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4화
제7장 두더지(2)


“부르셨습니까? 엘토 고참님?”
“응, 저기 가서 내가 팔 땅굴 좀 파 주라.”
‘망할.’
“네.”
드란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직 자신이 해야 할 할당은 1/10도 채우지 못했건만, 다른 고참 두더지 놈들은 놀면서 자신에게 일을 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엘토, 자신의 전대 신참의 역할을 했던 두더지가 유난히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하지만 고참이 하라는데 신참이 어쩌겠는가?
드란은 속으로 눈물과 욕을 마구 퍼붓고는 기다란 손톱에 작업용 드릴을 장착시켰다.
두두두두두두―
드릴을 작동시키자 엄청난 속도로 땅굴이 파여지기 시작했다. 과연 두더지들이 만들어 낸 무기답게 땅굴 파는 데에는 신의 경지에 다다른 무기라는 소리를 들어도 부족하지 않을 무기이다.
“군대에서나 당할 신참 갈굼을 두더지한테 받을 줄이야.”
투덜거리면서도 땅굴 파는 작업은 계속하고 있는 드란이다.
두더지들에게도 직위가 있기에 이제 막 신참으로 들어온 드란은 이들에게 뭐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자칫해서 대들다간 얻어맞기 일쑤이다.
첫 번째 날에 자신을 왜 부려 먹냐고 화를 냈다가 얼차려를 받지 않았던가?
“어이 드토! 저기가 안 파지잖아? 똑바로 못해?”
‘그럼 네가 하던가.’
“아, 죄송합니다.”
드란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드란의 땅굴 파기 작업은 계속됐고, 50여 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작업을 마칠 수가 있었다.
“헉헉.”
막 작업을 마친 드란의 몸이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되어 버렸다. 당연하게도 50여 분이라는 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땅굴을 파낸 결과다.
이 정도면 쉬라고 말해 줄 만하 것만, 고참 두더지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나보다.
“이제 끝난 거냐? 쩝, 뭐 여하튼간에…… 드토 내 것도 좀 해 주라.”
“어이, 센토. 이번에는 내 차례라고!”
그런 고참들의 모습에 드란의 이마에 혈관 마크가 새겨졌다.
“저기요. 죄송하지만…… 제 작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
“뭐?”
드란의 말을 끊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엘토였다.
“그럼 넌 우리들의 부탁보다 네 일이 더 중요하다는 거냐? 신참 주제에 건방지다?”
“그게 아니라…….”
“맞잖아. 뭐가 아니야?”
‘그래, 맞다. 어쩔래?’
“아닙니다. 저에겐 고참님들의 일이 우선입니다.”
겉으로는 아부를, 속으로는 욕지거리를 내뱉는 드란이었지만, 드란의 아부가 마음에 들었는지. 엘토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암, 그래야지.”
“그래서 누구 차례라는 거냐?”
“그냥 동시에 해 보면 어때?”
“그거 좋다!”
고참 두더지 중 하나인 센토가 무엇인가가 생각난 듯 방긋 웃으며 시선을 드란에게 향했다.
“어이, 드토. 우리가 너무 일을 많이 했잖아? 그치? 그러니까 우리가 딱 2시간만 쉴게. 그러니 2시간 안에 2명분 작업 끝내 놔. 알았지?”
라고 말하고는 센토는 다른 고참 두더지들과 나란히 손을 잡고는 껑충껑충 뛰며 땅굴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런 장면을 보는 드란은 열불이 뻗쳐서 돌아가실 지경이다.
“내가 앓느니 죽지.”
고참이 시킨 일을 신참이 뭐라고 반발할 수 있겠는가? 결국 드란은 예비 군대에 왔다고 생각하고는 작업을 계속했다.

*

“끄, 끝났다!”
드란이 두더지의 몸으로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몸에 덕지덕지 난 땀들 역시 춤을 추며 밑으로 흘러내렸다.
당연하게도 5일 동안 온몸이 뻐근하도록 일한 드란이다. 그간의 설움을 생각하자니 정말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내 반드시 돌아와서 고참 두더지들 녀석들의 간을 으적으적 씹어 먹어 주마.”
하나의 결심을 맹세한 드란은 퀘스트 보상을 받기 위해 땅굴 기지 대대장인 무토에게 찾아갔다.
“호오, 벌써 끝냈다는 건가? 대단하군. 대단해. 좋아, 여기 보상이네.”
무토가 함지박만 한 웃음을 지으며 드란에게 주머니 한 개와 함께 대량의 경험치를 주었다.
‘엄청난 경험치!’
드란은 순식간에 3업을 해 버린 레벨에 입을 떡하니 벌리면서 제일 중요한 무토에게 받은 아이템의 옵션을 확인해 보았다.

땅굴 지렁이X50(특수)
땅굴에 서식하는 지렁이로, 두더지들이 즐겨먹는 음식이다. 크기가 다른 지렁이들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작은 편이어서 잡기가 힘든 희귀종이다. 하지만 몸에 많은 영양분을 포함하고 있기에, 섭취할 경우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스텟이 증가한다. 또 땅을 기름지게 하는 데에 무척이나 탁월하다.
옵션:섭취할 경우 1시간 동안 모든 스텟 20% 증가. 땅을 기름지게 한다.

“이건 뭐냐?”
아이템을 확인하고 난 드란이 바로 말한 대답이다.
하지만 무토는 드란의 말을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호탕하게 웃어젖히며 말했다.
“하하하하! 드토, 그것은 우리 두더지들이 한 마리 먹다가 세 마리 죽어도 모를 맛이라네. 비록 크기가 작아 웬만하게 집중을 하지 않는 한, 안 보이지만 효능은 탁월하다고 내가 장담한다네.”
그래, 맞다. 모든 스텟 20% 증가에다가 땅에 심을 경우에는 땅을 기름지게 한다니 말이다.
그런데 어쩌냐? 나는 이미호야 이미호. 이미호가 지렁이 먹는 거 봤나?
아니, 지금 모습은 두더지이니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50개니까 나중에 쓸 일이 있겠지.”
말과 함께 드란은 꿈틀꿈틀 움직이는 땅굴 지렁이들을 주머니에 싼 채 인벤토리 안으로 쑤셔 넣었다. 어차피 인벤토리는 만능이기에 죽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무토 대대장님, 그러면 이제는 무엇을 하면 되나요?”
“아, 자네는 열심히 일을 했으니 충분히 쉬어도 된다네. 나중에 일이 생기면 말할 터이니 지금은 편히 쉬도록 하게나.”
“감사드립니다.”
무토의 말에 드란은 랄라랄라 하며 쉬기 위해 자신이 일하던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 도착해 보니 어느새 고참 두더지들이 자신과 같은 땅굴 지렁이들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손에 쥔 채 행복에 겨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냠냠, 역시 땅굴 지렁이는 언제 먹어도 맛이 난다니까. 햐, 고놈 참 맛난다.”
“그럼. 왜, 옆집에 땅굴 지렁이 처음 먹어 본 두더지는 그 맛에 기절까지 했다잖어.”
이야기의 담소를 나누며 쉬던 고참 두더지들은 신참 두더지인 드란이 다가오자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저 녀석도 땅굴 지렁이를 받았겠지?”
“암, 저 녀석도 필히 받았을 터. 그럼 그 땅굴 지렁이는 열심히 일한 우리들의 것이다.”
“고럼 고럼, 신참 녀석이 염치가 없지 않는 한은 자신보다 수백 배는 열심히 일한 우리 고참 형님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당연지사한 일이다.”
고참 두더지들이 두런두런 모여서는 드란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드란이 다 들어서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음에도 계속해 댔다.
‘저, 저런 개 같은…….’
고참 두더지 놈들이 하는 말을 들은 드란이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비록 꿈틀거려서 징그러운 지렁이이지만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받아 낸 것이다.
더구나 고참 녀석들은 자신을 부려먹기만 했을 뿐, 실질적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탱자탱자 놀기만 하지 않았던가?
마침내 제대로 열불이 뻗치다 못해 터져 버린 드란이 신경질을 부렸다.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내가 보자기로 보이냐? 앙?”
드란의 말투와 행동에 당황한 것은 고참 두더지들이다.
“이, 이게 신참 주제에! 너무 건방지다!”
“그, 그래! 신참이면 신참답게 굴어라!”
“이것들이 진짜! 그럼 너희들도 고참답게 굴란 말이다!”
“뭐하는 짓거리냐!”
어느 선인이 말하기를, 모든 것에는 타이밍이 제일 중요하다고 한다. 바로 지금의 경우가 타이밍이 무척이나 안 좋은 경우이다.
“이제 막 온 녀석이 선배들에게 지금 뭐하는 짓거리지? 우리 두더지들에게 직위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아무리 집안이 좋다고 해도 직위가 낮으면 꿇으라면 꿇어야 하는 것이 두더지 사회란 말이다! 네놈! 퇴출당하고 싶은 거냐?!”
제법 젊어 보이는 두더지 한 마리가 인상을 잔뜩 쓰고는 드란을 째려봤다.
“아이고, 제1호 땅굴 기지 행동대장이신 아토 님이 아니십니까?”
‘엿됐다.’
드란이 속이 쓰라린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진짜 타이밍도 더럽게 안 좋다. 막 고참 두더지 놈들에게 한 소리 할 때 오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말인가?
“그렇다. 그런데 센토, 저 녀석의 이름이 드토라고 했던가?”
“네, 네. 그렇습니다요.”
센토가 아부를 떨며 말하자 그에 기분이 좋은 듯 행동대장인 아토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이내 그 짙은 미소가 드토를 향하자 찌푸림으로 변질되었다.
“거기 너, 드토는 당장 나를 따라와라.”
“예.”
드란이 뭐씹은 듯한 표정으로 아토를 쫄쫄 따라가자 뒤에서 고참 두더지 녀석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

“젠장.”
막 행동대장 아토에게서 벗어난 드란의 얼굴은 말 그대로 만신창이었다.
이유는 간단하게도 아토에게 있었다.
“어이, 너.”
“네?”
“난 생각 같은 건 잘 못해. 일단 몇 대 맞자.”
“…….”
이걸로 끝이다.
참으로 간단하면서도, 짧고 굵은 해결 방식이 아니던가? 하긴, 그 녀석이 행동대장이라고 했으니, 행동만 대장인 것이다.
“으드득, 내 기필코 그 녀석들은 용서 못한다.”
드란의 얼굴에 자동적으로 고참 두더지 녀석들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것도 유난히 자신을 괴롭혔던 엘토와 아토에게 모든 것을 고자질한 센토의 얼굴이 진하다.
“고놈들을 확 태워 버리고 도망쳐 버려?”
간단하게 불의 술을 정통으로 날리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드란이 아쉽다.
“아니지. 조각조각 분해한 다음에 우리 집 강아지한테 먹여 버리는 거야.”
그건 너무 잔인하다.
하지만 잔인하다면 어떤가? 이미 여러 몬스터는 물론이고 같은 유저들의 배에도 손톱을 찔러 넣어 간을 뽑아 먹던 자신이다.
“후후후후.”
드란의 웃는 얼굴이 무섭다.

*

“하하하! 봤냐? 봤어? 그 신참 녀석도 참 운 없지, 어떻게 행동대장인 아토에게 걸릴 수가 있냐?”
“난 그 녀석이 쫄래쫄래 가는 거 보고, 빵 터졌었잖아. 크하하하!”
“그런데 우리가 좀 잘못하긴 한 거 같아.”
유난히 드란을 괴롭히지 않았던 고참 두더지인 차토의 말에 엘토와 센토, 그리고 그밖에 고참 두더지들이 차토를 째릿하게 쳐다봤다.
“우리가 뭘 잘못했다는 거냐 차토?”
“맞아, 우린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이곳 두더지 사회에서 직위는, 곧 생명의 가치이다.”
다른 고참 두더지들의 말에도 차토는 괜스레 걱정이 된다.
“미안한데, 나 잠시 나가 볼게.”
말과 함께 차토가 두더지 집에서 나와서는 행동대장 아토의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이내 드란과 마주칠 수가 있었다.
“어이, 드토!”
“후후후후! 응?”
막 고참 두더지들을 분해하는 잔인한 상상을 하고 있던 드란에게로 한 마리의 두더지, 차토가 눈에 띄었다.
‘저 녀석은.’
기억난다. 자신이 속한 일터에서의 고참 두더지이지만 특이하게 자신에게 일을 시키지 않고 혼자서 묵묵히 일을 하던 유일한 고참 두더지, 그가 바로 차토였다.
“무슨 일이시죠?”
“아이고, 얼굴 좀 봐라. 이봐! 당장 날 따라오라고!”
엉망진창인 드란의 얼굴을 본 차토가 혀를 차면서는 드란의 손을 퍼뜩 잡고는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어, 어디 가시는 건데요?”
‘설마 퇴출?!’
차토의 급박한 행동에 드란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아직은 안 된다. 퇴출을 당하더라도 엘토나 센토는 조각조각 분해해야 한다. 이것은 반드시 해야 하는 신의 계시인 일이다.
“저, 저기요 차토 님! 죄송합니다! 다시는 까불지 않겠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서 들어가자고.”
드란의 행동에 차토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는 어느새 도착한 두더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봐, 닥토. 이 녀석 얼굴 좀 어떻게 해 봐. 좀 상태가 심각해.”
“드르렁―”
차토의 말에 대답은 안 들리고 코고는 소리만 들려온다. 드란은 무엇을 하냐고 막 차토를 향해 말하려던 중 차토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우당탕탕―
무엇인가가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이윽고 특이하게 안경을 쓴 두더지가 털을 뾰족뾰족 세우고는 나타났다.
“음냐, 잘 자고 있었는데 뭐냐. 분명 차토겠지. 무뚝뚝한 양반 같으니라고.”
“그러는 넌 의사면서 잠만 퍼질러 자는 거냐? 다른 건 됐고, 이 녀석 부은 얼굴 좀 낫게 해 줘 봐.”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