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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것을 준혁은 최근에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정적이 가득한 교실 앞에서는 교수가 다리를 꼬고 앉아 학생들을 지켜보았고, 주변으로는 조교가 바삐 돌아다녔다.
지금은 학생들에게 즐거움과 동시에 슬픔을 안겨다 주는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각 학생마다 시험이 끝나는 날은 다르지만 그와 동시에 약 삼 개월간의 휴식 아닌 휴식이 주어지는 셈이었다.
그랬기에 학생들의 손이 정적 속에서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머릿속에 억지로 쑤셔 넣은 지식이 빠져나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것을 써 내야 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학생들이 태반이었다. 중간고사 때도 느낀 거지만, 눈앞의 교수는 학생들의 평균적인 실력을 잘 따지지 않았다.
자신이 알려 준 것으로 풀 수 있는 최상위 난이도의 문제를 가감없이 시험문제로 출제하는 인물이었다. 나름 열심히 공부를 한 이들은 열심히 펜을 끄적였지만, 순간 그들을 긴장시키는 사람이 튀어나왔다.
“시험지도 놓고 가야 하나요?”
“으응? 아, 놓고 가도록.”
돌연 준혁이 앞으로 나오며 묻자 교수가 조금 놀라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을 했다. 준혁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나름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봐 왔던 사람들은 벌써 끝냈냐는 생각과 함께 포기하는 마음을 가졌다.
어려운 문제가 적지 않았기에 벌써 시험을 끝낸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것은 교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언가를 열심히 쓰던 학생이 시험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자리를 박차고 있어난 것이었다.
결국 교수의 눈에는 포기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준혁은 그런 교수의 시선을 무시하고는 그대로 문을 나섰다.
조금은 쌀쌀해진 날씨이지만 햇빛만큼은 더없이 밝게 빛나는, 나쁘지 않은 날씨였다.
“으음∼ 시험도 다 끝났고, 이제는 방학이네.”
시험 결과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는 태연한 표정의 준혁이었다.
‘마나를 수련하기 위해서 하는 명상이 정말로 좋단 말이야.’
명상을 통해 집중력이 높아진 준혁에게 1학년 문제는 어려운 것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문제가 조금 어렵긴 해도 막히는 부분이 없었다.
단순히 집중력만 높아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공대를 다니는 준혁은 수학 계열을 배우는데, 수학은 문제에 어떤 공식을 대입해야 하는지가 중요했다.
교수들이 흔히 하는 말 중 많이 풀어 보라는 의미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준혁은 나나에게 시도 때도 없이 들은 말이 있었다.
창의적인 생각.
마나를 느낀 지 약 두 달이 조금 되지 않는 어느 날을 기준으로 준혁의 보는 눈이 확 넓어진 것이다.
―다 끝났냥?
“오지 말랬지!”
물론 나나로 인해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만큼은 여전히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방학 동안에는 무엇을 할 거냥?
“역시 돈을 벌면서 마법 수련을 해야겠지.”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하는 준혁이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전과 달리 강인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돈을 버는 것과 마법 수련을 하는 것.
그 어느 것 하나 준혁이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말리지는 않겠다냥. 그런데 일은 무슨 일을 할 생각이냥?
“글쎄, 마나 덕분에 활력도 돌고 하니 힘쓰는 일이라도 해서 바짝 벌어야겠지?”
―무식하다냥. 냥냥냥.
준혁의 말에 나나가 웃어대기 시작했다.
“무, 뭐가!”
나나의 무시에 준혁이 발끈해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는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더니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에 고개를 푹 숙이고는 뛰기 시작했다.
‘휴, 휴대폰이라도 있으면 연기라도 할 텐데…….’
아는 사람이 별로 없기에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는 준혁으로서는 전혀 뜻밖의 이유로 휴대폰의 필요성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냥냥, 고생하지 말고 과외라는 것을 해 보는 게 어떻겠냥? 네가 다니는 학교도 상위권에 있는 학교이지 않냥?
“그렇지만 남을 가르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야.”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준혁이 다시금 나나와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준혁을 보며 나나는 고개를 살랑거릴 뿐이었다.
―멍청하다냥. 니가 만들어서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냥. 그냥 있는 것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면 되는 거다냥. 이 세상의 교육 체제가 전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네가 살고 있는 나라의 교육 체제는 태반이 암기다냥. 대학생이라는 것들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것도 아주 일부일 뿐이다냥.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묘하게 자신보다 잘 알고 있는 나나의 의견에 살짝 심술이 난 준혁이었다.
―너는 표정으로 다 드러난다냥. 수련을 더욱 할 필요가 있다냥.
“수련을 하면 뭐가 바뀌냐?”
―바뀐다냥. 더욱 냉철하게 판단을 할 수 있다냥. 잘못하면 고지식하게 바라볼 수도 있지만 말이다냥. 물론 네 소심함이 너무 강해 바뀌지 않을 수도 있지만냥. 냐냐냥.
남들에겐 귀엽게만 보이는 나나의 뒤통수를 딱 한 대 쥐어박아 보고 싶다는 생각에 준혁이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떻게 할 거냐냥. 과외할 거냥? 어차피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거니 그다지 어렵지도 않을 거다냥.
“방학인데 사람들이 하려고 할까…….”
―그러니 일단은 해 봐라냥. 편의점에서 하는 일로도 아직까지는 견딜 만하지 않냐냥.
“니가 오고 나서부터 조금씩 마이너스야. 군대에서 번 돈을 쓰지 않고 모아 둔 게 정말로 다행이지.”
쥐꼬리만 한 월급을 모아 둔 것을 정말로 잘한 일이라 생각하는 준혁이었다. 하긴 그것으로 지금의 방도 잡은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과외를 해라냥. 돈 많이 번다고 들었다냥.
“그런 사람들은 상당히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지. 나는 얼마나 벌지 모르잖아.”
―해 봐라냥. 잘만 하면 금방 이름 날릴 거 아니냐냥. 거기에 잘되면 편의점에서 일하는 것보다 수련할 시간이 더 늘어날 거다냥. 또 다음 학기에 다닐 때는 편의점이 아닌 과외를 하면서 다닐 수 있다냥!
“그래도 네가 먹는 참치는 그대로야.”
―냐냥! 쪼잔하다냥!
“됐거든.”
준혁은 자신이 이겼다는 듯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 나나가 했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
다른 사람들이 했다면 의심을 했겠지만, 나나는 달랐다. 나나와 자신은 서로의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비록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작은 고양이였지만,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흠, 한 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하지 말아라냥! 그냥 무식하게 몸을 쓰는 일이나 해라냥!
“잘되면 참치 사 줄게.”
―어서어서 해라냥!
가끔 단순한 면을 보이는 나나의 행동에 준혁이 나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건방지다냥!
“귀여워서 그렇지. 그보다 일단은 전단지라도 만들어 붙여야겠네. 후우, 문어 다리 모양으로 해야겠고, 테이프도 있어야겠네. 쳇, 또 돈이 깨지겠네.”
과외를 하게 되면 훨씬 많은 이득을 얻을 것이지만 작은 지출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준혁이었다. 나나는 그런 준혁을 보며 다시금 쪼잔하다고 놀렸다.
우여곡절 끝에 전단지를 만들기 위해 PC방에 간 준혁은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연락처를 남길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전단지 붙이는 일에 앞서 준혁은 휴대폰부터 하나 개통을 시켜야만 했다.
실로 아깝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5. 견습 마녀, 과외 선생이 되다
조금은 무리라 할 수도 있을 만큼 편의점 아르바이트 시간을 연장시킨 준혁은 여전히 어색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시험 기간이 끝나 아르바이트를 하던 학생이 집으로 내려간 탓에 준혁이 임시적으로 대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편의점이었기에 방학을 맞아 찾는 사람의 수도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전단지를 붙인 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 상황임에도 단 한 통의 전화도 오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기껏 기대되는 문자가 와 봐야 대리 운전, 대출, 성인 사이트들의 광고 같은,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연락만 왔다. 실로 절망스러운 상황이었다.
‘이, 이렇게 되면 정말로 휴대폰을 개통한 것은 엄청난 손실이 되는데…….’
단 한 명의 이름도 저장되어 있지 않은 휴대폰으로 인해 준혁의 고심은 하루하루 커지고만 있었다. 최근 들어서는 자신의 것도 사 달라는 나나로 인해 짜증을 내기도 했을 정도였다.
‘고양이 주제에 건방지게 휴대폰이라니!’
“내가 조금 늦었지? 후우, 오늘 길에 오랜만에 보는 친구를 만나서 말이야.”
“아, 어서 오세요.”
준혁이 돌연 문을 열고 들어오는 편의점의 주인을 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다지 늦지도 않으셨는데요. 그보다 조금 더 대화하고 오시지…….”
“하하하, 그럴까도 했지만 네 연락처를 알아야 부탁이라도 하지. 괜히 늦게 왔다가 네가 무슨 일 있다고 경찰에 신고라도 하면 낭패잖아.”
“그런가…….”
주인의 말에 준혁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했다.
“그러지 말고 휴대폰 하나 사는 게 어때? 요즘에는 최신폰만 아니면 기계 값은 공짜잖아. 이용 요금만 내면 된다고 하던데.”
“사, 사긴 했는데요.”
“뭐?!”
놀라는 주인의 말에 준혁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사실 준혁과 주인은 나이 차이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주인의 나이가 30대 중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편의점 주인은 준혁을 늘 동생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준혁은 상대가 자신의 고용주이었기에 그렇게 편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일찍 좀 말하지. 그보다 갑자기 휴대폰은 왜? 혹시 여자 친구라도 생겼어? 줘 봐. 내 연락처 찍어 줄 테니까.”
편의점 주인의 말에 준혁이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건네며 답답했던 마음을 조심스럽게 털어놨다. 어려워하긴 하지만 그나마 가장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말하라면 편의점 주인을 꼽아야 할 인맥이었으니.
“실은 과외 알바를 해 보려고 샀는데, 전혀 연락이 안 오네요.”
“과외? 아아, 너 상당히 좋은 대학 다녔지? 과외라……. 너 공대라고 했지? 그럼 수학하고 과학 쪽? 영어도 가능한가?”
“가르치는 것은 한 번도 안 해 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수학은 되고, 과학도 물리는 가능할 것 같아요.”
“어느 정도까지? 고등학생도 가능해?”
“어렵지는 않잖아요, 고등학교 수학도.”
“3학년 것은 제법 어렵다고 하던데. 뭐, 너네 학교 등급이 높으니까. 그래, 잠깐만 기다려 봐.”
편의점 주인이 전화를 걸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는 사이 준혁은 처음 접하는 휴대폰의 기능을 익히고 있었다.
그것은 저장을 하는 것.
‘이쪽 방향에 있는 것을 누르면 되나?’
단지 전화를 받기 위해 산 것이었기에 심각한 고민에 빠지며 힘겹게 저장을 완료하자 주인이 활짝 웃으며 들어왔다.
“됐다, 됐어. 이 형님께 고마워해라.”
“진짜요?”
“뭔 줄은 알고 그러는 거냐?”
“이런 상황이라면 뭐…….”
“전혀 눈치가 없지는 않네. 내 조카애가 있거든. 이제 고1이니 네가 가르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거야. 과외비는 뭐, 니가 적당히 형이랑 맞춰 보고, 시간 정해지면 말해라. 그 파트 알바를 따로 구해야 하니까.”
“저, 정말로요?”
“확신은 못해. 니가 형을 만나보고 될지 안 될지 정하는 거니까.”
“고맙습니다.”
뜻밖에 굴러 들어온 복에 준혁이 구십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하하하, 뭐, 과외한다고 편의점 알바 대충 하면 바로 자른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자신이 편의점에 묶여 있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는 준혁이었다. 단지 적은 시간으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만이 그를 즐겁게 하고 있었다.
* * *
자신을 바라보며 방긋 미소를 짓고 있는 중년 여인을 앞에 두고 준혁은 바짝 긴장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도련님이 추천을 해 주셨고, 아이가 학원의 진도를 잘 못 따라 가는 것 같아서 일단 과외를 시키기로 한 거지만 잘 못하실 경우 바로 그만두도록 할 거예요.”
“열심히 가르치겠습니다.”
“호호호, 좋은 마음가짐이에요. 어떤 일을 하든 이왕 하게 된 것 최선을 다해야죠. 그보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어떻게, 오늘부터 과외를 하시겠나요?”
“오늘은 교제를 좀 보고, 테스트를 해 볼 생각입니다.”
“그럼 과외비는 당일로 드릴까요, 아니면 일주일이나 한 달을 기준으로 드릴까요?”
“아직 얼마나 하게 될지 모르니까, 그…….”
“그럼 한 달로 하도록 하죠. 가격은 남편과 상의한 그대로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