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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일찍 와서 신예와 아이들의 과외 시간을 조정했는데, 생각보다 그녀는 쿨한 어머니였다.
반강제적으로 하는 자습을 빼서 여태까지 해 오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규 수업이 끝난 뒤에 과외를 하기로 한 것이었다.
일주일에 세 번 하는 과외였기에 아이들은 쉴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좋아할 법한 선택을 한 것이었다.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준혁의 실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수학 점수가 꾸준히 오르고 있었고, 영어도 조금씩 가르쳐 주자 전체적으로 성적이 오르는 상태였다.
아이들은 오히려 과외 수업이 끝나면 스스로 남아 스터디 그룹으로 짜 그날 배운 것을 잊지 않기 위해 공부를 할 정도였다.
그런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는 부모들은 신예의 결정을 따르기로 한 것이었다.
부모들 역시 다들 학창 시절에 자습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의 경험으로 보아 어느 반에나 하나씩 떠드는 애들이 있어 특별한 기간이 아니고서는 집중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것을 알기에 부모들은 신예의 선택을 따라 조용한 집에서 공부를 할 시간을 만들어 주기로 한 것이었다.
준혁에게도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일부러 과외를 하는 날에 수업을 최대한 몰아넣었기에 저녁 시간에 바로 과외를 하게 되면 중간 중간 끊어서 할 필요가 없었다.
장학금도 받았고, 더욱 많아진 수입으로 인해 최근 기분이 좋아진 준혁은 가벼운 마음으로 은지의 집을 나섰다.

문밖에서는 뜻밖에도 나나가 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냥, 끝났냥?
“왜 여기 있어?”
조금은 놀랐다는 듯이 준혁이 나나를 보고 물었다.
―참치가 다 떨어졌다냥. 가는 길에 사 가자냥!
“그, 그걸 위해서 기다리고 있던 거냐?”
―네가 끝날 때쯤에 맞춰서 나온 거다냥.
“백이랑 미는?”
―그것들도 독립심을 키울 필요가 있다냥!
“그래, 알았어.”
참치에 눈이 먼 나나였기에 그러려니 해 버리는 준혁이었다. 설마하니 그 잠시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트는 조금 돌아가야 하는데.”
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준혁이 작게 중얼거렸다.
―참치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참아 내야 한다냥!
나나의 말에 고개를 흔들며 아파트에서 나온 준혁은 나나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걸음을 옮기던 준혁과 나나는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응?”
돌연 준혁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묘한 느낌이 준혁의 마나를 자극했다. 그런 준혁과 다르게 나나는 한쪽 아파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파트의 옥상 쪽을 바라보던 나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준혁에게 말했다.
―느낌을 받은 것을 보니 제법 감이 늘은 것 같구냥. 뭐, 네가 얻은 능력으로 느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냥.
“그게 무슨 말이야?”
―저 위를 봐라냥.
그 말에 준혁은 나나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봤다. 하지만 어두운 하늘로 인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애초에 시력이 딱히 좋은 편도 아닌 준혁이었다.
―안경을 벗고 연습했던 대로 눈에 마력을 집중해라냥. 그럼 보일 거다냥.
“알겠어.”
나나의 말에 준혁이 서둘러 안경을 벗었다.
“응?”
그냥 안경을 벗었음에도 주변 사물이 안경을 쓰고 있던 것과 비슷하게 보이자 살짝 고개를 갸웃거린 준혁이었지만 곧 나나가 시킨 대로 마나를 눈에 집중하며 나나가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봤다.
“……저거 뭐야?”
흐릿하게 자신의 눈에 비치는 인영을 보며 준혁이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는 그 인영이 작게 움직이는 것을 보기 무섭게 준혁도 움직였다.
나나는 그런 준혁의 옆에서 눈을 반짝 빛냈다.
―마나를 이용해서 달려라냥.
나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준혁은 마나를 이용했다.
“으앗!”
순간, 빨라진 몸으로 인해 잠시 비틀거린 준혁이지만, 뛰어난 운동신경 덕분에 이내 중심을 잡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족히 배는 빨라진 속도로 준혁은 빠르게 인영이 떨어져 내릴 법한 자리에 도착했다.
―집중해라냥.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으니 걱정은 하지 말아라냥.
준혁과 나나가 본 것은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이었다. 다행히도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이는 무슨 심정인지는 몰라도 단지와 단지 사이로 뛰어내렸다.
때문에 그 사람이 떨어지는 것을 창문을 통해 보지는 못할 상황이었다. 거기에 단지 사이가 좁아 밤늦게 누군가가 다닐 만한 곳은 아니었다.
―집중해라냥. 그냥 받으면 절대 안 된다냥. 그냥 받으면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냥. 마나에 의지를 전달하라냥. 푹신하게 바뀌도록냥.
나나의 말을 들은 준혁이 바짝 긴장을 한 채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는 사람을 올려다보며 손을 뻗었다. 마나가 준혁의 의지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가 실패하면 저 사람은 죽는다냥. 그걸 명심하라냥.
자살하는 사람을 굳이 구하려 하는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또한 그것은 준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준혁은 애써 자신의 비밀을 밝히면서까지 죽으려 하는 이를 구할 정도로 정의심이 투철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 아는 사람도 아닌 상황에는 말이다.
그런데도 움직인 것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반응해서였다. 자동 반사 같은 행동이었다.
이번 일은 준혁에게 있어 책상에서 떨어져 내리는 펜을 바닥에서 줍는 것이 아닌, 공중에서 곧바로 잡으려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움직인 것.
그렇지만 이어 들려오는 나나의 주문에 후회도 들기 시작했다.
받으면 살린다.
받지 못하면 죽는다.
잘못 받아도 죽는다.
괜히 잘못 받거나 받지 못했을 경우 쓸데없는 조사를 받을 수도 있었다. 자신의 과외를 받는 학생들이나 부모들이 증인이 되어 주겠지만 엄한 일에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사절이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서면 훗날 후회를 할 것 같았고, 꿈자리도 뒤숭숭할 것 같았다.
―아직 마나가 부드럽지가 않다냥. 조금 더 부드러워야 한다냥. 떨어지는 위치가 높다냥!
“알았어!”
옆에서 잔소리를 하는 나나에게 그럼 네가 해 보라고 할 법도 했지만, 준혁 역시 놀란 상태여서 그러지 못하고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왔다!”
자신의 마나에 이질적인 느낌이 걸리자 준혁은 일단은 조심스럽게 떨어지는 사람을 마나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준혁이 생각한 지점까지 속도를 줄이고는 나나가 말한 것처럼 마나를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네가 느꼈던 것을 떠올려라냥!
나나의 말에 준혁은 침대에 누웠을 때를 떠올렸다.
‘부드럽게, 침대처럼.’
그러자 조금씩 마나가 변해 가기 시작했다.
―집중해라냥! 머리부터 떨어진다냥! 목이 부러질 수도 있다냥!
나나의 말에 준혁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미 움직인 마나만 해도 준혁으로서는 적지 않은 심력을 소모한 상태였다.
떨어져 내리는 속도를 줄이는 것부터 시작해 지금은 최대한 넓은 범위로 마나를 펼친 상태였다. 단순히 그런 것이라면 괜찮겠지만, 스스로 마나를 최대한 사용하려 한 것도 있기에 몸이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지쳐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몸이 지쳐 가는 만큼 정신력은 더욱 또렷해졌다. 아직은 죽을 만큼 힘든 것이 아니었기에 정신이 또렷한 것이었다.
아마 더 힘들어진다면 정신도 흐릿해질 테지만 오히려 지금은 더없이 집중이 잘되는 상태였다.
‘푹신한 마나!’
포옹.
떨어져 내린 사람의 몸이 다시금 살짝 떠올랐다.
“됐다!”
―멍청하다냥! 마나가 흩어졌다냥!
“헐?”
일단 받았다는 생각에 안도하자 마나가 흩어져 버렸다. 기존에 있던 것을 유지하는 것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지만 새로이 하는 것은 어려웠다.
준혁은 이미 한 번에 마나를 모두 쏟아부운 상태였다. 결국 준혁은 이층이 조금 안 되는 높이에서 떨어지는 이를 다시 받을 준비를 했다.
이층 높이라면 여전히 위험한 높이이기에 다시금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어?”
나나의 몸에서 마나가 일어나더니, 떨어져 내리는 이의 속도를 줄인 것이었다.
―한심하다냥. 도대체 어떻게 그리 중요한 순간에 그런 한심한 짓을 하는 거다냥.
“…….”
나나의 말에 준혁은 고개를 숙였다. 스스로도 자신의 실수를 잘 알고 있었다. 준혁은 마나를 사용할 수 있게 된 뒤로 집중이 얼마나 중요한지 언제나 느끼고 있었다.
―반성은 나중에 하고 그 사람이나 받아라냥.
“으응.”
준혁은 힘없이 대답을 하고는 일단은 자신의 앞에 떠 있는 사람을 받아 들었다.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뜻밖에도 아직 어린 소녀였다.
다행히도 기절한 것인지 소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 곳에다 눕혀 놓고 가도 되겠지만 소녀가 입고 있는 옷을 보고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 교복, 은지네 학교 교복이잖아?”
그냥 놓고 가기에는 준혁의 감각이 묘하게 불안함을 느꼈다.

* * *

치지직거리며 익어 가기 시작하는 돼지고기를 보며 규준은 입맛을 다셨다. 휴가를 나온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나올 때마다 고기는 먹고 싶었다.
부대에서도 드물게 먹기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하나의 담장을 넘어 먹는 맛은 실로 삼분 요리와 일류 레스토랑의 음식을 비교하는 것같이 차이가 컸다.
“침 떨어지겠다, 인마.”
“시끄러워. 사회의 맛은 군대에서 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남자라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군대 이야기에 유미가 눈을 반짝였다. 남자들이 자주 하기에 여자라면 누구나 싫어 할 법한 군대 이야기였지만, 유미는 달랐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그녀는 해외에 있었기에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세상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정작 그녀가 궁금해하는 것은 그의 군대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보다 아까 그 사람, 니가 아는 사람이야?”
“어? 누구?”
“왜, 덩치를 한 번에 넘긴 사람 있잖아.”
“아, 최 병장님.”
규준은 유미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며 최 병장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것은 지극히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고치기 힘든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전역했는데 아직도 그 자식한테 병장님이라고 하냐?”
“시끄러워. 한 방에 넘어간 녀석이…….”
규준이 덩치 큰 청년, 김길호에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했다.
“내, 내가 조금 방심해서 그런 거야.”
“방심이고 나발이고, 그 정도로 끝난 걸 다행으로 여겨. 최 병장님이 진짜 마음만 먹었으면 넌 몇 주간 병원 신세였어.”
“그런 비실이한테…….”
“에이∼ 덩치, 너 꼼짝도 못하고 넘어가던데?”
유미의 말에 길호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내가 아직 군대에 안 가서 그래. 가서 조금만 배우면 그런 성냥개비는 당장에!”
“배워도 소용없어. 내가 군대 가서 최 병장님하고 일 대 일로 싸워서 이긴 사람은 한 번도 못 봤어. 진짜 괴물이야, 괴물.”
“도깨비라며?”
유미가 어린아이같이 순진한 표정으로 규준의 말을 수정했다.
“그래, 도깨비. 으으.”
“도대체 도깨비가 뭐 대단하다고 그렇게 벌벌 떠냐?”
“끄응, 솔직히 지워 버리고 싶은 기억인데…… 쳇, 공과대 여신님을 위해 내 특별히 부끄러운 과거를 희생해야겠군.”
조금은 부끄러운 말을 꺼내야 함에도 규준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 보따리를 열기 시작했다.
“솔직히 나도 최 병장님과 같이 군생활을 한 것은 몇 개월 안 돼. 내가 들어갔을 때는 전역까지 몇 개월 남지 않으셨거든. 시기로서 나와 같은 1학년 1학기 마치고 갔는데, 최 병장님은 7월쯤에 갔고 나는 10월쯤에 갔잖아. 거기에 나이로도 일 년 차이가 나니까 훈련 기간 빼면 한 2개월 정도 같이 생활했겠다.”
“응응.”
유미가 상당히 기대된다는 듯이 규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는 여자면서도 군대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궁금하니까. 그러니 빨리 말해 봐.”
“알겠어, 알겠어. 윽, 고기 좀 뒤집어 줘.”
고기가 뒤집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규준은 다시금 말을 이어 갔다.
“솔직히 너네들이 군대 생활에 대해 모르니 어떻게 말을 해 줘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냥 내 기분대로 말할게. 완전 존경스럽다. 그 말밖에 안 나와. 진짜 멋있는 인간이랄까? 너희들 영화 보지? 혼자서 적진 침투해서 임무 수행하고 인간들. 그런 인간 같은 느낌이랄까? 군에 관련된 것만큼은 못하는 게 없는 사람이야.”
규준의 진지한 말투에 유미뿐만 아니라 길호도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다지 대단하게 안 보였어. 그냥 전역이 그다지 남지 않은 부러운 사람으로밖에 안 보였거든. 항상 조용히 있고, 고참인데도 그다지 애들하고 대화도 안 하고. 그냥 군생활을 그다지 잘 못해서 무시당하는 인간이라 생각했거든. 그러다가 그때가 왔지.”
“그때라니?”
유미의 눈이 더욱 기대된다는 듯이 반짝였다.
“우리 중대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기적으로 팀을 나누어서 서바이벌을 하거든. 그거 알지? 물감 총 같은 거?”
“아, 나도 그거 꼭 해 보고 싶은데.”
길호가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총을 쏘는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뚱뚱한 몸집인데다 단 한 번도 총을 쏴 본 적이 없는 길호였기에 군대 생활 중인 규준이 보기에는 엉성하기 그지없는 자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