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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모사



미모사 (1화)
프롤로그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 조용한 발걸음, 그리고 조심스레 문을 여는 기척. 잠이 든 그녀를 배려하는 행동이지만 저절로 몸이 굳어졌다. 방으로 들어온 그가 침대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낮은 한숨 소리. 눈을 감았는데도 그의 시선이 느껴져 온몸에 열이 올라왔다. 그 긴장감을 참지 못해 하마터면 눈을 뜰 뻔한 순간, 그가 몸을 돌렸다.
늘 하던 대로 가죽 지갑과 휴대폰, 시계를 조심스레 화장대 위에 정리한다. 늘 흐트러짐 없는 정갈함. 마지막으로 그들의 결혼반지가 작은 소리를 내며 놓여졌다. 한 치의 군더더기 없는 행위. 깔끔하게 소지품 정리를 끝낸 그가 욕실로 들어가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뒤 욕실에서 들리던 물소리가 끊길 때까지도 그녀는 타는 것 같은 긴장 속에 있었다. 뱃속에 뒤틀린 감정들이 점점 더 엉키고 머리가 복잡해졌다. 입 안이 바싹 탄다. 이제 곧 그가 나오면 평소처럼 그녀를 안겠지.
지난 6개월간, 관계가 허락되어진 후 매일 그는 그녀를 안았다. 집요한 강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지만 그녀는 그걸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그와의 관계에서 느꼈던 그 충만함은 더 이상 없었다. 단편적인 쾌락. 하지만 그 끝은 늘 끝없는 추락과 절망감이었다. 부부로서의 의무감이 전부인 그런 관계. 그녀는 더 이상 그걸 참고 싶지가 않았다. 두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부질없는 기대는 더 이상 갖지 않는 것이 서로를 위한 길일 것이다. 매번 그녀를 안는 건 그 역시도 그런 기대와 부담감을 느꼈기 때문이겠지.
마음의 결정을 한 건 오래전이지만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건 그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정말 그를 사랑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도 헷갈리는 감정들이었다.
온갖 억측과 소문 속의 결혼이었다. 전도유망한 병원의 후계자와 가진 것 없는 간호사의 결혼은 다른 사람의 입방아에 오르기에 아주 안성맞춤인 가십거리였다. 약삭빠른 여자의 간교한 유혹. 일밖에 모르는 젊은 의사의 눈을 멀게 한 순진한 외모. 근거 없는 억측과 악의에 찬 소문들이 넘쳐났다.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다. 시어머니의 그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많은 사람의 그 억측과 우려는 어쩌면 처음부터 이 파국을 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빼놓은 반지 자국이 남은 손가락을 비벼 보았다. 언제쯤 이 자국이 사라질까? 한 달? 두 달? 아니면 일 년? 이 년? 어쩌면 낙인처럼 영원히 찍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떨릴 만큼 무서웠다.
물소리가 그쳤다. 그녀는 문득 뒤척임을 멈춘 채 숨을 죽였다. 잠시 뒤 욕실 문이 열리고 그가 나왔다. 맨발인 듯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곧 이불이 들춰졌다. 상쾌하고 시원한 향이 그녀의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익숙한 청결한 향과 함께 단단한 팔이 몸을 감아 왔다. 이미 긴장했던 몸이 더 뻣뻣하게 굳어졌다. 등을 돌린 그녀의 어깨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그가 부드럽게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전율과도 같은 떨림이 지나갔다.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이 들어가며 그가 그녀를 돌려 눕혔다.
그녀는 애써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선명하게 부딪혔다. 마치 격투 전의 전사처럼 긴장감을 품은 채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침묵의 시간을 그가 먼저 뚫었다. 낮은 한숨 소리와 함께 그의 단호한 입술이 다가왔다.
그 입술이 닿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이성을 잃고 그에게 매달릴 것이라는 걸 알았다. 육체적으로 그녀는 늘 그에게 약했다. 이대로 그를 받아들이면 두 사람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영원히 이 감옥 속에 갇히게 될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뺨에 와 닿자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그를 밀치고 침대 옆의 스탠드를 켰다. 그가 조금 물러나 앉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 불빛이 그들 사이의 성적인 긴장감을 몰아내 주길 바랐는데 오히려 더 은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가 다시 손을 뻗는 순간 그녀는 그를 쳐 냈다. 그의 눈살이 찌푸렸다.
“무슨 일이야?”
“싫어요.”
“뭐?”
멈칫하던 그가 금방 단단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본다.
“어머니 다녀가셨어?”
한숨이 바르르 떨리며 새어 나왔다. 그가 주는 중압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니, 이 결혼이 주는 중압감, 스스로가 느끼는 질식할 것 같은 의무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를 볼 때마다 느끼는 좌절감과 무력감이 그녀를 언젠가는 죽일 것만 같았다.
“아니요.”
“그럼 왜 이러는 거야?”
“그냥 싫어요.”
“피곤해?”
“누가 피곤하다고 했나요? 싫다고 했어요.”
“알아듣게 말해!”
결국 그가 역정을 냈다. 이제 말을 할 때다. 두 사람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을 때. 그를 위해서, 그녀를 위해서.
“우리, 이혼해요. 이런 식으로 사는 거 더 이상 못 참겠어요.”
훅, 하고 그가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깨를 내리누르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어둠을 노려보았다. 그의 거친 시선이 자신에게 닿지 않도록 그녀는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최후의 통첩처럼 그녀는 그를 똑바로 보았다.
“내일, 나갈게요. 당신한테 원하는 거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나만 놔줘요. 제발.”
“안 돼! 설마, 내가 그걸 허락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겠지?”
오만하고 단호한, 그리고 거침없는 말투. 그녀는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왔다. 스탠드 불빛을 등진 그의 몸은 평소보다 더 크고 더 강해 보인다. 그녀는 몸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한때는 그가 가진 그 강함이 자신을 감싸고 안전하게 지켜 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순간 단단한 그 앞에 선 자신은 나약하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 그녀는 두 팔로 자신의 몸을 안았다. 마치 그것이 자신을 보호라도 해 주는 것처럼. 하지만 다시 시작된 몸의 떨림은 점점 더 강해지기만 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작은 턱을 잡아 올렸다. 피하려 고개를 흔들어 보았지만 단단한 손아귀의 힘에 그녀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접촉으로 그녀의 떨림이 고스란히 그에게 전해졌다.
“당, 당신의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에요. 내 생각을 말하는 거예요.”
“여보.”
달래는 듯한 낮고 은밀한 음성. 그가 그렇게 부를 때마다 몸이 떨렸다. 때로는 기대감으로, 때로는 두려움으로. 지금 그녀는 그 두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당신은 지친 것뿐이야, 여보.”
늘 그렇다. 약해진 그녀의 틈을 사정없이 공략해 온다. 나오는 눈물을 참기 위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자신의 품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평소처럼 다시 그 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잠시지만 강한 유혹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요.”
“맞아. 당신은 지치고 약해진 것뿐이야. 휴식이 필요한 거야. 같이 여행을 가자. 따뜻한 햇살이 있는 곳에서 느긋하게 쉬다 오는 거야.”
“싫, 싫어요.”
“여보.”
“싫어요. 제발, 더 못 견디겠어요. 난 더는 못 해요. 이렇게 빌게요. 나 따윈 당신에겐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제발 부탁이에요. 날, 놔줘요.”
“그만둬!”
갑자기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주먹을 쥔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움찔, 뒤로 물러섰다.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건 결혼 전 딱 한 번뿐이었다. 결혼을 반대하던 시어머니를 향했던 그 화는 마치 얼음처럼 차가워 그녀는 숨도 못 쉴 정도로 무서웠다. 그녀에게만은 보이지 않던 모습인데도 그녀는 그가 두려웠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처음으로 그녀에게 보인 격한 분노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몸을 떨며 문으로 파고들 듯 움츠리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마음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지친 것뿐이야. 그는 손을 내밀어 헝클어져 내려온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여보, 겁쟁이처럼 굴지 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아니, 처음부터 그랬다. 이 말 많은 결혼은 그녀에게 상처만 주었다. 사랑으로 다 이겨 낼 수 있다고 여겼던 것들이 현실이 되면서 그녀는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찢어지고, 터지고 복구불능의 바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채 입을 열었다.
“당신이 싫어요. 당신이 싫어서 그래요. 어머님도, 별이 때문도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 싫어졌어요.”
침묵이 질식할 정도로 사방에서 압도해 온다. 그 중압감에 몸이 짜부라져 무너져 내리기 직전 그가 몸을 휙 돌렸다. 잔뜩 굳은 그의 어깨에 그녀는 미안한 감정이 생겼다. 이 모든 건 결국 그녀의 탓이었다.
“미안해요. 내가 못 견뎌서…….”
“도망칠 수 있을 때 도망쳐. 가능하면 멀리. 안 그러면 바로 잡힐 테니까.”
차가운 목소리가 음울하게 울리자 그녀는 입을 가렸다. 떨리는 몸을 간신히 돌려 방을 나왔다. 방 안에서 뭔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자신을 잡을 것처럼 쫓아온다. 그녀는 곧바로 손님방으로 뛰어가 미리 싸 놓은 가방을 집어 들었다. 떠나자 하는 순간 익숙했던 공간이 낯설어지고 숨이 막혀 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내내 숨이 막혔다. 익숙한 모든 것들이 생소하고, 두려워졌다. 그녀는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 간신히 올랐다. 떨리는 손 때문에 몇 번의 실패 끝에 겨우 시동이 걸렸다.
도망쳐야 해. 자신의 죄책감으로부터, 그로부터.
점점 더 그에게서 멀어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초조해졌다. 한적한 한밤중의 도로를 미친 사람처럼 달리던 그녀는 간신히 갓길에 차를 세웠다. 격정이 파도처럼 몸을 쓸고 지나갔다. 짧은 이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질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떨리는 몸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그녀는 자세를 바로 했다. 이젠 정말 혼자다. 처음부터 잘못된 관계였어, 이런 건.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결혼이 아니었다. 남편에 대한 감정과는 상관없이 그의 아내 자리는 그녀를 압도하고 끝내는 산산조각을 낼 것 같았다. 끊임없이 움츠러들다 끝내 시들어 버리기 전에 도망친 게 잘한 거야. 두 사람의 미래를 위해서.
1. (1)
아무 생각 없이 화분 안의 작은 식물을 건드리던 그녀는 작고 예민한 잎이 화들짝 놀라 움츠러드는 모습에 흠칫 손을 치웠다. 작고 섬세한 생김새를 가진 식물은 살짝만 건드려도 예민하게 몸을 피하듯 바르르 떨어 댔다. 마치 자신처럼. 씁쓸함이 신물처럼 올라왔다.
한참을 창가에 놓인 미모사를 보던 그녀는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이른 새벽 시간이라 불을 켠 방을 제외하고는 어두웠다. 악몽으로 잠을 못 잔 탓에 어지러운 정신이 바깥의 싸늘한 공기에 조금 맑아졌다. 그녀는 심호흡을 해 상쾌한 공기를 충분히 들이마셨다. 늦겨울 냉기를 품은 새벽 공기 속으로 입김이 하얀 연기를 만들어 냈다. 재미있는 놀이처럼 인영은 입김을 호, 하고 불어 보았다. 여러 번 그 행동을 반복하던 그녀는 갑작스레 떠오른 기억에 움직임을 멈췄다.
호오, 하고 거울을 향해 입김을 불어 주면 신기한 듯 그림을 그리던 아이가 떠올랐다. 아이가 앙증맞은 입술을 오므려 나오지 않는 입김을 불 때마다 그걸 보는 그녀는 웃음이 났다. 작고 오동통한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다. 가슴의 통증이 찾아오기 전 그녀는 떠오른 그 기억을 재빨리 지우고 방으로 들어갔다.
난방이 되지 않는 욕실에서 그녀는 덜덜 떨면서 세수를 했다. 후다닥 방으로 뛰어 들어가 따뜻한 요 밑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손발이 따뜻해지고 나서야 그녀는 옷을 갈아입었다. 최근 들어 더 심해진 추위를 피하기 위해 올이 굵은 털스웨터와 코르덴바지 위에 털이 달린 야상점퍼를 입었다.
남편과 헤어진 후 처음으로 가진 직업. 꽃집을 선택한 건 충동적인 결정이었지만 인영은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떠올리게 하는 것, 그와의 결혼을 연상시키는 것들과는 완전히 먼 생활이었다. 물론 그것과 상관없이 매 순간 그를 떠올리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바쁜 새벽 시간엔 조금은 그를 잊을 수 있었다. 그들의 결혼 생활도. 저도 모르게 사색에 빠졌던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양재동에 있는 화훼단지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새벽 네 시경 일어나 매일 화훼시장을 들러 활기찬 아침을 맞이하는 건 그녀에게 활력을 주었다. 그동안 자신의 삶이 얼마나 생기가 없었는지 매번 확연히 깨닫게 된다. 새벽의 시장은 터질 듯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를 떠나온 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던 그녀에게 새벽의 차가운 공기와 사람들의 활발한 움직임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녀는 목도리까지 완벽하게 두른 후 주차장에 세워 둔 중고 다마스에 올라탔다. 운전에 익숙지가 않아 새벽 운전은 늘 긴장을 하게 된다. 하얀 면장갑을 끼자 조금 안심이 된다. 안암동에서 양재동까지의 거리를 한 시간이 넘도록 운전을 해 겨우 화훼단지에 도착했다. 꽃집을 개업한 후 거래를 트게 된 생화매장으로 곧장 들어가 꽃을 골랐다. 내일은 꽃집 근처 고등학교의 입학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녀는 꽃다발을 만들기 위해 절화를 종류별로 골랐다. 장미와 튤립, 안개꽃을 고르는 그녀에게 아주머니가 연한 핑크색의 연약한 꽃을 추천했다.
“요즘은 수국도 많이 써. 여자애들 입학식 선물에 좋아.”
“그래요? 색은 이게 전부예요?”
“하늘색도 있어. 그것도 줘?”
야들야들한 수국은 아주머니의 말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직은 꽃다발을 만드는 데 익숙지가 않았다. 짧은 시간 창업 준비를 하면서 배운 게 전부라 고민이 되었다. 잘 만들 수가 있을까? 익숙지 않은 꽃을 잘 다룰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뭘 고민하는 거야? 이젠 아무것도 겁낼 게 없는데.
이런 작은 결정에도 노심초사하는 자신의 소심함에 그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만들면 뭐든 나오겠지. 못 할 게 뭐람.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수국 꽃다발을 만들기로 결정한 그녀는 꽃을 더 주문했다.
“그럼 그것도 같이 주세요.”
“혼자 갖고 갈 수 있겠어?”
“네.”
가지고 온 끌차에 꽃들을 실어 담고 인영은 활기차게 인사를 했다. 묵직하게 끌려오는 끌차의 무게가 좋다. 인형처럼 앉아서 우아함을 연기해야 했던 그때보다 몸은 힘들지만 직접 자신이 일을 하는 게 좋았다. 그래도 캄캄한 새벽에 운전하는 것만은 아무래도 피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었다. 봄이 되어 낮이 길어지면 괜찮아지겠지. 하지만 집으로 오는 내내 그녀는 바싹 긴장한 상태였다.
비밀의 화원은 돈암동의 여대 앞 좁은 골목길 안쪽에 있었다. 살림집을 개조한 곳이라 다섯 평 남짓한 가게 뒤쪽엔 작은 원룸처럼 살림을 할 수 있는 방이 있었다. 물론 방을 제외하고는 난방이 되지 않아 지독하게 춥긴 했다.
그 집에 세를 얻은 건 그녀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아파트를 내준 남편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다. 그에게서 바라는 건 없었다. 하지만 남편은 이혼서류 대신 아파트 소유권을 보냈던 것이다. 돌려보내도 번번이 돌아오던 그 서류는 결국 그녀의 서랍 한구석에 처박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