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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모사 (2화)
1. (2)


인영이 이곳에 세를 얻자 친구인 혜진은 기겁을 했다. 오래된 동네답게 낡은 집이 많은 골목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작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며 카페들이 들어와 분위기가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골목길이 조성되었다. 큰길가의 대형 커피숍보다 분위기 있는 작은 카페를 찾는 손님들이 늘면서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아직 꽃집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 때문에 혜진이 특유의 걸걸한 말투로 참, 잘 벌어먹고 살겠다며 욕을 해 댔다.
시간이 지나면 좀 괜찮아지겠지, 하는 태평한 생각을 하며 인영은 새로 사 온 꽃들을 정리했다. 입학식 시간에 맞춰 골목길 앞에 꽃을 내놓으면 그나마 다른 때보다는 장사가 잘될 것 같았다. 그녀는 내일을 대비해 미리 꽃다발을 만들기로 했다. 처음 만들어 보는 수국 꽃다발을 위해 그녀는 인터넷을 뒤져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몇 개 찾아냈다. 전문가처럼은 되지 않지만 꽃이 아름다워서 어떤 모양을 해도 괜찮았다.
아침나절 내내 입학식 꽃다발을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오후에 다육이를 찾는 손님 두 사람이 전부였다. 저절로 한숨이 후, 하고 나왔다. 겨우 꽃집을 하겠다고 결심한 게 석 달 전쯤이었다. 남편을 떠나자 막상 할 것도, 찾아갈 사람도 없었다. 여행을 하기엔 너무 지쳤고, 다시 취업을 하는 건 내키지가 않았다. 그나마 혜진이 있어 겨우 견뎌 낼 수 있었다.
친구의 집에서 그녀는 하루 종일 멍하게 있었다. 그런 그녀가 못마땅했던지 하루는 혜진이 커다란 프리지어 꽃다발을 사 와 던져 주었다. 기분 전환 좀 하라고. 상큼하고 생기 있는 그 향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이렇게 예쁘고 싱그럽게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이 다 이렇게 예쁘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군가의 손길에도, 누군가의 입김에도 시들지 않는 그런 꽃을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꽃집을 하자 생각처럼 녹록지가 않았다. 몸을 쓰는 일이 많았고, 장사가 잘되지 않자 걱정도 됐다. 남편과 헤어진 후 한 푼도 받지 않은 데다 가지고 있는 돈은 처녀 적에 모은 돈이 전부라 넉넉지가 않았다. 게다가 창업을 하면서 목돈을 쓰는 바람에 수중에 돈이 얼마 없었다. 자신이 이걸 다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감이 떨어지는데 우연히 미모사를 보았다. 그나마 장사가 잘되는 다육이를 고르는데 그 구석에 미모사가 있었다. 조금만 건드려도 금방 움츠러드는 연약한 식물.
‘당신하고 닮았어. 툭 하고 치면 부끄러워하며 움츠러드는 게.’
결혼 전 남편과의 연애기간이 길지 않은 데다 시간에 쫓겨 만나던 게 전부라 딱히 꽃다발을 받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 그가 우연히 꽃집을 지나치다 마음에 드는 꽃을 고르라고 했을 때 그녀의 눈에 띈 게 바로 미모사였다. 그때는 그냥 그게 마음에 들었다. 예민하고 섬세한 생김새. 툭 치면 움츠러드는 모습이 왠지 애처로워 지나칠 수가 없었다. 미모사를 살짝 건드리며 남편이 속삭였던 말. 그때는 미소가 나왔지만 지금은 정말 자신과 똑같은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하며 바르르 떨던 그 모습과 지금 자신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연약하고 겁에 질려 있다. 지금도 잠을 못 이루는 건 꿈에 그가 나타나서였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서 그 결혼 생활을 계속하라고 한다면 대답은 여전히 ‘노’였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서 미모사를 샀다. 화분은 매장에 두지 않고 자신의 방 작은 창문턱에 올려 두었다. 잠에서 깨면 바로 볼 수 있는 곳.
너보다는 강해져야지.
아침마다 그녀는 그런 다짐을 했다. 누가 건드려도 피하지 않는 그런 강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오후 네 시쯤 세 번째 손님이 들러 입학식 꽃다발을 샀다. 수국으로 만든 꽃다발이 예쁘다며 사 가는 손님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 헤벌쭉 웃는데 혜진이 들어왔다. 오랜 친구인 혜진은 안암동에 있는 대학병원의 간호사였다. 남편을 떠나 갈 곳이 없을 때 그녀가 머문 곳이 바로 혜진의 집이었다. 이곳을 선택한 건 혜진의 원룸이 바로 코앞이라 언제든 만날 수 있어서였다.
워낙 절친한 사이라 사람들이 자매냐고 물어볼 정도지만 두 사람의 외모나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인영이 가녀리고 늘씬한 반면 혜진은 중키의 조금 통통하고 귀여운 외모였다. 부끄러움이 많아 조용한 그녀와 달리 활발하고 사람들을 두루두루 잘 사귀는 친구였다. 그 때문에 인영도 친구가 아주 없는 편은 아니었다.
여중, 여고를 같이 나오고 심지어는 대학까지 같이 갔다. 둘 다 간호과를 선택해 졸업 후 혜진은 지금의 직장에, 인영은 삼성동에 있는 기업형 종합병원인 한솔병원에 취직을 했다. 병원 생활은 나쁘진 않았다. 육 개월 정도 적응 기간을 거친 후 인영은 나름의 방식으로 간호사 생활에 잘 적응했다. 기숙사가 있는 병원이지만 그녀는 집에서 통근을 했다. 외동딸이라 부모님이 그녀를 떼어 놓기를 원치 않았던 때문이었다.
일에도 익숙해지고, 병원 생활에도 익숙해졌을 즈음 갑자기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돌아가셨다. 달랑 세 식구였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시자 남은 그녀와 엄마는 어쩔 줄을 몰랐다. 아버지의 사고 후 두어 달 뒤에 결국 엄마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시기였다. 그래도 그 시기를 견딘 건 쓰러진 엄마의 곁을 지키고 싶던 그녀의 마음 때문이었다. 근무가 없는 시간엔 늘 엄마 곁에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지나오면서 그녀는 점점 더 말이 없어지고 어두운 성격이 되어 갔다.
그러다 그를 만났다. 하건우. 어쩌면 그에게 끌린 건 약한 자신을 단번에 상쇄시킬 만큼 강해서였을 것이다. 한 군데도 말랑한 구석이 없던 남자. 순환기 내과의 수련의였던 젊고 잘생긴 의사가 그뿐이 아닌데도 단연 그가 온갖 소문의 온상이 된 건 그의 특별한 출신 때문이었다. 병원장의 아들, 국내 최고의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 게다가 훤칠한 키에 눈에 띄는 잘생긴 외모까지. 완벽한 일 처리만큼 인간관계에서도 칼 같았다.
그가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와 얘기를 나눈 모든 여자가 두근거리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강한 외모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선택한 여자가 수술실의 일 년 남짓 경력의 눈에 띄지도 않는 조용한 여자라니. 병원이 발칵 뒤집어질 일이었다. 하지만 인영은 그와 마주치기 전까지 하건우라는 의사가 병원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것이다. 그를 만난 후에야 그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어째서였을까? 지금도 그가 자신을 선택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처음 마주친 그날, 그는 오히려 무서울 정도로 냉랭했다. 엄마의 면회를 위해 중환자실 앞에서 잠시 앉아 있었다. 다른 때라면 직원이라는 이유로 어느 정도 직권을 남용했을 텐데 그날은 하필이면 중환자실 내에 응급 상황이 터져 도저히 안으로 들어갈 염치가 없었다.
가운을 입고 멍하니 대기실 앞 의자에 앉아 잠깐 눈을 감았다. 이대로 눈을 뜨면 아버지의 사고도, 어머니의 병도 다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그런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다 뭔가 뜨끔거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순간 머리를 때리는 듯한 날카로운 충격이 그녀를 덮쳤다. 그가 쏘아보는 눈빛이 마치 레이저처럼 그녀의 심장을 관통했다.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그 눈빛에 주눅이 든 것과 달리 그를 마주한 순간 온몸에 열이 났다.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의 정체.
그 이후의 상황은 그녀도 어찌해 볼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미 예정된 수순을 밟는 것처럼 일사천리로 모든 게 이루어졌다. 수줍은 고백이라든가, 어색하지만 두근거리는 데이트 따위는 없었다. 처음부터 그의 여자인 것처럼 그녀는 그에게 끌려갔다.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어쩌면 그때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그의 압도적인 강함에 짓눌린 것일 것이다. 그때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뭔 생각을 그리하냐? 사람이 왔는데 웬 한숨?”
“아, 미안. 오늘 데이였어?”
“응. 미치는 줄 알았다. 응급이 두 번이나 터진 거 있지. 하루 종일 떡 쳤어.”
“수고했어. 좀 앉아. 커피 마실래?”
“좋지. 그런데 장사가 되긴 되는 거야?”
“아까 그 사람이 세 번째. 오늘 꽃다발 세 개 팔았어.”
헤헤거리면 웃는 그녀를 향해 혜진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어이구, 좋기도 하겠다. 지금 웃음이 나오냐? 그래서 어떻게 먹고살아?”
“좀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이제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잖아?”
“뭐가 괜찮아져? 요즘엔 꽃집도 다 기업형이야.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전국 어디나 배달되는 세상이다, 너. 이런 작은 꽃집은 드라마에서나 낭만적이고 예쁜 거지, 현실에서는 딱 굶어 죽기 좋거든!”
혜진의 말이 맞다는 걸 알면서도 인영은 그냥 웃기만 했다. 그런 친구의 모습에 혜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자식은 연락 없어?”
“…….”
“서류 정리 어떻게 할 거야?”
웃던 인영의 입가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일 년 전 그 집을 나오면서 인영은 자신의 말처럼 몸만 나왔다. 곧바로 자신의 도장을 찍은 이혼서류를 보냈지만 그 서류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아파트 소유권을 보낸 남편은 개인적인 연락도 하지 않았다. 다만 집을 나온 지 한 달쯤 지나 시어머니가 찾아왔었다. 시어머니를 다시 본 순간 자신을 내리누르는 압박감에 인영은 질식할 것만 같았다.
‘네가 지금 누구 앞길을 막으려 들어! 철없는 짓 그만하고 당장 들어가지 못해!’
늘 질책과 호통뿐이었다. 우아하고 세련된 외모 뒤에는 얼음보다 찬 냉랭함만 있어 도저히 인영이 파고들 틈이 없었다. 결혼을 허락한 건 아들의 확고한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걸 안 시어머니의 양보 아닌 양보라는 걸 알았다. 결혼 전 시댁에 인사를 한 후 시어머니는 드라마에서나 본 것처럼 그녀에게 돈 봉투를 내밀었다.
‘너 따위가 감히 누굴 넘봐. 이 정도면 병원 안 다녀도 먹고살 정도는 될 거야. 가고 싶은 데 가서 살아.’
충격을 받기보다는 무서웠다. 돈 봉투를 두고 어쩔 줄을 몰라 하던 그녀를 시어머니는 멸시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어머니가 내민 봉투를 그대로 두고 도망쳤다. 처음으로 그에게서 도망치려 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에 대한 그의 집요한 감정은 그녀와 시어머니를 놀라게 했다. 건우는 시어머니와 그녀 앞에서 감정을 폭발시켰다. 처음 보는 그의 분노에 인영은 깜짝 놀랐다. 말이 없고 냉랭하던 그의 분노는 주변을 꽁꽁 얼릴 정도로 차가웠다.
‘내 아내가 될 사람은 저 사람뿐입니다.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이 사람 모욕하면 그땐 어머니로 생각지 않겠습니다.’
결국, 시어머니는 아들에게 백기를 들었다. 결혼 후 시어머니는 계속 임신을 종용했지만 아이가 들어선 건 결혼 후 일 년이 넘어서였다. 하지만 인영은 첫 아이를 유산했고, 그 일로 상심했다. 다시 아이를 가지면 된다는 건우와 달리 시어머니의 태도는 냉랭했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뭐냐고 책망하던 그 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뒤로 한 번의 유산을 더 한 후에야 그녀는 별이를 낳을 수 있었다. 남편이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때였다.
그 때문일까? 인영은 늘 그가 멀게 느껴졌다. 그가 복무를 끝내고 돌아온 후에 그나마 별이를 매개로 해서 조금 가까워지긴 했지만 남편은 늘 어려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항상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지만 관계가 끝나면 낯설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다 별이를 잃었다.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묵직한 슬픔. 건우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달랐다. 아이를 낳고 조금 수그러졌던 냉대가 더 심해졌다.
‘집안의 대를 끊을 생각이냐? 가진 것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으면 여자구실이라도 잘해야지. 쯧쯧.’
그 말에 인영의 인내심은 바닥이 났다. 아이를 잃고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처음으로 시어머니에게 대들었다. 비명을 지르며 패악을 떠는 그녀의 행동에 시어머니가 기겁을 했다.
그 이후로는 집안의 행사 이외에는 시댁에 가는 일은 없었다. 아이를 잃은 인영은 매일 울었다.
‘아이는 다시 생겨. 조금만 기다리자.’
남편이 한 위로라고는 달랑 그게 전부였다. 그 뒤로 두 번의 유산이 더 있었다. 그 일은 인영을 벼랑으로 몰고 갔다. 건우 역시 강박처럼 그녀를 안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아이에 대한 두 사람의 집착. 점점 더 그 긴장감이 커져 갔다. 결국 인영은 그에게 더 이상 안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이 아닌 의무감에 짓눌린 관계는 더 이상 두 사람에게 기쁨을 주지 않는다는 걸. 더 이상 이 결혼을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옆에 있어서 더 외롭던 사람. 그가 만지면 그녀는 미모사처럼 움츠러들고 두려워졌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마음에 금이 가고, 믿음이 사라지고, 습관처럼 안는 그 행위들이 참기 힘들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남편도 같다고 생각했다. 아이에 대한 강박과 의무감으로 안는 게 그로서도 힘이 들었을 것이다. 매번 울고 있는 그녀를 말없이 안아 주던 그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그녀를 두고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의 뒷모습에 인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의 결혼은 이미 끝났다는 걸. 그들 사이에는 신뢰도, 사랑도 더 이상 없다는 걸.
그런데도 건우는 이혼서류를 보내오지 않았다. 그녀도 소송을 할 만큼의 열의는 없었다. 지금 당장 이혼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피해를 보는 것도 아니었다. 집을 나온 후 한 달 정도 줄기차게 찾아오던 시어머니 역시 포기를 했는지 이제는 발걸음을 딱 끊었다. 오히려 지금은 평온하다 싶을 만큼 조용한 날들이었다. 가끔씩 이렇게 한 장의 서류가 자신을 여전히 옭아매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날이면 섬뜩해지긴 해도 말이다.
“확실히 해. 그리고 받을 건 다 받아서 챙겨. 그동안 오죽 당하고 살았냐? 나 같음 강남에 빌딩 한 채 달라고 할 거야. 그 집, 그 정도 능력은 되잖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무섭다고 피하지 마. 자꾸 미룰수록 너만 손해야.”
“알았어. 커피나 마셔.”
일부러 친구의 잔소리를 무시하며 인영은 찻잔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내려놓았다. 그녀답지 않은 행동에 혜진도 결국 입을 다물었다.
혜진은 인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섬세한 얼굴선에 가녀린 몸, 그리고 여성적인 분위기가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인영은 텅 빈 사람처럼 보였다. 공허한 얼굴. 문득, 인영이 남편을 떠난 후 한 번도 진심으로 웃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오랜만에 같이 바람이나 쐬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오프야.”
“응?”
“어디 바람 쐬러 갈래?”
인영은 피식 웃었다. 기분을 풀어주려는 친구가 고마웠다.
“나 가게 못 비워.”
“어휴, 재미없다. 나 들어가서 자도 되지?”
“응. 저녁에 깨울게. 푹 자고 나와.”
혜진이 가게 뒤 쪽방으로 들어가자 인영은 한숨을 쉬었다. 가끔은, 아주 가끔씩은 기억을 통제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뒤숭숭해서인지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밀물처럼 그에 대한 기억이 사정없이 밀려왔다. 강한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움츠러들면서도 기쁨에 떨었던 그 기억이. 아팠던 것보다 그가 주던 온기가 떠올랐다.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는 게 정말 맞는 말일까? 그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 강해졌다. 미련퉁이 같으니.
문득 그는 어떤 생각으로 이혼을 미루는지 궁금해졌다. 일 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는 그를 만나 얘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하지만 곧 강렬하게 뇌리에 새겨진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고개를 저었다. 다시 그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 여전히 그를 떠올리면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남편보다 약한 자신이 더 두려워진다. 그 때문에 움츠러드는 자신이 한심했지만 인영은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