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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마도 1권(2화)
제1장 회귀하다(2)
쿵!
산을 울리는 둔탁한 소리가 퍼져 나갔다.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진 굉음의 주인공은 바로 십 척은 될 법한 대웅(大熊).
움푹 함몰된 대웅의 머리 위로 검은 목도가 위용을 뽐내며 와 닿았다.
“한 달 만이군!”
곰의 몸 위로 올라선 혁련호의 입에서 뿌듯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막사산의 우두머리인 대웅을 이기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한 달.
여우로 시작한 실전 수련이 어느새 곰을 이길 정도까지 발전해 있었다.
깨달음을 백지 위에 옮겨 적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애초에 자질이 뛰어났기 때문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성취가 아주 빠르다는 것, 그리고 그런 만큼 신체의 변화도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작 한 달 만에 칠 척의 장신이 되었고, 몸에도 근육이 보기 좋게 붙었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수련에 매진했기에 이룬 쾌거였다.
게다가 사흘 밤낮을 깎아 만든 목도는 남부럽지 않은 뛰어난 무기가 되어 주었다.
“좋은 일에 써 주마.”
죽은 대웅의 명복을 빌어 준 혁련호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가죽을 벗기기 위해서다.
곰 가죽은 따듯할 뿐만 아니라 매우 비싸서 앞으로 강호에 나갈 때에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터였다.
“휴우……. 가지고 돌아가는 것도 일이겠군.”
한 시진 만에 거대한 곰의 가죽이 말끔히 벗겨졌다. 들고 가기 쉽도록 가죽을 둘둘 말아 등에 걸친 혁련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던 그는 으슥한 숲 속으로 발길을 돌렸다.
뱀을 잡기 위해서였다.
곰의 양 앞발을 목에 칭칭 감은 혁련호는 발 디딜 틈도 없는 숲 속을 이리저리 누비며 눈동자를 굴렸다.
여느 때보다 진지한 눈빛이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숲의 곳곳을 뒤지고 있었다.
슈슉! 슈슉!
일순간 혁련호의 손이 번개같이 풀숲 이곳저곳을 찔렀다.
말끔하게 몸이 꿰뚫린 뱀들이 아직도 살아 꿈틀대며 목도에 꿰여 올랐다.
“좋아.”
이 정도라면 당장 강호에 나가더라도 일류 이상의 대우를 받을 터였다.
한 달 만에 이뤄 낸 성취에 혁련호 본인도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혼자만의 공부로 이루어 낼 수 있는 최대의 성취는 구성.
무공의 십이성 대성을 위해서라면 언젠가 분명 무인들과 검을 맞대며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어야 할 터였다.
아니, 그것은 그리 멀지 않은 일일 것이다. 벌써 그의 성취가 팔성에 다다랐으니 말이다.
집으로 돌아온 혁련호는 곰 가죽을 지붕 위로 힘차게 내던지고 한쪽에 있는 술독으로 향했다.
잡아 온 뱀들을 술독 안에 모조리 빠뜨린 혁련호는 물씬 풍기는 술 냄새에 참지 못하고 박을 쥐어 들었다.
“키야아!”
불이라도 삼킨 듯 뜨거운 열기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
이렇게 수련 후 마시는 뱀술의 맛은 피로를 잊게 해 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몸의 기운도 북돋아 주니 일석이조였다.
뼈에서 소리가 나도록 이리저리 몸을 움직인 혁련호는 곧바로 가부좌를 틀었다.
몸속에 보다 심후한 내공을 쌓는 것은 무공을 수련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했다.
무공의 깨달음과 달리 내공의 성취는 깨달았다고 해서 단시간에 쌓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흐읍!”
혁련호의 입에서 깊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내 혁련호의 주위로 새하얀 아지랑이가 수없이 피어올랐다.
막사산의 기운을 가득 머금은 정기(精氣)다.
무아지경으로 빠져 든 혁련호의 의식이 내면의 깊은 세계를 탐구했다.
한 편의 지옥도를 연상시키던 과거의 무림, 저마다 슬픔을 안고 있던 마두들이 그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과연 대인이 된다 해서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크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기에 큰 것인가, 모두가 우러러보기에 큰 것인가.
혁련호의 의식이 그 잡을 수 없는 해답을 찾아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어쩌면 혁련호 혼자만의 힘으로는 강호의 운명을 바꿀 수 없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없었다면 마도의 천하가 오지 않았을까?
마인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았을까?
숨을 들이켬에 따라 몸속으로 충만하게 들어온 맑은 기운이 스스로를 옭아매는 질문을 하던 의식에 청량감을 더했다.
혁련호의 의식이 활기를 되찾았다.
그렇다면 자신의 손으로 그 모든 것들을 뒤바꾸면 되지 않겠는가.
운명을 바꾸고 천의를 거스른다.
정해진 미래를 뒤바꾸고, 마두들의 운명에 개입하여 그들의 운명마저 바꿔 놓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그가 원하던 대인지로(大人之路)가 아니겠는가!
후우웅―!
스스로를 옭아매던 매듭이 풀리는 순간, 무아지경에 빠진 혁련호의 몸이 땅에서 삼 척이나 둥실 떠올랐다.
깨달음이 내공의 성취와 이어졌을 때 나타나는 부공삼매(浮空三昧)의 현상이었다.
그와 동시에 정수리에서 안개와 같은 덩어리 세 개가 둥실 떠올라 주위를 휘감았다. 일시에 몸속으로 빨려 든 막사산의 정기가 그를 삼화취정(三花聚頂)의 경지로 끌어올렸음을 의미했다.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끝없이 숨을 들이쉬는 그의 몸으로 막사산의 정기가 한없이 빨려 들었다.
“후우우!”
푸스스슥!
한 식경이나 지났을까.
혁련호의 입에서 마침내 무거운 숨소리가 토해져 나왔다.
주위를 돌던 아지랑이와 같은 기운이 그의 정수리로 스며들었다. 그의 몸이 천천히 땅으로 내려앉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광풍이 그의 몸에서 토해져 나왔다.
그의 몸에 흡수되고 남은 불순물이다.
“개운하군!”
눈을 뜬 혁련호는 빙긋 웃으며 몸을 털었다. 피곤함이 말끔히 가셨고, 팔다리에 다시 힘이 불끈 솟았다.
혁련호는 지붕 위로 신형을 날렸다.
잘 마른 멧돼지 가죽이며 늑대와 여우 가죽, 그리고 오늘 사냥한 곰 가죽이 지붕 위에 널려 있었다.
그간 수련하며 잡아온 짐승의 가죽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로군.”
하늘을 올려 보던 혁련호의 입에서 아련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과거 마도종주로서의 그는 바로 오늘 기연을 얻었었다.
절벽 언저리에 자란 산삼. 그것을 캐려다 절벽 아래로 떨어졌던 그때의 일이 눈에 선했다.
한참 만에 눈을 뜬 그가 본 것은 석굴로 들어서는 입구.
그리고 그 안에서 천마가 남기고 간 무공을 익힐 수 있었다.
천마가 남긴 영약도, 그의 혈도까지도 모두 혁련호의 소유였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가 없는 이상, 천마의 진전은 영원히 묻히게 될 터였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이들이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아니?”
햇살을 만끽하던 혁련호는 산 아래로 고개를 돌리다 인상을 찡그렸다. 산을 오르는 인영이 눈에 들어온 탓이다.
본래 요괴가 나온다 하여 인적이 드문 막사산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이곳을 보금자리로 삼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산을 오르는 이가 있다니?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군. 지금쯤 나는 절벽에서 산삼을 발견했을 테니.”
본래의 자신이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
자신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산을 오르는 인영을 바라보며 혁련호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오르는 인영의 정체는 가녀린 여인이었다.
연한 잿빛의 여행복을 입고, 버거워 보이는 큰 봇짐을 진 채 걸음을 옮기는 여인.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사연이 있어 보였다.
흥미를 느낀 혁련호는 편하게 몸을 누인 채 여인을 바라보았다.
“이런 곳에 집이……?”
한참 만에 혁련호의 집을 발견한 여인은 안도한 듯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고된 여행 중 쉼터를 발견한 것에 안도한 모양이었다.
“막사산에는 무슨 일이오?”
“……!”
지붕에 앉아 있던 혁련호가 불쑥 입을 열자, 여인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여인과 혁련호는 한참이나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둘 다 의문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여인은 사람이 살 리 없는 흉산에 살고 있는 혁련호에 대한 의문으로, 혁련호는 자신과 인연이 어긋난 여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저, 혹시 이곳에 살고 계신가요?”
한참 만에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실소를 터뜨린 혁련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두려워하는 기색까지 담겨 있었기에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혹 이 구절을 알고 계신가요?”
“구절? 말해 보시오.”
혁련호를 올려 보던 여인의 눈빛이 천천히 변했다. 확신과 불안이 반씩 섞인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범상치 않은 의지가 담겨 있었기에 혁련호는 거절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었다.
여인은 혁련호의 얼굴을 뚫어져라 올려 보다 나지막이 뇌까렸다.
“간장(干將)과 막사(莫邪)의 화로에서…… 천마 잠들다.”
“……!”
들어서는 안 되는 이름이 흘러나오자 혁련호의 눈매가 절로 꿈틀거렸다.
황급히 표정을 수습했지만, 그녀는 이미 그가 순간 동요했음을 눈치 챈 후였다.
“아시는 문구인가요?”
그녀의 눈빛이 삽시에 돌변했다.
혁련호가 듣지 못한 척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는 추궁을 멈추지 않았다.
“고, 공자님, 혹 알고 계신다면 제발 말씀해 주세요!”
끝내 무릎까지 꿇은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외쳤다.
이미 혁련호가 천마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다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혁련호로서는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 여인이 막사산에 천마의 진전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일까.
간장과 막사는 오나라의 유명한 장인과 그의 처, 그리고 그가 떨어졌던 절벽은 그들이 사용하던 화로를 닮았다고 하여 업화벽(業火壁)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그 화로에서 천마가 잠들었다는 것은 곧 그 절벽 아래에 천마의 진전이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게다가 저 여인이 말한 문구는 혁련호 생전에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마치 천마가 스스로 남기고 간 유언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소저는 누구이기에 남의 집에서 이토록 무례하게 구는 것이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혁련호는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여인은 화들짝 놀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혁련호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 곧 죽음과 직결되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스스로가 누구인지 정도는 밝히는 것이 예의잖소.”
그녀의 반응에 또다시 웃음을 터뜨린 혁련호가 넌지시 말하자, 여인은 그제야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녀는 광동 진가의 차녀 진효린입니다.”
“광동 진가?”
광동 진가라 함은 강호 삼대세가 중 하나였던 세가다.
혁련호가 강호에 출두했을 때는 이미 의문의 사건으로 멸족되어 대가 끊겼다고 했었다.
그런데 생존자가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 마지막 생존자가 천마의 진전을 찾아 이 산으로 들어왔었단 말인가.
아무리 천마의 진전이 있는 곳에 대한 문구를 알고 있다 하여도 여인 혼자의 몸으로 그곳을 찾아가는 것은 무리였을 터.
혁련호와 어긋난 후의 그녀의 운명은 결코 지금 그녀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혁련호에게 확신을 주었다. 자신이 기연을 얻은 날, 본래 인연이 어긋났던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터.
“천마, 그 이름이 뜻하는 무게를 알고 있소?”
“천하제일마(天下第一魔)이며, 그의 마공은 강호 제일의 힘을 지니고 있다 들었습니다.”
혁련호의 입에서 천마의 이름이 거론되자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 천하제일마의 힘을 얻으려 하는 이유는 무엇이오?”
“복수……입니다.”
혁련호의 다음 질문에 달아올랐던 그녀의 얼굴이 삽시에 가라앉았다.
과거를 떠올리는 그녀의 두 눈에 비통함을 넘어선 독기마저 번뜩였다.
혁련호는 침음성을 흘렸다. 복수를 원하는 이가 천마의 진전을 잇는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미래로 흐를 터였다.
게다가 복수를 말하는 그녀의 반응이 여간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광동 진가가 멸족된 것에는 대단한 암계가 얽혀 있는 듯했다.
천마의 힘을 얻어서까지 하고자 하는 복수.
차라리 여기서 저 여인의 목숨을 빼앗아 그도 알 수 없게 이어진 악연의 사슬을 끊어 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아니, 대인천하를 위해 하늘이 던져 준 첫 시련이다. 결코 물러서거나 회피해서는 안 된다.’
대인이 되고자 한다면 작은 인연 하나라도 그냥 흘려서는 안 되는 법.
하물며 천마라는 큰 운명과 복수라는 절대적인 목표를 지닌 여인과 마주쳤는데 물러선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시험하겠소.”
“네?”
숙이고 있던 진효린의 고개가 삽시에 혁련호에게로 향했다. 휘익 몸을 날려 그녀의 앞에 착지한 혁련호는 따라오라는 손짓과 함께 우거진 숲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