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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지혜의 목소리에 감정이 실렸다. 조금은 도전적인 목소리. 그녀의 그런 목소리에 미아는 다시금 당황했다.
“네가 싫어하는 짓을 한 것 같아서…….”
“그게 아니란 거 알잖아요!”
미아의 조심스런 대답에 지혜가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잘못한 거잖아요! 바보같이 억지만 부리고, 아이같이 투정만 부린다는 거 다 알잖아요! 왜! 왜! 왜! 화를 안 내요! 내가 잘못했는데! 왜 항상 사과만 하냐고요!”
“…….”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은 저라고요.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도 저라고요. 저 때문에…… 나 때문에 아기가…….”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니 그런 말 하지 마렴.”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미아가 돌연 죽어 버린 아이에 대한 말이 나오자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내 잘못이에요! 내가 그때 그곳에만 없었어도, 내가 있지만 않았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요. 흐윽, 나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무거운 죄책감이 어깨를 짓누르자 결국 지혜는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하고 말았다.
이번에 죽은 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 어머니가 죽을 때도 자신이 먹고 싶은 게 있다고 투정을 부리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운동을 하고 돌아오던 그녀는 평소 지혜가 좋아하던 간식거리를 사러 평소와는 다르게 길을 돌아오다 그런 일을 당한 것이었다.
친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지혜였다. 그런데다 자신은 축복이 아닌 불행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나만 태어나지 않았어도…….”
짝!
상당히 큰 소리와 함께 지혜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런 그녀의 앞에 서 있는 미아는 자신이 때려 놓고도 믿기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미아는 지혜의 앞에서 단 한 번도 지어 본 적 없는 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두 번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어느 것 하나 네 잘못은 없으니까!”
지혜가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미아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요 근래 힘든 일을 겪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함부로 참견할 수는 없었다.
참견을 할 경우 분명 지혜가 자신을 더욱 멀리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녀의 눈앞에 보이지 않았을 때까지의 이야기였다.
정말로 우연히 지혜가 같은 학교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보니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뱃속에 있는 아이를 잃는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그 순간만이라도 지혜가 누군가 자신의 옆에 있다는 것을 느꼈으면 했다.
아이야 다시 가질 수 있고, 없어도 지혜가 있기에 미아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긴 해도 더욱 힘을 냈다. 오히려 죄책감으로 지혜가 괴로워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미아였다.
미아의 호통에도 지혜는 붉어진 볼을 매만지며 초점없는 시선으로 멍하니 있었다.
미아는 그런 지혜의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녀 역시 평탄한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다. 지혜가 남편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머니가 됨으로써 그녀가 어떤 괴로움에 휘둘릴지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지혜의 잘못이 아닌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녀가 괴로울 것을 알고도 재혼을 선택한 자신의 잘못.
그렇기에 이번에도 먼저 미아가 먼저 지혜에게 한발 다가갔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서 있는 지혜를 살짝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따뜻했다.
지혜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혜를 품에 안은 미아는 더없이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
그와 함께 반드시 그녀를 지켜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은 지혜에게 전해졌다.
“……죄송, 죄송해요. 흐윽.”
“괜찮아. 괜찮으니까, 아무런 걱정 마렴. 내가 어떻게든 해 줄게.”
“흐아아앙.”
따뜻하게 들려오는 미아의 목소리에 지혜는 결국 참아 오던 눈물을 터뜨렸다.
그동안 가슴속에 쌓여 있던 모든 답답한 감정들을 담아서.

* * *

대부분의 학생들이 깨어나기 시작하는 수업이 끝날 즈음이 되자 교수는 안경을 고쳐 쓰고는 쓰윽, 학생들을 둘러봤다.
대부분 누워 있는 것이 보이기에 교수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도 가장 앞에서 앉아 있는 몇몇 학생들은 나았다.
피곤한 표정을 짓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진지한 표정으로 수업을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름 만족을 했는지 교수는 주저없이 책을 덮었다.
“연습 문제 홀수 번호를 다 풀어오도록.”
수업 끝이라는 말도 하지 않고 나가는 교수를 뒤로한 채 많은 과제로 인해 한숨을 쉬는 학생들 사이에서 준혁은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이제는 항시 준혁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유미도 빠르게 필기도구와 함께 책을 가방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선 유미는 말도 없이 나가는 준혁의 옆으로 바짝 따라붙었다.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았기에 두 사람 사이로 무언가 묘한 기류가 흘렀다.
“도서관?”
유미가 돌연 준혁과 함께 도착한 곳의 건물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근 들어 준혁을 자주 따라 다녔지만 그가 도서관을 가는 것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한 채 학생증을 찍고는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는 준혁을 보고는 지갑에서 학생증을 꺼내 서둘러 그 뒤를 따라갔다.
다행히도 아직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준혁을 놓치지 않은 유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도서관을 둘러봤다.
그렇게 유미가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 준혁은 귀찮은 꼬리표 같은 유미를 데리고 자신이 원하던 장소에 도착했다.
“PC 이용실?”
다시금 유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많은 컴퓨터가 즐비한 곳 중 가장 안쪽을 찾아 들어가는 준혁에게 이번에도 별다른 질문도 없이 그의 옆에 자리해 앉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학교의 PC는 그다지 좋은 사양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이 많지 않아 두 사람이 앉을 자리는 차고도 넘치는 상태였다.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치기 시작하는 준혁을 힐끔 본 유미 역시 가만히 있기보다는 자신의 앞에 있는 컴퓨터로 그 어떤 바다보다 넓은 인터넷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인터넷 기사부터 시작해 자주 애용하는 쇼핑몰에 들어가 새로 올라온 물품들을 아이쇼핑하는 유미.
한참 동안 열심히 과제 문제를 작성하던 준혁은 힐끔 유미가 무엇을 하는지 바라봤다. 마치 병아리마냥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는 그녀였기에 신경을 쓰지 않을래야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인상을 찡그리며 조금은 느린 타자로 다시 열심히 문제를 치기 시작했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준혁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가격의 가방과 옷, 액세서리였다. 지금이야 조금 나아졌지만 하루하루 돈 걱정으로 살 때의 습관이 몸에 배어 있는 준혁에게 저런 사치품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할 일을 마친 준혁은 자신의 메일로 방금 작성한 문제를 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로 개인용 컴퓨터가 없는 준혁에게 PC방을 가는 것보다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에 있는 PC실은 중요한 장소였다.
처음에는 직접 손으로 문제를 썼지만 교수가 글씨체가 좋지 못한 몇몇 학생들로 인해 적어도 문제만큼은 컴퓨터를 쓰거나 아예 쓰지 말라는 말을 하였다.
공과대라 대부분의 문제는 계산식이었기에 아무리 지렁이가 기어가는 글씨체라 하여도 숫자는 알아볼 수 있었기에 교수가 한 말이었다.
처음에는 문제를 쓰지 않으려 했지만 왠지 문제가 붙어 있는 게 더 있어 보인다고 생각한 준혁이었다.
그와 같은 사정으로 인해 준혁이 마녀의 길을 걷고 나서부터는 잘 찾지 않던 도서관의 PC실을 찾아온 것이다.
공과대에도 있기는 하지만 그곳의 컴퓨터는 실습실에 있는 컴퓨터들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좋지가 않았고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았기에 사람이 없을 것이 빤한 도서관을 이용한 것이다.
“저희 점심 안 먹어요?”
당당하게 저희라는 말을 사용하는 유미의 말이 살짝 걸렸지만, 준혁 역시 보통 내공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이제 먹으러 갈 건데요.”
살짝 시계를 보니 다음 수업이 시작하기 전까지 약 40분이 안 되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유미가 생각하기로 음식을 시키고, 먹고 강의실로 가기에는 상당히 빠듯한 시간이었다.
작성한 문서를 출력하고 도서관을 나선 두 사람은 같이 다니면서도 말이 없는 것과는 다르게 오늘은 웬일인지 유미가 먼저 말을 걸기 시작했다.
“뭐 먹으러 갈 거예요?”
“…….”
유미의 말에 준혁이 잠시 걸음을 멈춰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혹시나 싶은 생각에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한편으로는 너무 나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준혁이었지만, 자신의 감각이 지금 유미와 자신이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저는 집에 가서 먹을 생각입니다.”
“에? 그럼 저는요?”
“평소에는 어떻게 드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때처럼 드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때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오늘은 친구들이 없어서 이렇게 따라온 것입니까?”
무언가 제2의 선택지가 됐다는 것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귀찮게 시선을 잡아 끄는 유미가 더욱 귀찮을 뿐인 준혁이었다.
살짝 언잖은 기분을 담아 말해 상대방이 죄책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을 준혁은 적절하게 이용했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지나가는 남학생들 중 옆에 애인이 있는 이들만이 그녀들의 레이더망을 피해 힘겹게 힐끔거리고 나머지 다른 남학생들은 다들 두 사람을 돌아봤다.
단순히 그녀만을 돌아보면 괜찮겠지만 곧 옆에 있는 준혁에게까지 시선이 이어졌다. 그나마 길게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물론 그 이유가 자신의 외모가 그녀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임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후문 쪽에 토스트 가게가 있던 것 같은데, 거기 가서 드시면 될 겁니다.”
준혁이 자신을 제2의 선택지로 선택했느냐고 묻는 듯한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던 유미였다.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든 준혁은 한 가지 방법을 더 제안하였다.
“식당도 많이 있고요.”
“혼자서 먹기에는…….”
‘알아서 남자들이 꼬일 것 같은데.’
유미의 말에 준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준혁이 떨어지기만 하면 주위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남학생들이 바로 그녀에게 달려들 것이다.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다면 분명 기회라 생각하고 달려들 것이기에 혼자서 식사를 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해 주었으면 하는데요?”
“그, 그냥…….”
“그냥?”
“같이 먹으면 되지 않을까요? 선배님? 오빠? 아무튼 혼자 드시는 것은 그다지 재미없잖아요.”
“딱히 혼자 먹지는 않는데…….”
작게 중얼거린 것 때문인지 아쉽게도 유미는 그런 준혁의 말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일단은 모여든 시선으로 인해 준혁은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가죠. 사람들이 쳐다보니까.”
자신과 유미를 바라보는 주변 시선이 거북한 준혁이 먼저 앞장섰다. 유미는 다시금 병아리같이 준혁의 뒤를 졸졸 따랐다.
그렇게 유미를 데리고 후문 쪽으로 나선 준혁은 여러 식당들을 지나쳐 한쪽에 자리해 있는 토스트 가게 앞에 섰다.
“못 본 사이에 이런 곳도 생겼네?”
신기하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던 유미는 앞에 적혀 있는 가격표와 함께 토스트의 이름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토스트는 그 이름 자체가 자신의 몸속에 숨겨 둔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음식이었으니 말이다.
“끙…….”
오랜만에 먹는 토스트였기에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유미와는 다르게 준혁은 가격표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내용물이 적은 토스트는 그다지 맛이 없는 듯 가격이 싸긴 했지만 안에 조금이라도 무언가가 들어간 것은 가격이 확 뛰었다.
“저는 그냥 집에서 먹어야겠네요.”
“에? 왜요?”
“가격대에 비해 그다지 양이 차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럼 저는 혼자 먹어야 해요?”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한 것처럼 상황을 이끌어 가는 유미로 인해 준혁은 꺼내서는 안 될 말을 꺼내고 말았다.
“그렇다고 저희 집에서 먹을 수는 없잖습니까?”
“저는 괜찮은데…….”
준혁은 유미의 당당함에 할 말을 잃었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정하세요. 토스트, 아니면 집 밥?”
“지, 집으로 하죠.”
돌변한 유미의 모습에 준혁이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어서 가요.”
유미에게 떠밀린 준혁은 결국 그녀를 데리고는 집으로 향했다. 속으로는 연신 궁시렁거렸지만 이미 데리고 가기로 한 이상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작은 보금자리인 원룸의 문 앞에 선 준혁이 문의 비밀 번호를 누르며 살짝 뒤를 돌아봤다.
“뭘 그렇게 봅니까?”
“죄, 죄송해요.”
그 누구라도 자신의 눈앞에서 무언가를 숨기려 하는 것을 본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진다. 그것은 유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준혁이 무언가 비밀스럽게 문을 열려고 하자 그녀는 잘못된 짓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보려고 한 것이다.
“그보다 비밀 번호…… 제 생일과 같네요. 7월 24일이 제 생일이거든요.”
“…….”
여태까지 제대로 된 말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지금처럼 당당한 유미의 달라진 모습에 준혁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밥이나 먹죠.”
자신의 생일을 머릿속에 각인시키려는 것 같은 유미의 행동을 슬쩍 회피하며 준혁은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을 열리는 순간, 준혁의 몸은 굳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