 내비치는 인간이 아니라서.”
대답을 하면서도 내심,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궁주의 안위가 아니라면 자신이 북해로 가야 할 이유는 많을지도 모르겠다. 여러모로 할아버지의 연이 이어진 곳 중에 하나이기에.
“어차피 당신의 ‘환자’가 완치되려면 빙정만으로는 부족할 겁니다.”
“너……?”
“한옥을 빌려드리겠습니다. 빙정 역시 그냥 드리죠.”
“……니가 이렇게 순순할 리가 없는데.”
“물론, 그냥이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말로도 아깝군요. 그래…… 적어도 그 열 배 정도는 받아도 아깝지는 않겠죠.”
“…….”
아마도 이 녀석이라면 정말로 그렇게 하겠지. 설래설래 고개를 내저은 그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좋다고, 열 배든 뭐든 내 일신에 피해가 가지 않는 조건이라면 받아들이지.”
“묘하게 순종적이군요. 그새 길들여진 겁니까? 그 어린 계집에게? 하기야, 데리고 놀기에는 그럭저럭 반반하다고 들었습니다만.”
“너보단 몇 억 배 정도 나을 거다.”
단언하는 진유의 말에 살짝 굳어지는 여인의 안면.
“……그럼 ‘일단’ 돌아가겠습니다. 머지않은 시일에 합류하는 것으로 하지요.”
하얀 머리가 일렁이며 간단히 고개를 숙인 그녀는 이윽고 천천히 돌아서다가 잠시 발을 멈추곤,
“그리고.”
“……?”
“그깟 계집보다 제가 훨씬 낫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의견 따윈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그럼.”
“질투는.”
진유는 피식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곤 어느 틈엔가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린 잔영을 응시하다가 휙 고개를 뒤로 돌렸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곳에는 려가 서 있었다.
“마을 좀 다녀올 거니까, 알지?”
“묻고 싶은 게 있어.”
“…….”
언제나처럼 다녀오려던 진유의 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오랜만이라거나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진유의 얼굴이 굳어진 것은, 그것도 굉장히 진하게 물들은 채로.
“진, 떠날 생각이야?”
“가볍게 나들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갔다 오자고.”
“복수? 아니면…….”
“양쪽 다 아니야. 뭐…… 별일이야 있겠어.”
“걱정되니까.”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저런 말 자체가 극히 드물다는 것을 알기에.
“걱정 끼쳐서 미안.”
“으응…… 진은 나쁘지 않아.”
“그래, 그럼 잠깐 다녀올게.”
“다녀와.”
소매에 넣어둔 방울을 짤랑―하고 흔들어 보인 진유는 그 길로 산을 내려갔다.
려는 그 자리에서 서서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한참 동안 산길을 내려다보았다.

* * *

“흐음…… 일이 그렇게 되었는가.”
턱을 쓰다듬는 손이 우윳빛처럼 매끄럽기 짝이 없다.
마치 여인의 섬섬옥수를 떠올리듯이, 허나 선이 가는 미성이라곤 해도 분명하게 말해서 남성의 것이었다.
어둠은 그 안에 모여 있는 이들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가장 상석에 위치한 미성의 존재는 다리를 꼰 채 흥미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아니, 그대의 잘못은 없지. 우선은 현 상태를 주시하고, 6계(六計) 이후의 일은 잠정적으로 중단하라.”
“그리하면…… 너무 늦어지는 것이 아닐런지요.”
누군가의 염려스런 목소리에, 유일하게 붉은 단상 위 검은 옥좌에 앉은 남자가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한다.
“하하하! 뭐 조금 두고 본다고 중원이 도망가진 않아 흑성(黑星). 나는 단지,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믿고 싶지 않네. 그리고 조금은 호기심이 생겼거든.”
“그, 신주의 화타란 자 말입니까?”
성미가 급해 보이는 인상의 중년인의 말에 남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무릎을 꿇고 있던 고월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허나 이 노구를 놀라게 한 것은 려라는 이름의 계집이었지 그 애송이는 아니었습니다. 교주. 적어도 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 애송이의 몸에는 단전조차 없었습니다.”
“후후.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데 말이지.”
일순― 스산하게 눈을 빛내며 좌중을 훑는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힘이라는 것이, 꼭 자신이 가진 무공을 뜻하겠나?”
“허면……?”
“그 ‘려’라는 계집이, 그분의 진전을 이은 것으로도 모자라 정파를 대표하는 전설의 진전조차 물려받았다. 그런 괴물이 진유라는 친구의 말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있었다…… 그것도 고 장로에게 ‘공포’를 느끼게 할 정도의 위압감과 십 수 명의 성자들을 움직이지 못할 살기를 가진 실력자가 말이지.”
남자의 말이 끝나자, 다소 동조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며 몇몇 인물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즉, 주군께선 그 여자 ‘자체’가 이미 그의 무력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만한 실력자를 아래에 뒀으면서 이제껏 초야에 틀어박혀 선비처럼 지내던 것이 나로선 조금 신기하다고 생각할 뿐이지.”
“확실히…… 범상한 친구는 아니었습니다.”
고월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는 듯했다.
미소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자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진유란 남자에 관한 건은 내가 직접 처리하겠다. 이외의 건은 계획대로 진행하도록.”
“존명.”
일시에 터져 나오는 복명을 뒤로한 채 남자는 실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치 긴 지루함 속에서 겨우 자신의 호기심을 끌 만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 * *

“하오문…… 말씀이십니까?”
“그래, 하오문 말씀이시다.”
별안간 찾아와 느닷없는 질문을 던지는 진유에게 사내는 곤란하다는 듯 짧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진유가 자신을 이 자리에 맡긴 것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렇게 대놓고 뭔가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기에 다고 의아스런 마음도 있었다.
“글쎄요…… 일단 타 지역에서 온 아이들의 분류는 이전에 진유 님이 시키신 이래로 진행 중이긴 합니다만, 워낙 복잡한 사정을 가진 아이들이 대부분인 데다가, 숨기는 것도 적지 않다 보니 완전하게라고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래? 그럼 북해에서 왔을 법한 애들은, 짐작 가는 곳이라도 없냐?”
“북해라…….”
작게 중얼거리던 사내는, 역시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하지만 진유는 여전히 만족한 표정이 아니었다. 어딘가 삐뚜름한 표정을 지은 그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꼬리만 잡혀봐라. 북해고 나발이고 전부 족쳐 버릴 테다.”
“그건 무슨…….”
“아― 별일 아냐, 신경 끄고, 뭐 애들 잘 부탁한다.”
“새삼스레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하고 말을 이으려던 사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진유라는 남자는 평소에 이런 말을 남길 만한 위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한다는 건, 무언가 큰일이 있거나 위험이 있다는 것. 혹은……
“신주를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당분간.”
부정이 없는 말에, 예전처럼 왕진이라도 가려나 싶었는데 어쩐지 느낌이 좋지를 않았다.
“설마 이대로 무작정 떠나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떨려 나오는 목소리에 진유는 대답 대신 씨익― 웃었다. 동시에 사내는 얼굴을 확 구겼다.
“이런 젠장!!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런 데 앉혀놓을 때부터 내가 알아봤다고!!”
길길이 날뛰는 그를 재밌다는 듯이 지켜보던 진유가 툭 하고 던지듯이 말했다.
“왜, 나 가고 나면 네 하렘이 되는 건데.”
“하렘이 뭡니까?”
“주지육림.”
그건 댁이나 가능한 말이고! 난 그냥 시정잡배가 된단 말입니다!!
거의 절망 어린 눈이 된 사내가 한 줄기 희망을 붙드는 심정으로 물었다.
“도, 돌아는 오시는 겁니까? 예? 오시는 거죠? 설마 저 혼자 여기 두고 저 여자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뻔히 아시면서 막 장기 여행하고 그런 거 아니죠?”
“난 뭐 어디 마음대로 가지도 못하냐?”
“적어도 여기 있는 아이들에게 마음 정도는 주고 가시죠?”
“그런 짓 했다가 나머지 애들한테 무슨 소리를 들으라고.”
“그럼 그냥 전부 품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무슨 당연한 걸 묻냐는 듯한 사내의 말투와 표정에 질려 버린 건 진유였다.
“너나 실컷 품어라, 인마.”
할 수 있으면 벌써 했다 이 개자식아!!
욕이라도 퍼부어주고 싶은 심정의 그였지만, 사실상 신주의 화류계를― 풍속을 바꿔놓은 진유에게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도 해야 할 말은 하겠지만,
“하지만 정말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가신다는 건 잔인한 일입니다.”
“쓸데없는 희망을 품게 해주는 것도 잔인한 일이지. 저 녀석들은 잘하고 있어. 욕망과 희망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알고, 살아가야 할 이유도 생겼고, 자신만이 비참하고 버려졌다는 생각도 안 하게 됐어.”
“그걸 하게 만드신 건 누구도 아닌 당신이십니다.”
진지하게 물든 사내의 말에 진유 역시 장난조가 아닌 어투로 화답한다.
“그 뒤론 스스로 해 나가는 거야.”
“허나…….”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 다시 왈가왈부하지 마.”
“당신은, 그걸로 괜찮은 겁니까?”
“저 녀석들을 책임질 사람은 따로 있어. 그리고 그건 내가 아니지.”
“근데 왜 하필 제가 알려줘야 하는 겁니까?”
“니가 제일 만만하니까.”
남자는 머리를 싸매고 말하려고 싶어지는 것을 관두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말했다.
“나중에 어떻게 되도 전 모릅니다.”
“그러시던가, 나 간다.”
손을 휘휘 내저으며 밖을 나서는 진유를 보며, 사내는 실로 복잡한 심정이었다. 대체 이 일을 어떻게 그 살벌한 여자들에게 설명한단 말인가?
“차라리 그냥 죽으라고 하십쇼.”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